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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Jan 18. 2022

답습은 싫다

누구처럼 말고 나대로


4년 먼저 중학생이 된 오빠는 매 방학 때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두 시간씩 비디오를 봤고, 시청이 끝나면 반나절은 꼬박 방에 박혀 문제를 풀었다. 그렇게 오빠는 학원을 다니지 않고도 매번 전교 1등을 했다. 부모님은 이 모든  을지로 지하상가에서 힘들게 구한 학습용 비디오테이프 덕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는 자연스레 내게로 넘어왔다.


영상 속 선생님의 대사를 기막히게 잘 외웠다. 이를테면 이 대사 끝에는 휴식 시간이 있다 정도? 수업이 끝나면 엄마에게 달려가 쉬는 시간에 나오는 끝없이 펼쳐진 알프스 산맥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빨간 열차 영상이 너무 멋있다고, 선생님이 머리를 이발하신 것 같다고, 목욕탕을 다녀온 모양인지 얼굴에서 광이 난다고. 수업 내용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들을 해맑게도 했단다. 그때 그 영상지금도 눈에 훤하다.  


오빠가 했으니 너도 해보라는 데에 반발심이 일었던 건 아니다. 그랬다면 수업조차 듣지 않았겠지. 어찌 됐든 수업은 들었다. 문제를 풀지 못할 뿐! 저 문제를 꼭 풀고야 말겠다는 오기는 오빠에게나 있었다. 문제를 풀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문제를 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는 걸, 오기보다 포기가 편했던 걸 누구 한 명이라도 알아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KBS에서 <개승자>라는 프로그램을 방영 중이다. 아쉽게도 선배라고 불리는 개그맨들은 이전에 했던 개그를 그대로  하고 있었다. 똑같은 패턴에, 똑같은 멤버, 똑같은 유행어를...! 어느 개그맨의 화법은 다시 봐도 재미있었지만, 추억팔이는 딱 거기까지였다.


눈에 띄는 건 새로운 시도와 신선한 웃음으로 중무장한 신인 개그맨들이었다. 새로움이 이토록 반가울 줄이야! 와중에 안타까웠던 , 그들이 선배와 함께 무대에 설 때였다. 객석은 웃음기 쏙 뺀 박수만 가득했다. 시청자들이 아니 내가 개승자에 바란 건 박수가 아니라 웃음이었다. 개그콘서트 때에도 그렇게 박수만 쏟아졌지 아마? 이쯤 되니 무대를 그리워했던 이들끼리의 리그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방송 관계자의, 제작진의 간섭훨훨 날 사람들인데. 아, KBS라서 안 되려나?


나아가 후배가 선배에게 듣고 싶은 것 역시, 확신이지 성공담이 아니다. 라떼는 아!

 



한창 면접을 보러 다니던 때, 말하자면 백수 시절엔 책을 읽을 시간이 정말 많았다. 당시에는 도서대여점이 동네마다 하나씩은 있었다.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이 아니어도 남는 게 시간뿐인 그때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편식을 하는 편이라 오로지 소설만 팠는데, 그것도 알고 보니 흠이었다.


한 날은 면접관이 최근에 무슨 책 읽었냐고 묻기에 여러 소설을 읽고 있다고 말했더니,

요즘 세상에 소설을 읽는 사람이 다 있네? 세상 쓸모없는 책이 소설인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대체 왜 읽는 거야? 킬링 타임용? 그 시간에 차라리 자기계발서를 읽어.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뭐 하나라로 배우는 게 낫지. 그게 아니면 신문 기사를 읽든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지. 원, 소설만 읽으니 뭘 알겠어.

이런 날 선 답이 돌아왔다.


그 면접관이 소설을 까내렸듯, 나 역시 자기계발서를 좋게 보지는 않았다. 책을 읽은 이상 따라 해야 할 것 같고, 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은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싫었다. 그렇게 하면 나도 워런 버핏처럼 되나? 아침형 인간으로 살아야 성공하나? 마치 학습용 비디오테이프만이 정답이었던 부모님을 보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철학을, 인생을 동경하기에 따라 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것 같다. 내게 그런 롤모델없어서일까. 그럼에도 가끔 내뱉는 말은 있다. 인생은 기안84처럼.  


누구처럼 사는 것보다 나대로 사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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