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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a Seed Mar 28. 2024

마흔여섯, 이십 대와 친구 하기

가능할까?

서른 즈음이었나?

이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은 힘들겠거니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세상에 치이다 보니,

내 속내를 훤히 드러내도 괜찮은 사람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직장에서 좋은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직장을 떠나고 나면 곧 관계는 시들해졌다.


3년 전 남편과 부다페스트로 이주를 하면서 잠시 생각했다.

'거기서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 그냥 인사만 하는 '아는 사람' 말고, 속내를 나누고 정기적으로 만나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말이다. 남편과 나, 둘 다 마흔이 넘어 시작하는 유학생활, 아무리 석사라고는 하지만 다들 나이가 엄청 어릴 텐데... 친구를 사귀는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수업 잘 듣고 대충 동기들이랑 어울리다가 집에 오면 나의 베프, 최고 베프 남편이 있지 않은가!

남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역시, 남편은 남편이다.

남편과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는 그런 엄청난 자연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하! 하! 하!

세상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지만, 그와 나에게는 서로의 영역이 있다.

그에게 카페는 커피를 마시면 바로 일어나야 하는 장소이고, 학교 교수 대머리 진행 상태라든가, 티모시 샬라메가 카일리 제너와 사귄다든가 등의 이야기는 사는데 전혀 필요하지 않은 쓸. 데. 업소. 는 주제였다.    


그런데 이주한 지 2년쯤 지나자, 나는 가끔 그런 쓸. 데. 없. 는 주제로 수다를 떠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가끔은 그냥 카페에서 (남편이 생각하기에) 쓸데없는 드라마, 영화 이야기를 미친 듯이 하고, 학교에서 발생하는 오만가지 잡스러운 가십 이야기로 키득키득 되기도 하고 가끔은 미래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도 나눌 있는  친구가 필요했다.


다행이었다.

내가 마리사, 아나 그리고 팸을 만난 것은.

한국과 달리 이곳은 서로 나이를 묻지 않는다.

대학원 동기끼리 호구조사는 국적이나 논문주제 정도로 끝난다.


마리사는 같은 기수 동기다.  20대 중반, 전형적인 미국인. 처음엔 너무나 뒤끝 없는 그녀의 문화가 약간은 불편했다. 직설화법이라고 해야 하나? 좋게 말하면 티 없이 맑은 대화법, 나쁘게 말하면 예의를 어디다 갖다 버렸나 싶을 정도로 생각 없이 말하는 대화법이 불편했다. 뚝뚝, 끊어서 정확하게 Yes, No로 의사를 표현하는 그녀의 대화에 가끔은 '좀 예의 있게 말하지'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저 화법, 돌려서 까지 않고 한방에 빡! 직접 대 놓고 말하는 거. 매우 생산적이고 효율적이구나.

'이번 주말에 시간 되면 같이 밥 먹을래?'라는 질문에 바로 '안돼. 나 약속 있어.'라고 말하고, '너 박사 할 생각 있어?'라는 질문에 바로 '안돼. 나는 박사 할 능력이 안돼. 석사논문도 완전 개판으로 써서 간신히 졸업하는데 무슨 박사야. 그건 내 영역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화법.  마리사를 보고 나는 생각했다. '아, 멋지다. 나도 배우고 싶다.' 그렇게 우린 조금씩 가까워졌다.  


 세르비아에서 온 아나는 나보다 한 기수 아래다. 석사 3학기에 신입생들이 들어왔는데, 그중 한 명이 아나였다. 아나의 포스는 어마무지했다. 좋은 쪽으로 가 아니라 나쁜 쪽으로.... 학기 첫 수업에는 불문율이 있다. 수업시간에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 대부분 분위기 살피고 수업을 드롭할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첫 수업부터 본격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 심지어 교수도 없다. 그런데 아나는, 첫 수업에 교수 말끝마다 손을 들며, 교수가 언급하는 영화(참고로, 나는 영화과를 다녔다)에 나온 주인공 대사를 성대모사하는 기괴함을 보였다. 심지어, 아무도 웃지 않았다. 싸늘했다. 아나의 썰렁한 개그에 공기조차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놀랐다. 그녀의 그 용감무쌍함에. 그 상황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치 내 얼굴에서 피가 나는 것 같았다. 너무 창피해서. 그런데 그녀의 기괴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더, 더, 더 심해졌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감탄했다. '어떻게 저렇게 신경을 안 쓰고 살지?' 아나를 보고 나는 생각했다. '아, 멋지다. 나도 배우고 싶다.' 그렇게 우린 조금씩 가까워졌다.


