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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렌 Apr 08. 2022

캐럴라인 냅 <욕구들>

4월 <동네북> 개인책 감상


캐럴라인 냅을 처음 접한 건 역시 <드링킹>이다. 하지만 이북 러버인 나로선, 종이책으로만 나와 있는 <드링킹>을 읽기 쉽지 않았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며 연이 없나 싶더니... 회사에서 종이책을 법인 카드로 살 기회가 생겨 저자의 <명랑한 은둔자>를 읽게 되었고, 작년 생일 선물로 좋아하는 친구에게 <욕구들>을 받아 역시 읽을 기회를 얻었다. 


책들을 읽은 감상은 동일하다. 문장이 정갈하며 통찰력이 대단하다. 이 모든 것이 에세이에 가까운 글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 통찰력은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력이기도 한데 그 점이 나는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자는 스스로를 가감없이 분석한다. 그리고 그 분석에 대한 결론을 자신만의 정갈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욕구들>을 읽고야 알게된 저자의 TMI에 따르면ㅡ저자의 부모가 정신분석학을 담당한다는ㅡ이 분석력이 어디서 솟아난 감각은 아니란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그걸 감안하고라도 대단하다.






<욕구들>은 거식증으로 대표되는 여자들의 충동적 욕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자의 에세이에 가깝지만 '여자들'이란 말을 붙임은, 이 책이 정말로 여러 여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나를 치고간 문장을 가져왔다.


좋은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 거죠? (-) 그 때문에 여자들은 일상의 가장 평범한 결정 앞에서도 헷갈려 한다. 당신이 한 그릇 더 먹는 건 배가 고파서인가. 아니면 슬퍼서인가? 운동을 평소보다 30분 더 하는 건 건강과 안녕을 위한 필요성을 의식해서인가. 아니면 또 한바탕 자기를 벌하고 있는 것인가.


"또 한바탕 자기를 벌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가끔 나의 나를 향한 통제가 성향 탓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나 혹은 남을 통제하는 걸 즐기고, 그것이 틀에 맞추어 갈 때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대목을 보면 굳이 이 문제가 아닌듯하다. 여자들의 아주 오래된 공통의 문제인 것이다. 

만족과 과잉을, 자제와 탐닉을, 쾌락과 자기 파괴를 구분하는 선은 어디일까. 그리고 그 선들은 특히 여자들에게 왜 그렇게 찾기 어려운 것일까.

그리고 저자는 이 해답을 페미니즘에서 찾는다.

많은 여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그 감정은, 갈망은 그 자체로 어쩐지 부당하거나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 원하는 대로 마음껏 누릴 권리는 대가를 지불하거나 스스로 노력해 얻어내야만 한다는 생각, 욕구를 채우려면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다.

남자들은 가지지 못한, 배우지도 않은 이 스스로에 대한 벌이 여자를 가둠과 동시에, 여자에게만 해당한다는 이야기. 그리하여 여자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냄에 솔직하지 못하고, 어떤 욕구들은 심지어 아주 내밀한 다른 욕구를 감추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저술한다.


책을 다 읽고야 드는 생각이지만, 에세이를 닮은 이 글은 구성이 뚜렷하다. 여성들의 거식증을 비롯한 다양한 허기와 욕구에 대한 분석. 그리고 분석의 사례들. 마지막으로 해결법까지. 나는 이 '분석'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 결핍이 나의 비정상적 면모가 아니라는 점. 이는 사회가 조장한 어떤 여성들의 공통점에 해당한다는 점. 이것만으로 나의 짐이 하나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많은 여성들의 소망이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럼 이 사안에서 과연 아주 내밀한 어떤 욕구를 감추는데 이 소망이 사용된 것일까. 아마도 "살이 쪄도 상관없는 세상"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 저자는 이를 명확히 지적하진 않지만 글의 흐름상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의 어떤 성별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냄에 가감없음을 떠나 방만해지기까지하는데. 그 남은 어떤 성별은 욕구를 감추다 못해, 그를 차폐하기 위해 거짓 욕망을 드러낸다. 이것이 여성의 허기, 성중독, 쇼핑중독 혹은 폭식에 대한 근원이다. 


이 책이 거식증에 대해ㅡ당사자성에 의해ㅡ 더 특수하게 다루고 있으니 덧붙이자면, 저자는 이 여성들의 식이 문제를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와도 연관시켜 설명한다. 여성들의 정신이 이 사회에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여성들의 신체가 이 사회에 차지하는 비중을 줄여가려는 미디어의 노력이 확대된다고 주장한다. <백래시>와 <미디어>에 관련해서는 별개지만 배드걸 굳걸이라는 분홍 표지의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어쨌든, 여성은 단순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뿐아닌, 사방의 미디어에서도 나를 향한 부정에 시달린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이런 잘못된 욕망으로 이끈다는 점을 재차 언급한다. 




