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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Jul 12. 2021

안될 일이었다

어쩌면, 이라는 상상


출판사 면접을 볼 때였다. 희망 부서는 편집팀이었지만 경력도 학력도 부족하여 소소한 경력을 살려 편집디자이너로 지원을 했다. 도표를 하나 보여주며 똑같이 작업해보라는 팀장의 테스트를 통과한 후, 대표와 일대일 면접을 봤다.

그땐 무슨 배짱이었는지 대표 앞에서 디자인이 아닌 편집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그러자 나이가 제법 지긋했던 대표는 손을 자신에게 보여달라고 했다. 이리저리 살펴보며 한참을 조물조물하기에 얼른 손을 뺐더니 정색을 하며 게으른 손! 이라고 타박을 하는 것이 아닌가. 뭐지? 싶은 순간 대표는 자기가 편집장에게 꾸준히 푸시를 하겠다며, 일단 디자인 팀에서 인정을 받으라고 했다. 그렇게 면접은 통과했는데 입사는 하지 않았다. 대표의 끈적임 때문에.


그래서 어쩌면, 이라는 상상을 했다.


한 월간지였다. 취재기자에 지원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내세운 학력 기준에 부합하지 못해 지원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총무팀이었다. 총무팀에 근무하며 성실함을 인정받으면, 기자들과 친분을 쌓아두면 면접 정도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총무팀에 입사를 했는데...



 

구독자가 보내오는 엽서들을 정리하여 담당 기자에게 전달하기, 퀴즈 당첨자에게 보낼 상품 포장하기, 정기구독자 및 광고주 리스트업과 같은 단순 업무들이 주였다. 이런 일도, 이런 적도 처음이지만 사소한 실수에 크게 혼이 나면, 그게 그렇게도 억울했다. 어느 시기가 지나면 누구나 너 정도는 할 수 있어요!라고 생각했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저렇게까지 프라이드를 가질 일인가? 싶었다.


총무팀을, 단순 업무를,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싸잡아 무시하는 거야 지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그것보다!

기자들에게 뭔가를 전달하러 가는 길이 매번 씁쓸했다. 마감 전의 흐트러진 책상 위도, 마감 휴가를 받은 빈자리, 빈 책상 위에 놓인 이제 막 나온 따끈따끈한 잡지 한 권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기자였던 적이 없었다면, 더 이상 기자를 꿈꾸지 않았다면 무심했을 한 컷, 한 컷이었다. 단언컨대 바로 아래층에 기자들이 없었다면, 수시로 그들의 책상을 볼 일이 없었다면, 잡지사가 아니었다면 세상 좋았을 회사였다.


적어도 일적인 문제만으로는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야근을 할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일은 오늘로 끝이었으니까. 정말이지 어느 순간이 되자 더 이상 실수할 일도 없었다. 상사와의 갈등도 동료와의 경쟁도 없었다. 각자 맡은 업무만 하면 됐으니까. 그러니 회식도 마냥 즐거웠다. 유명 호텔의 라운지와 클럽에서 연말 회식을 하는 호사도 누렸다. 실제로 인터뷰를 하고 취재를 나가고 마감에 쫓겼던 기자였던 예전보다 삶의 질은 훨씬 좋았다. 그런데 갈증이 났다.




누가 옆에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도 빨리 글을 써야 할 것 같고, 지금 안 쓰면 영영 못 쓸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났다. 이상하게 글쓰기는 그랬다. 출판사에서 디자이너로 있을 때도 작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설을 쓴다, 작품을 구상한다, 요즘에는 어떤 책을 읽는다 하면 옆에서 작업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급해졌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 바로 글 써야지! 신춘문예 꼭 등단해야지! 생각했다. 그런 환경에 놓이면 그렇게 됐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기자들이 가까이 있으니 이상하게 더 쓰고 싶었다. 기자여야 할 것 같았다.


발칙한 상상이었다. 총무는 기자가 될 수 없었다. 안될 일이었다. 또한 글을 썼던 사람이,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 글 쓰는 사람 곁에서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안될 일이었다. 쫄쫄 굶은 채로 그림의 떡을 보는 건 지상 최고의 곤욕이었다. 이러다 병나지, 싶을 정도로 위가 말도 못 하게 쓰렸다.


글을 써야할 것 같아서 퇴사를 했다. 이유는 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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