팸. 그래, 너와 나. 우리 둘이 아시아인. 유럽 한 폭판,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원을 다니는 아주 희귀한 두 명의 아시아인. 동유럽에서 아시아인이라고 하면 보통 이란, 인도나 카자흐스탄, 몽골 등을 일컫지 한국, 일본, 중국, 베트남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는 이곳에서 소수민족이다. 나는 한국인, 너는 베트남인.

아, 신입생으로 너를 처음 봤을 때, 너의 표정이란! 도움을 간절히 요청하는 너의 눈빛..... 같은 아시아인끼리 통하는 간절함. '나 여기서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 백인들 사이에서 나 좀 도와줘.'  

나는 이미 일 년을 다닌 터라, 학교에서 나름의 평판을 잡고 있었다. 그 말은 즉슨, 나 역시 일 년 동안 백인중심주의가 가득한 이 놈의 유럽 학교에서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 무한히 노력했다는 말... 내 겉모습만 보고 '어, 동양 여자애네. 영어 되게도 못하겠군. 아 수업에서는 또 얼마나 지질하겠어. 한마디도 못하겠지.'  판단하는 유럽 교수들, 유럽 학생들 앞에서 ' 나 어릴 적에 미국 살다 왔어. 그래서 내 영어는 굉장히 유창하지. 다시 말해서 너희 보다 영어 훨씬 잘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똑똑하단다.'를 보여주기 위해 난 과목별 프레젠테이션에서 기립 박수를 받아내고 완벽한 영어 에세이를 써내며  전 과목 모두 최고 학점을 받으며 인정받았다. 다시 말해, 아무도 나를 동양 여자라고 무시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기를 쓰고 잘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아직 시작하지 않은 팸은 눈빛. 그녀의 나약한 눈빛은 왠지 너무 가여워 무엇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였을까? 처음에 나는 팸을 외면했다. 논문 심사가 코 앞이어서 내 코가 석자였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한 수업에서 팸의 첫 발표가 시작됐다. 이 발표를 말아먹으면, 앞으로 학교 생활에서 찌질이로 낙인. 잘해야 할 텐데, 속으로 바라며 그녀의 발표를 지켜봤다.

어라, 잘하네. 미국식 악센트가 아니네. 영국식도 아닌데... 유창한 영어실력과 엄청나게 꼼꼼하게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잘했냈다. 팸은. 첫 관문을 스스로 잘 통과했다. 이후 난 팸이 기댈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어졌다. '아, 도움이 된다면 도와주고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우린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됐다.

친구가 불필요하다고 한 생각은 나의 오만이었다.

내 나이가 친구를 사귀는데 장애가 될 것이라는 것은 나의 경계심이었다.

내 나이를 알고도 친구들은 '오호~그렇구나.' 그뿐이다.  


그저 우리는 만나면 또 떠들어 재긴다. ㅎㅎ

L교수의 대머리가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것, 졸업 후 취업 걱정, 티모시 샬라메 걱정(ㅎㅎㅎ)에서 맛집 공유, 레시피 공유까지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일상을 공유한다.

마흔여섯 살, 이십 대와 친구 하기?

생물학적 나이를 콕 짚으니 굉장히 드라마틱하다.

중년 아줌마가 딸뻘되는  MZ 세대와 친구를 한다는 게 말이 돼?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이는 스스로가 자신을 그 나이로 정의할 때 비로소 꼰대의 면모를 드러낸다.

 

'나는 이십대니까, 저 사십 대 아줌마는 나의 젊음을 부러워하겠지?'

'아니, 노땡큐. 나는 이십 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돈도 없고 항상 미래가 불안했어.. 아. 싫어.

개고생을 하고 이제 좀 살만한데 다시 돌아가라고, 노떙큐!'


'나는 사십대니까, 저 이십 대 젊은 학생에게 인생에 대해 조언을 좀 해줘야지."

'아니 노땡큐. 당신이나 잘 사셔. 내가 아줌마 잔소리 들으려고 여기 온 줄 알아. 잔소리는 울 엄마 아빠로도 충분해. 노떙큐!'


이십 대에도 꼰대는 있고, 삼십 대 사십 대... 무한하게 많다.

나이를 기준으로 상대방을 평가하지 않으면 새로운 친구는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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