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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다쟁이 Dec 20. 2021

난 지방에 사는 게 좋아

인생의 대부분을 지방에서 보냈다. 군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전주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결혼해서 둘째 아이를 낳을 때까지 전주에서 살았다. 신대원에  다닐 때 남양주 마석에 2년 반 거주한 후 천안으로 내려왔고 10년 넘게 이곳에 정착해 살고 있다. 지방에 최적화된 몸인 탓에 한때는 서울만 다녀와도 앓아누웠다. 주위에서는 그런 날 보며 촌놈이라고 놀려댔다.

좋은 공연이나 강좌들, 교육이나 의료, 학문, 문화 콘텐츠 등이 서울에 밀집되어 있다 보니 불편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서울보다 지방이 좋다. 중심에서 비껴 난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여유, 속도와 밀도가 떨어지는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차분함 같은 게 있다. 어딜 가도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 드물고, 출퇴근 시간에 막히는 구간들이 있지만 서울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서울보다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지 않고, 막차가 일찍 끊기지만 덕분에 귀가를 서두르게 된다. 집값이 많이 오르긴 했지만 서울의 원룸 전세 가격으로 여기서는 아파트에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지방에서의 삶은 인기가 없다. 일자리 때문에 서울로 떠나는 이들이 많고,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이주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떠난 이들과 남겨진 이들이 있고, 남겨진 이들 중에도 호시탐탐 떠날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이 있다.

천안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겪었던 몇 가지 일이 생각난다. 청년 사역자들과 우연한 기회에 식사 자리를 가졌다. 대형 교회 청년 사역을 하는 분들과 만난 자리에서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천안은 청년 사역 불모지인 것 같아요. 서울이 가까워 주말이면 다들 서울로 올라가고, 교회도 서울로 다니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대학은 많지만 이 지역 출신들보다는 타 지역에서 온 이들이 대부분이라 졸업하고는 다 떠납니다. 그래서 여기는 청년 사역이 잘 안됩니다. 교회들도 청년 사역에 투자나 지원을 잘 안 하려고 합니다.” 그 이야기가 꼭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말처럼 들렸다.  

또 한 가지는 청년부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이다. 당시 청년부는 집사님, 권사님들이 소그룹 리더를 맡고 계셨는데 그분들을 만났을 때 이렇게 물으셨다. “전도사님은 우리 교회에서 언제까지 사역하실 겁니까?”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궁금했다. “저희 교회는 청년부 사역자가 매년 바뀌었습니다. 심지어는 일 년에 두 번 바뀐 적도 있어요. 우린 오래 있을 사역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걱정 마세요. 최소 5년 이상은 있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목사 안수를 받고 난 후에는 몇몇 권사님들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목사님. 이제 곧 서울로 가시겠네요”, “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 교회에서 목사 안수받은 분들은 조금 있다가 다 서울로 가시던데요”, “권사님. 걱정 마세요. 저는 더 아래로 내려갈 수는 있어도 더 위로 올라갈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 역시 천안에 오래 살고 싶지 않았다. 내려와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날 환영하지 않는 이들, 배척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사역해야 했던 특수적 상황 때문에 몇 년 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상했다. 생존이 목표일 정도로 한동안은 괴롭고 고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임기가 마치면 천안을 떠나 전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왔다. ‘단지 내가 사역하던 충남 ivf나 청년부로 보냄 받은 게 아니라 내가 사는 이 지역으로 보냄 받은 것은 아닐까’.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생각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졌다. 사람들은 천안을 나그네의 땅이라고 불렀다. 다들 잠시 왔다가 금방 떠난다고 했다. 그 후 나는 나그네의 땅을 정착민의 땅으로 만들 수 없을지 고민했다. 사람들은 더 나은 돈벌이와 아이들 교육 문제로 자신이 살 동네를 결정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다른 방식의 선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살 곳을 선택하고 뜻을 정하면 어디든 살 길이 열리지 않겠냐며, 누군가 남아 자리를 지키면 그 옆에 다른 누군가 같이 할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겠냐며 내가 먼저 이 지역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지방에 살기 때문에 패배감과 열등감을 가진 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자기는 어떻게든 서울로 갈 거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 적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사역하셨다는 걸 기억했다. 그러면 마음에 위로와 용기가 생겼다.

신영복 선생님은 <변두리를 찾아서>란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열등의식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변방은 그야말로 ‘변방’(邊方)에 지나지 않는다. 중심부에 대한 허망한 환상과 콤플렉스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하고 교조적인 틀에 갇히게 된다.”

변방은 창조 공간이라는 것. 중심부로 진입해야 한다는 강박과 열등감에 갇히면 상상력은 고갈되고 폐쇄적인 존재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변방의 삶을 즐거워한다면 새로운 일들이 가능하고, 변방의 존재인 날 사랑한다면 생동감과 활력 넘치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이렇다”,“여기 사람들은 이렇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규정과 단정의 언어에 스스로 매이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어떤 것에도 규정당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세련되지 않아도 품격 있고, 대단하지 않아도 재미있는 삶을 살고 싶다. 지방이기 때문에, 변방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시도하며 살아가련다.   

유은실 작가의 말처럼 변두리가 내 삶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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