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로를 통해 알게 된 책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동네 도서관에 희망 도서 신청을 했었다. 우선 예약 알림 문자를 받고 책을 대출했지만, 빌려온 다른 도서 틈 속에 쌓인 채 며칠간 묻혀 있었다. 책장 위치가 화장실 옆이라 그런지 수시로 마주쳤고, 어제 아침 슬쩍 목차를 펼치다 홀리기라도 한 듯 계속 읽게 되었다.
정원 미달로 인해 언제 문을 닫게 될지 모르는 지방 사립대 출신의 진만과 정용은 졸업과 동시에 학자금 대출 빚더미에 앉는다. 졸업 후 인근 광역시 외곽에 보증금 없는 월세 30만 원짜리 방을 함께 구한 둘은 출장 뷔페, 고속도로 휴게소, 편의점, 우유 판매, 택배 상하차 작업 등 고된 노동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왜 없는 사람끼리 서로 받아내려고 애쓰는가? 왜 없는 사람끼리만 서로 물고 물려 있는가?’
진만의 밀린 알바비와 관련한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이 문장을 작가는 책 첫 페이지에 적어두었다. 어쩌면 이 질문이 작가가 독자에게 던진 화두가 아닐까 생각했다.
치킨 가게와 편의점 앞에서 붕어빵을 파는 것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는 노부부. 일이 서툴러 다른 직원에게 민폐가 된 삼계탕집 아주머니.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 막무가내로 물건을 파는 할머니. 가난으로 인해 서로를 물고 물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의 이곳저곳에서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으니까.
“너 왜 가난한 사람들이 화를 더 많이 내는 줄 알아? 왜 가난한 사람들이 울컥울컥 화내다가 사고치는 줄 아냐구!”
“피곤해서 그런 거야, 몸이 피곤해서……, 몸이 피곤하면 그냥 화가 나는 거라구. 안 피곤한 놈들이나 책상에 앉아서 친절도 병이 된다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거라구!”
p.112-113
얼마 전 청년 사역을 하던 후배들에게 강남에 사는 청년들이 공부도 잘하고 성품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돈 걱정 없이 맘껏 사교육을 받을 수 있고, 재력이 있으니 마음의 여유도 뒤따라 사람들에게 친절하다는 것이다. 돈이 구김살을 쫙 펴주는 다리미라는 말은 영화 속에만 등장하는 대사가 아닌가 보다. 가난이 피곤을 낳고, 피곤이 분노를 낳는다는 이 텁텁한 말들을 꾹 삼켜야 한다는 현실이 애처롭기만 하다.
“난 말이야. 카 푸어란 말이 정말 듣기 좋아. 하우스 푸어, 빌딩 푸어, 카 푸어. 이런 말들 멋있지 않냐? 뭔가 막 의지 같은 게 느껴지는 거 같고. 그런 거 빠지면 우린 그냥 푸어잖아, 푸어.”
p.254
하루 8시간씩 편의점 알바를 하며 월수입 180만 원 중 130만 원을 벤츠 할부비로 내야 하는 카 푸어인 상구가 결국 생활고로 인해 차를 팔면서 했던 말이다. 어차피 푸어여야 한다면 간지 나는 푸어로 살고 싶은 영앤푸어(young&poor)인 상구에게 묘한 연민을 느꼈다.
가난 때문에 뾰족해지고 피곤 때문에 사나워져도 서로의 힘겨움에 눈감지 않으려던 이들도 있었다. 버티고 버티다 결국 공장문을 닫아야 했던 사장은 가족이라 말만 하고 밥 한 끼 대접하지 못했던 직원들에게 마지막 한 끼를 위해 출장 뷔페를 부른다. 매일 술을 마시며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에게 전화 걸어 아재 개그를 들려주던 홀로 사는 옆집 아저씨가 어느 날 울음을 토해낼 때 진만 역시 그에게 아재 개그를 던진다. 그들의 위로는 가난하지 않았다.
지방에서 태어났고, 지방에서 성장했으며, 지금도 지방에서 살고 있다는 작가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감수성의 원천이라고 밝혔다. 나 역시 지방의 청년이었고, 지방의 청년과 호흡하며 살다 지방의 중년이 되었다. ‘지방’과 ‘청년’이란 낱말은 나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는 단어다. 소설을 읽는 도중에 알고 있는 누군가의 일상을 밀착해서 엿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 그동안 듣고 보아 왔던 청년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나의 짠함과 애틋함이 완독의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