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미기에 크게 관심이 없던 아들은 부쩍 외모에 관심이 많아졌다.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더니 점점 옷차림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며칠 전 아들이 겨울 점퍼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내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브랜드 있는 것 좀 사주면 안 돼?”
아들의 말에 아내는 “재작년에 산 롱 패딩도 브랜드 있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아들은 그런 저가 브랜드의 옷이 이제는 영 별로인가 보다.
아내는 다시 물었다.
“나이키 이런 거?”
“아니 그런 것까지는 아니고”
아내의 질문에 아들은 멋쩍게 대답했다.
오후 늦게 집에 돌아온 아내는 옷걸이에 외투를 걸고는 설교 준비를 하던 내 옆으로 다가왔다.
“세상에나 어떻게 아이들이 그렇게 비싼 브랜드의 옷을 많이 입고 다니는 거지?”
번화가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아들 또래의 아이들이 입는 브랜드의 옷을 유심히 살펴본 모양이다.
나도 중학생 때 엄마에게 브랜드 입는 옷을 입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던 적이 있었다. 엄마는 날 데리고 군산 시내로 나가 짙은 네이비색 나이키 점퍼를 사주셨다. 오래 입으라고 살짝 큰 사이즈의 옷을 사주셨는데 거울을 보면 꼭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헐렁했다. 그 옷을 입고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나이키 점퍼 하나 입었다고 친구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을 때 괜한 자신감이 생겼다. 브랜드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때 처음 실감했다.
나이가 들면서 이전만큼 브랜드에 집착하지 않게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고급 아파트 앞을 지날 때면 혼자 상상해 본다.
‘저런데 살면 어떨까’
신호 대기할 때 옆에 멋진 외제차가 나란히 서면 힐끗 옆을 쳐다본다.
그리고 혼잣말을 한다.
“저런 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타는 걸까?”
나는 안다. 내 속에는 아직도 꿈틀대는 욕망과 탐심이 많다는 걸.
그것들은 목사라는 내 몸을 만나 기를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