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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혁 Jan 18. 2021

이중섭의 수리 수리 마음수리

[위로여행 3장-①] 통영 강구안 / 화가 이중섭

통영 강구안 전경 (출처_통영시 홈페이지)



바다가 주는 가장 감사한 선물은 정화(淨化)라고 생각한다. 인간계의 존재들이 영혼에 오물을 뒤집어쓰고 오면 담담히 씻어주는 바다. 스트레스와의 거리두기를 30단계쯤 할 수 있으니 마음병에 탁월한 백신을 맞으러 사람들은 바다에 내원한다. 



오늘의 행선지는 요양이 필요할 때마다 내가 마법의 선약(仙藥)을 구하러 돌아오던 고향 통영의 포궁(자궁)인 강구안이다. 그리고 그 바닷가에서 공구상자 같은 붓통을 들고 고장난 마음을 수리하던 그림꾼을 만나러 간다. 



이중섭의 완소 창작공간 통영



통영중앙우체국을 지나 세병로 끝에 다다르면 청마거리의 시작점이기도 한 곳에 유치환 시인의 흉상과 <고향> 시비가 놓여 있다. 거기서 대각선 건너편 강구안 쪽에 있는 건물(통영시 중앙로 146) 2층은 1950년대 전후 통영에서 활동하던 예술인들의 아지트, 성림다방이었다. 위란한 시대의 얼굴들이 담배 연기에 뭉뚱그려지는 그곳 다방 구석자리에 앉아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사내가 보인다.



통영 예술인의 아지트였던 성림다방
성림다방이 있던 자리 (비뇨기과-피부과 의원이 있는 곳.  2014년 촬영)



한국전쟁을 피해 1952년부터 2년간 통영에서 머물던 이중섭. 그는 대중들이 알고 있는 대표작 <소> 시리즈를 통영에서 그려냈다. 그밖에 <부부>, <가족>, <달과 까마귀> 등 다수의 명작들이 통영에서의 짧은 기간 동안 탄생했다. 가족과 떨어진 채 정신적 고난과 궁핍 속에 힘들어하던 이중섭이 다소 안정을 찾고 다작을 했던 창작의 산실이 통영이었다. 그런 걸작들을 모아 1953년에 개인전을 열었던 장소가 바로 성림다방이다. 



성림다방은 1950년대에 문화의 증폭기였다. 통영 출신의 예술가들 뿐만 아니라 전란을 피해 전국에서 남하한 다방면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작품활동을 하고 교류를 가졌다. 이중섭도 그들 속에서 잠시나마 심신의 건강을 되찾고 애착의 붓을 들었던 것이다. 



예인들의 고장 통영에서는 예술 시너지가 연락선처럼 오갔다. 성림다방에서의 이중섭 개인전을 관람했던 청마 유치환은 훗날 그 감상을 ‘괴변-이중섭 화(畵) 달과 까마귀’라는 시로 남기기도 했다. <봉선화>라는 시로 뭇사람에게 친숙한 통영 출신의 시조시인 김상옥의 시집 출판기념회도 성림다방에서 있었는데 그 자리에 축하하러 왔던 이중섭이 술자리에서 갑자기 사라지더니 다음날 김상옥에게 와서 “나는 돈이 없어 축하금을 줄 수가 없소”라며 그림 한 편을 그려와 주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이 그림이 <복숭아를 문 닭과 게>인데, 강원우정청이 지난 2016년에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우표 전지에 삽입되기도 했다. 김상옥은 그림에 대한 화답으로 <꽃으로 그린 악보>라는 시를 짓는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에 삽입된 <복숭아를 문 닭과 게>



통영 시절의 이중섭에게 가장 원류의 예술 에너지원은 통영 자체였을 것이다. 풍경화를 좀체 그리지 않던 이중섭이었지만 통영의 풍광명미 앞에서는 화폭에 통영의 이곳저곳을 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남긴 많은 통영 풍경화 중 대표작이라 할 그림은 강구안의 일부를 그린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이다. 중섭은 아마도 만하정이 있던 근처에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유치환의 흉상이 있는 곳에서 통영시내 남쪽 방향으로 몇 걸음만 더 가다가 우측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조선시대 때 지은 만하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만하정에 서면 통영 강구안 바다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어 예로부터 조선팔도의 묵객들 발길이 잦았다고 한다. 통영 바다를 보며 중섭은 무엇을 마음에 그렸을까.



이중섭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 (1952~54년)
위 그림의 배경이 된  통영 강구안 일대 (사진은 1960년대 추정. 출처_윤이상기념관)

 


이중섭은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정신이상과 영양실조 속에 1956년 마흔의 나이로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한참 나중에 자신의 이 그림이 7억5천만 원에 판매될 거라는 걸 몰랐지만, 확실히 통영은 이중섭에게 값어치 있는 치유와 영감의 원천이었다.


* 위로여행 3장-② <통영에는 아직 이중섭이 살고 있다>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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