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식 아반떼XD
우리 아버지의 첫 차는 1990년식 현대 스쿠프였다.
문이 두 개 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장 느린 스포츠카.
아버지는 어린 내가 혹여 문을 열고 나갈까 봐 이 차를 구매하셨다고 했다.
성인이 되어 아버지와 같은 종류의 차를 구매하는 내 모습을 보며 깨달은 바가 컸다.
우리 아버지는 이 스쿠프를 2002년까지 타셨다.
검은색이었는데 칠이 다 까져서 천정은 점박이가 되었고,
옆구리는 기둥에 박았었는지 철판이 보이고 녹이 슬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늦잠을 자서 허겁지겁 나가는 모습을 보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아빠가 태워줄까?"
"아니 괜찮아. 안 늦었어."
사실 늦었다. 낡은 스쿠프를 타고 학교 앞에서 내리는 것보다 늦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보다 못한 지인께서 아버지에게 2002년식 아반떼XD를 선물하셨다.
오토미션, 듀얼에어백, ABS, TCS 등 안전장치가 많이 달린 모델이었다.
새 차 냄새와 함께 차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파주 아쿠아랜드 목욕탕을 갔던 것이 첫 추억이다.
내가 19세일 때 처음 우리집에 온 이 차는 38세가 된 지금도 여전히 우리집에 있다.
여전히 2002년 출고 시 장착했던 경기46으로 시작하는 초록색 번호판과 함께 말이다.
이 녀석은 현재 나의 출근길을 책임지는 데일리카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나는 이 녀석 말고도 차가 두 대 더 있다.
돈이 많은 건 아니고, 차를 공부하고 뜯는 게 취미라 그렇다.
독일차는 누구나 아는 명차이니 한 대 데려왔고,
독일차를 소유해보니 프랑스차도 궁금해서 한 대 더 데려왔다.
하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아반떼XD와 함께 보낸다.
이 녀석은 정말 운전하는 재미가 없다.
독일차처럼 기계적 완성도가 높다거나, 운동성능이 뛰어나지 않다.
프랑스 차처럼 멋스럽다거나 아기자기한 감성도 없다.
하지만 장점도 있다. 내구성만큼은 기가 막히다.
후덜덜한 수입차 부품값에 비하면 아반떼XD 부품값은 매우 저렴하다.
하지만 이제 19년 22만키로를 운행했으니, 보낼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몇 달 전, 채널을 돌리다가 OCN에서 상영하는 범블비를 아들내미와 함께 시청한 적이 있다.
주인공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추억이 있는 차를 고치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나온다.
범블비 영화 내용은 기억에 남지 않지만, 그 부분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더 이상 아반떼XD를 몰고 싶어 하지 않으시지만,
나에게는 19년의 추억이 함께 묻어있다.
차를 좋아하다 보니 차와 함께한 추억을 더 소중하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에게 자동차는 그저 이동수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자동차는 즐거운 취미생활이자 추억이 깃든 의미 있는 물건이다.
가족들과 함께 이 녀석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타던 차를,
아들과 함께 탈 수 있다는 것은 그리 흔한 경험은 아니다.
아버지는 본의 아니게 나에게 아반떼XD를 물려주셨다.
카시트에 앉아있는 지금 내 아들이 커서 내 차를 원한다면 기꺼이 물려주고 싶다.
오래된 차를 씻기고 정비하고 가꾸면서,
우리 가족의 지난 추억을 잠시나마 되새겨본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하다.
지금 폐차해도 이상하지 않은 02년식 아반떼XD가 얼마나 더 달려줄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함께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