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원목 슬리퍼와 만년필

겉바속촉

by 윤혜경


출처: U.S.A. Intermountain Therapy Animals R.E.A.D. Reading dog Program

돌아보면 초등학교 이른 시기부터 학교 도서관으로 안내해 주신 어머니 덕분에 내 독서습관이 바람직하게 자리 잡았을게다. 젊은 여교사의 발령지에 엄마와 함께 이동하느라 전학을 몇 번 다녔지만 지금처럼 공부에 과몰입 시대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전학으로 낯가림을 했던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고학년 위주의 관악대 한편에 끼워져 가장 비중이 낮고 빠르게 배울 수 있는 오카리나 파트에 들어갔었다. 방과 후 연습이 잦아서 덕분에 결석 없이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그리고 1년 후 다시 전근 가는 엄마를 따라 학교를 또 옮겼다.


당시에 피리를 닮았으나, 피리보다는 다소 짧고 퉁퉁하고 악기 값이 저렴하고 단순했던 연분홍색 오카리나는 지금 어머니가 즐기시는 도톰한 반달 빚은 모습의 색색으로 예쁜 오카리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바이올린과 첼로의 소리 이미지만큼이나 당시의 피리와 오카리나 소리 이미지는 다르게 기억한다. 보다 청명한 피리소리에 비해 좀 통통하게 알토로 나오던 오카리나로 어린 시절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


곱고 우아한 어머니는 30대 초반이었을 테고, 고단한 삶에 지친 나병 환자들이 머리와 얼굴에 보자기를 두르고 아주 가끔 밥을 구걸하러 길을 다니기도 했고, 여기저기 피난민 마을들이 들어서서 주저리주저리 전설이 열릴 것 같은 시절이었다.


1년 후 어머니와 내가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그 시절 대부분 자급자족 사회로 직장을 다니더라도 소소한 집안일은 직접 하던 시절인지라 목공 손재주가 좋으셨던 아버지의 연장 그릇은 마치 목수의 도구 상자처럼 언제나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야,

안방 책상 오른쪽 세 번째 서랍을 열면, 서랍 왼쪽에 30센티 자가 들어 있으니 가져오너라."


"***야,

작은 방 문갑 가운데 문을 열고 두 번째 서랍 손잡이를 잡아다니면 작은 가위가 보일 게다. 꺼내오너라."


토요일 오전근무가 끝나고 퇴근하신 아버지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엔 연장을 들고 똑딱거리셨다. 일하시는 중에 갑자기 추가로 필요해진 물건을 찾아올 것을 새가슴인 내게 주문하실 때가 있었다.


신기하게도 아버지는 집안 구석구석의 크고 작은 물건들 위치를 마치 사진을 찍어둔 것처럼 기억을 하고 말하신다. 아버지를 닮아서 별명이 왕눈이었던 내 눈에는 어쩌면 그리도 안 보이는지...


아버지의 주문을 받는 순간 나의 새가슴은 뛰기 시작하고... 제발 이번에는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목표를 향해 짧은 다리를 저어 달려가지만, 정작 서랍의 문을 활짝 열어도 안 보인다. 크고 둥근 눈을 더 크게 열어 뜨고, 아무리 휘둘러보아도 아버지가 주문한 물건은 가지런히 정돈된 서랍 속에서 내 큰 눈에만 보이지 않는다.


결국은 딸의 <심부름 완료> 기대를 접고, 하던 일을 놓아두고, 신발을 벗고, 방에까지 들어오는 번거로움을 감수한 아버지가 딸에게 심부름시키셨던 서랍 속, 문갑 속 물건들을 꺼내시며


"너는 눈도 큰데 그렇게 안 보이나?"


하셨다. 어린 마음에 커다란 아버지의 지적에 사용되는 큰 목소리는 분명 꾸중은 아니지만, 힐난으로 들려서 마음 한쪽 주머니에 차곡차곡 쌓였다.


