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대하여
복효근
오래 전에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 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010-XXXX-XXXX.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머뭇거렸다. 폰을 손으로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러 상대의 신원을 확인하기 전까지 가슴이 떨렸다.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몸은 잊지 않고 있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에 대한 저장된 기억들. 밤낮 가리지 않고 걸려오던 전화, 욕설을 퍼붓고 협박하던 그의 목소리를 쉽게 지우지 못한다. 그가 술을 진탕 마신 날은 입에 담기 힘든 거친 말들로 음성 녹음을 남겼다. 번호를 여러 차례 바꿨지만 용케 알아내 전화를 걸었고 그날 밤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가족과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분리되기도, 도망치기도 어려웠다. 모두에게 상처만 남긴 2년이었다.
복효근 시인의 <상처에 대하여>를 만난 건 그 일이 있고 한참 뒤였다. 젊은 날 내내 속을 문드러지게 만들었던 누이의 화상. 감추고 싶었던 부끄러웠던 상처는 오랜 숙성을 거쳐 향기를 품게 되었다. 어쩜. 모든 상처가 꽃을 닮았다니. 흉터가 꽃이 되고, 상처가 향기를 낸다니. 믿기지 않지만, 믿고 싶은 이야기였다.
스승의 죽음 이후 위축된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갔다. 두려워하던 그들 앞에 예수는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다. 믿지 못하던 도마에게는 손가락으로 못 자국과 창 자국을 직접 만져보게 하셨다. 문이 잠겨 있는데 들어오실 정도로 부활한 예수는 시공간을 초월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디베랴 호숫가에 있던 제자들도 예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 전까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분명 부활 후 예수의 몸은 달라져 있었다. 온전한 육체가 되셨다. 그런데 온전한 몸에 못 자국과 창 자국이 남아 있다는 게 이상했다. 가장 먼저 사라지고 지워졌어야 했을 상처가 아니었던가. 치욕과 멸시의 흔적을 가진 몸을 과연 온전하다 말할 수 있는가.
혹시 온전함에 대해 가진 내 정의가 잘못된 건 아니었을까. 온전하다는 건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하고 매끈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아픔, 괴로움은 모두 휘발되고 새롭고 밝은 감정과 정서만 남게 될 것이라 믿었다. 어쩌면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상처가 사라지고, 흉터가 지워지는 게 아닌 상처와 흉터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그것들이 내 안에서 잘 발효되고 숙성된다면 상처는 고유한 지문이 되고 흉터는 나만의 체취가 되는 거겠지. 나를 찔렀던 못과 창의 흔적은 언제나 나와 함께이겠구나. 그렇다면 내 안에서 잘 익도록 해주자. 누가 아는가. 내 상처도 멋진 꽃이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