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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May 31. 2021

학력이 위조됐다

디자이너가 된 미포자

네모 하나를 반듯하게 못 그리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다음날 시간표에 미술이 있으면 겁부터 났다. 과학, 수학, 미술, 미술...? 왜! 하필! 미술만 두 시간이냐고, 성을 냈다. 미술 선생님도, 미술학원 선생님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렇게 일찍부터 미포자가 된 내가 어쩌다 편집디자이너가 되었을까.


입사 첫날은 편집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편집디자인도 하고 있었다. 그곳은 대표와 직원 모두 합쳐 셋이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지만 일당백은 아니었다. 다 짜여진 판에 텍스트만 끼얹는 수준이었으니. 더구나 디자인을 하는 시간보다 교정, 교열, 윤문에 쏟는 시간이 더 많았기에 디자이너라고 말하기에도 어설픈 포지션이었다.


언젠가 클라이언트가 뒤에서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서 있을 때였다. 마치 왼손잡이 며느리가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어머니와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뒤에서 요구 사항들을 말하는데 그에 맞춰 바로바로 수정을 해줄 수가 없었다. 스킬도 스피드도 부족했으니.


그냥, 실장님께서 해주시죠?


실장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O 대리가 이래 봬도 홍대 시각디자인과 나온 수재라고! 폰트, 구도, 컬러 하나하나 이러이러한 의도가 있다며 궤변을 늘어놓자 나를 바라보던 클라이언트의 눈빛이 180도 바뀌었다. 내가 그들에게 기대했던 반응은, 사실 이거였다.


홍대 시각디자인과도 별 거 없네!




<브레드 이발소>란 애니메이션에도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사회초년생 윌크가 손님에게 괴상망측한 머리 스타일을 시도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브레드 사장님처럼 되고 싶은 윌크. 그러던 어느 날 브레드와 윌크의 몸이 바뀌게 되는데..! 브레드가 된 윌크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의도치 않게 창조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다. (뒷이야기는 생략)


윌크가 했을 땐 괴상망측하다 욕했던 사람이 브레드가 하니 아방가르드하고 창의적이라며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같은 디자인, 같은 사람이었는데.


아마 내 디자인도 그러했으리라. 디자인에 대해서는 1도 모르는 사람이 한 건 똑같은데 홍대, 시각디자인 전공, 수재 버프는 실로 대단했다. 여백도 감각이 되었다. 역시 홍대 출신은 다르다고 모두가 박수를 쳤다. 그 후론 공연 포스터에, 책 표지에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가 되었다.




칭찬 덕분에 미술에 대한 공포는 사라졌지만 칭찬 때문에 착각도 했다. 나, 정말 소질이 있나? 어쨌건 그건 품고만 있어야 할 의심이었다.


디자인 전문 회사로의 이직을 시도했다. 결과는? 면접에서부터 제대로 깨졌다. 일단 전공자가 아니라는 게 가장 큰 결점이었다. 내가 한 디자인이 맞는지 확인 차 표지를 작업할 때 썼던 포토샵 기능들을 다 말해보라는데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게, 어쩌다 만들어진 거라.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 것 같은데.


먼 훗날, 진짜 홍대 미대 출신의 디자이너가 작업한 포토샵 레이어를 본 적이 있다. 내가 했던 건 뭐지? 정말 큰 죄를 지었다. 적어도 나는 끝까지 착각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건 학력 위조보다 더 큰 죄였다.


그때 클라이언트는 정말 좋아서 좋다고 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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