또한 저자는 이 거식증이 소비욕으로 발현되는 심리를 다룬다.

걷잡을 수 없는 필요의 감각이 도사리고 있다. 외현화하려는 끝없는 충동. 모든 문제에는 즉각적인 해결책이 있고 모든 공허는 상품으로, 물질로, 그 무언가로 채울 수 있다는 꽉 잡고 놓지 않는 믿음.
미국인들은 욕망을 가장 구체적인 틀에 넣어 찍어낸 역사를 갖고 있다.

아랫 문장의 극단적인 예를 들어, 우울마저 약으로 해결할 수 있고 이 말의 동의는 공포는 그 이름을 호명하는 것만으로 어느정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는 여성들은 호명이 도저히 불가능한 공포를 안고 있다. 

더 불분명한 문제들ㅡ공허함, 소외, 좌절, 불안정ㅡ에 대해서는 상점이, 무수한 상점들이 있고, 각 상점들은 제각각의 위안거리로 넘쳐난다. 이것이 소비문화의 유혹, 벨벳처럼 부드러운 약속이다. 괴로운 일은 상품으로 해결하세요.

결국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정의되지 않는 욕구 거식증, 폭식증, 물질소비욕 등은 한가지로 귀결되는 것이다. 내 안에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 단순 "우울증"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이러한 잘못된 욕구로의 발현이 일어난다 이야기 한다. 


사물들은 아주 쉽게 갈망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이고, 다른 욕망들을 아주 쉽게 가려줄 수 있는 가면이며, 다른 욕망들이 좌절되거나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욕망이 생겼을 때 차오르는 불쾌한 불안감에 대한 아주 손쉬운 치료제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사람들의 '시발비용'이 생각났고, 부족한 여가 시간과 좀처럼 되지 않는 인간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욕구를 감춘 거짓의 욕구가 또 이 '소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페미니즘이 등장한다. 

욕망의 방향을 틀어버리는 소비주의의 힘은 그것이 남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타당한 평판을 오래도록 받아왔고,

그러니까 여자가 더 중요한 문제보다 소비에 집중하고 근원적인 해결책보다 소비로 풀어버리는 경향이 많다는 것, 이 뜻은 미디어, 광고주가 여성을 그렇게 만든단 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의 특기인 자기 분석이 두드러지는 책이지만, 나에겐 유달리 결론이 좋았다. 


: 저자는 정신분석학 교수인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항상 자신을 (앞에서 언급했듯이) 분석하는데 탁월했고,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분석하면 해결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는데 정신과에서 이 저자에게 준 조언이 달랐단 점에서 결론은 시작한다.


일단 하라. 거식증의 경우 너무 먹지 않고 이 식사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면 가장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일단 한끼를 다 먹어보라.


이런저런 시도들을 하다 보면 일부는 역효과를 내고 일부는 아무 차이도 만들지 않지만 일부는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 (-) 열쇠는 통찰보다는 기꺼이 해보겠다는 마음과 더 깊은 관계가 있고, 통찰은 기꺼이 하려는 마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쓸모가 없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은 막막함에 대한 해독제이기도 하며, 그 자체로 믿음의 낟알이다.


무력함에 대해 종종 거론되는 조언과도 유사한 이야기이다. 내 무력함을 분석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거기에 너무 빠지기만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만으론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정말로 어떤 작더라도 '해결'을 해보라는 것. 



: 저자는 거식증의 최종해결 상태가 "충분함"일 줄 알았다 언급한다. 허기와 만족사이의 평정이 존재할 줄 알았다고. 그러나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이 삶이라 서술한다. 

어느 정도의 공허함과 불만족은 삶의 불가피한 부분일 뿐 아니라 유용한 부분이기도 하다 (-) 완전히 확신하는 답, 최종적인 휴식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신 흡족함의 순간들, 별안간 몸과 마음의 정신이 나란히 연결되는 순간들이 있고, 마치 우주가 보낸 선물처럼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찾아오는, 내가 잘 먹여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순간들은 더없이 소박하게 포장되어 도착한다.

내가 충분하지 못해 불행하다면 그것이 그냥 삶이라는 것을, 다만 내가 불행하지 않다 느끼는 행복한 아주 짧더라도 그런 순간순간들은 있다는 걸 인지하는 것만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결론이 좋았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겐 유아기부터. 그리고 그때부터 견고히 다져진 것들이 미디어와 사회에 의해 강화되어 '결핍'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어쩌면 여성들에게 불행은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굴레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분명 그 불행 속에서도 사소한 행복이 있고, 그것처럼 내 결핍과 허기에 따른 사소한 결행이 있다. 그 사소한 행복과 결행을 두고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게 사실 우리가 바라는 '충분함'보다 더 가능하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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