초등 2학년 때인가? 토요일 오후에 퇴근 후 작업복을 입으신 아버지는 귀 뒤에 연필을 꽂고, 도톰한 나무판을 들고 오셔서 나와 남동생 발아래 놓았다.


"발을 나무 판 위에 얹어보거라."

그리고 아버지는 어린 남매의 발 둘레를 연필을 돌려가며 본을 뜨셨다. 그리고 하루 뒤에 당시에 '게다'라고 부르던 원목 슬리퍼를 만들어주셨다. 발등을 감싸주는 고무밴드가 들어간 천이 원목 나무 슬리퍼 양쪽에 못으로 단단히 붙들려 발등에 닿는 밴드천의 촉감이 시원했다. 나중엔 닳은 천을 떼내고 가죽으로 대어주셨다.


나무원목을 대패로 얼마나 왕복해서 다듬으셨는지 슬리퍼 바닥이 아기의 보드라운 양볼처럼 맨질거렸다.


샌님인 아버지의 손가락과 손바닥은 전공도 아닌 일을 익숙하게 해냈지만, 매끌거리는 원목 슬리퍼와 반대로 부어오르고, 대패가 만든 크고 작은 생채기들로 마치 맨손으로 벼논이라도 뒤집어엎은 양 몹시 거칠어져 있었다.


집 울타리 안쪽으로 지나는 개울 물길이 잠시 머물며 요긴한 빨래터가 되는 작은 웅덩이 (웅덩이)에 걸핏하면 원목 슬리퍼 차림으로 들어가 시원스레 첨벙거리며 그예 옷을 적시고서야 여름 더위를 날리곤 했다.



(출처: Kakao)


4학년 때인가? 어느 여름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아버지가 작은 칠판이 달린 책상과 의자를 선물해 주셨다. 토요일과 일요일 내내 쪼그리고 앉다 일어서다를 반복하시며 장도리와 톱과 대패로 오래 땅땅거리시더니 작품을 만드신 거였다.


덕분에 너른 마당에서 감나무들 아래에 펼쳐지는 그늘을 옮겨 다니며 책 읽기를 하거나, 하얀 백묵으로 까만 칠판에 글씨체를 요리조리 바꿔가며 써볼 수 있었다.


그렇게 여름이면 자주 마당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칠판 책상과 의자를 차지하고 귀한 설탕가루가 섞인 보릿가루를 수저로 떠먹으며 느꼈던 달고 조금은 거친 곡식가루의 고소한 맛을 기억한다. 학교에서처럼 앙증맞고 반듯한 의자에 앉아 쌓아 올렸던 여름 감나무 아래의 산들바람 기억을 오래, 아주 오래 잊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처음으로 스포이트 잉크 방식의 만년필을 선물해 주신 분도 아버지셨다. 중학교 입학을 기념하여 건네신 선물은 만년필이 얌전하게 담겨있는 상자였다.


생애 첫 만년필은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치마 입은 여중생들의 달구지 타기 덕분에 분실했다. 점잖은 척 새침 떼느라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바퀴를 딛고 올라가야 하는 달구지 따윈 눈길도 안 주었는데...


모처럼 동네 어르신이 이름을 부르며 극구 권하시는 선심에 친한 친구들과 함께 올라서 자갈길 신작로를 흔들거리며 동네 어귀까지 소달구지 멀미를 하며 왔다.


헉, 내 생애 첫 만년필 선물인데 소가 운전하는 달구지 틈새로 빠져버렸나 보다. 생애 첫 만년필과는 너무 빠른 이별로 아버지가 일러주신 만년필 촉 길들이기를 시도해 볼 새도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안되어 새가슴 딸에게 두 번째 만년필을 선물해 주셨다. 다시는 나를 이쪽저쪽으로 흔들어대던 소달구지를 타지 않았다. 그리고 가방 속에 빠이롯드 (이제 보니 일본식 이름 표기였나 보다) 잉크병을 담고 다니며 한쪽만 닳지 않도록 만년필 촉을 번갈아 기울이며 사용했다. 오래오래...


돌아보니 구순에 오래 사용한 몸답게 종일 누워계셔야 하지만, 여전히 허리 통증을 감내하며 허리 보조대의 도움을 받아 바르게 앉아 하루 일기는 써야 밥을 편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내 아버지는 겉바속촉(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음식 질감의 요즘 유행하는 줄임 표현방식 이라는데...)의 정 많은 아버지셨다.


내 고운 어머니가 겉이 아주 까칠한, 눈이 크고 남에게만 선비인 남의 편을 여태껏 궁중의 나인처럼 받들어 모시는, 자식은 모르는 까닭이 있을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의 편을 부엌에 드밀고, 무너져내리는 큰딸과 1+1으로 동물매개심리치료를 선택한 늙은 큰 딸의 눈에는 도저히 계산이 안 나오는 그런 헌신적인 시중을 들 수 있겠는가?


두 번이나 사고로 부서져 내린 골반 상태로 비척거리며 삼시 세끼를 구순 환자에 맞춰서 맵지도, 짜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음식을 다양하게 맛있게 준비하는 노력을 여전히 자발적으로 실행 중일 수 있겠는가?


내 어머니는 정작 징그러워 못 먹는 낙지를 허리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잔 짜증이 여전하신 아버지의 노년까지도 아버지를 위해서 마치 자신의 최애 반찬 인양 세발낙지도 정성껏 맨손 가락으로 손질하고, 낙지호롱 말이도 곧잘 준비한다. 그녀는 낙지를 먹지 않는다.


나는 어머니를 닮지 않은 게 분명하다. 아둔한 나는 집안 행사에 늘 등장하는 특별히 맛있는 어머니의 낙지요리를 즐기기만 하고, 어머니가 낙지를 못 드시는 걸 이제야 알았다. 내가 집을 가장 먼저 일찍 떠났으므로와 오랜 해외생활을 핑계 대며...


내 발밑에 낭떠러지만 보이는 오랜 시간 동안 노쇠한 부모님이 견디어내실 수 있도록 업어주신 신께 이제야 감사드릴 정신이 났다. 산타클로스처럼 두 분이 주문하신 손녀를 위한 먹거리가 외면하는 큰 딸인 우리 집 현관 밖에 차곡차곡 도착하곤 했다.


갈수록 늘어나는 병명을 감당해야 했던 투병생활 중 우울이 극에 달한 큰 아이가 종일 얼굴까지 이불속에 묻은 채 백설공주의 잠만 잘 때도 두 분이 보내주신 달콤한 떡은, 스테비아 토마토는, 신선한 딸기는 나와 딸과의 소통에 윤활유 역할을 했다. 병원 입퇴원 반복과 잦은 외래에 시간을 바치느라 스테비아 토마토의 탄생을 팔순이 넘으신 어머니 선물로 처음 알게 되었다.


매일 거실 달리기 선수들인 윗집 남자아이 셋의 엄마와 귀한 스테비아토마토를 2팩씩 나누었다. 돌잡이부터 세 살, 다섯 살의 뛰는 게 취미인 아들들을 키우느라 윗집 아이엄마는 "죄송해요"를 입에 매달고 산다. 다음날 오후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집 5살 큰아이가 "무슨 토마토가 그렇게 맛있어요?" 하며 인사를 건넸다.


어린 실내 달리기 선수들을 말리느라 날마다 지친 아이 엄마도 스테비아 토마토의 탄생 소식을 놓친 모양이다. 지난 명절에는 아이 엄마가 롤케이크를 우리 집 현관문 손잡이에 걸어놓고 전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게 늙은 자식을 여전히 지켜주시는 구순의 부모님... 나는 7명의 절친 중 유일하게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는 행운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