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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해 Jan 25. 2022

짜증 나서 싫다

안전하게 이별하기


"오류 10. 필터를 확인하세요. 필터가 젖었거나.."

필터는 물에 젖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어도 교체해줬다.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질 거야 어르고 달래며 내부를 마른걸레로 구석구석 닦아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자는 금방 또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분명 햇빛에 바싹 말린 필터를 썼는데, 거실 바닥에 물기 또한 없었는데 왜? 어떻게 할 수 없어 너무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나더러 대체 어쩌라고! 그걸 피해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또 말도 되지 않는 곳에서 길을 헤매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서있기 일쑤였다. 이제는 (스스로 집을 찾아오지도 못해) 꼭 내 손을 거쳐야만 '충전을 시작합니다'란 말을 듣는 지경까지 됐다. 이러고도 로봇이라 할 있겠어? 어? 


짜증 낼 일이 아닌데 짜증 내는 나도 짜증이 난다. 그런 나를 내 눈으로 확인한 날이 있었다.

몇 해 전, 남편과 여행을 준비하며 1분 1초를 모두 기록할 수 있게 캠을 구입했다. 캠은 여행 내내 남편의 손에 있었고 영상 속 대부분은 '나'였다. 아무 탈 없이 잘 놀다 왔다고, 웃음만 가득했다고 생각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촬영본을 돌려보는데 내 표정에, 말투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한 여름이었다고 해도, 미칠 듯 더웠다고 해도 말도 못 하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걸 다 받아줬기에 아무 탈이 없었던 거였다. 짜증의 이유는 같았다. 남편은 내 뒤에서 캠을 찍으며 말을 걸었고, 난 대부분을 잘 못 들었다. 그렇게 두 번째는 어? 세 번째는 뭐? 네 번째는 ...어! 가 됐다. 끝까지 무슨 말을 한 건지 모를 때가 더 많았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온갖 짜증이 섞여있었다. 내가 안 들린다는 이유만으로. 보기 민망할 정도로.   

불쾌지수가 높은 날이 연일 계속된 탓이었지만 그도 같은 상황이었으니,  말이 없었다.  


그날 이후 내 안의 짜증은 내 안에서 끝내자, 절대 티 내지 말자! 다짐했다. 일단 짜증이 나는 순간 '내'가 그들에게서 피해 있는 게 최선이었다. 아무도 건들지 못하게, 누구에게도 불똥 튀지 않게. 너와 나를 위해.




가끔 아이나 남편이 내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때가 있다. 내가 보기에는 화가 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짜증을 낼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내게 짜증을 내면 화가 났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을 때면 아이는 내게 그렇~게 짜증을 냈다. 왜 못 알아듣냐고. 그럼 난 또 그 짜증을 그대로 돌려줬다. 왜 짜증을 내냐고. 집이라면 어디로든 잠깐 피하면 되는데 밖에선, 맞불이 되었다. 모전자전이구나 역시!  


물컵이 바로 아래에 있는데 왜 걸 못 보지? 맞으면 다칠 텐데 왜 저걸 저렇게 휘두르지?  그러면 다쳐, 엎지른다, 걱정하다 컵 치워주기, 다른 무기로 대체해주기를 반복하다 끝내 그만 해 쪼옴! 짜증을 내고야 만다. 

3년 전인가, 아이를 업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대여섯 먹은 남자아이와 엄마가 뒤따라 탔는데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짜증 섞인 말투로 계속 잔소리를 했다. 속으로 난 저러지 말아야지, 아이한테 항상 친절하게 말해야지 했는데...!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엄마가 되어 있었다. 바짝 신경을 써서 아이를 향한 짜증을 억누르면 다른 쪽으로 짜증이 났다.


거품기를 꺼내려고 하는데 튀김용 젓가락과 집게가 거품기에 엉켜 빠지지 않을 때, 설거지통으로 조리도구들이 전부 쏟아질 때 짜증이 났다. 스팸이 통에서 나오지 않을 때, 뜨거운 기름이 팔목에 튀었을 때 짜증이 났다. 양치질을 하다가 칫솔이 엇나가 잇몸을 찔렀을 때, 머리를 감다가 수전에 머리를 부딪쳤을 때 짜증이 났다. 발을 빼는 속도보다 문이 닫히는 속도가 빨랐을 때,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이제 막 달리려는데 뒤꿈치에 벌써 물집이 잡혔을 때 짜증이 났다. 위에서 우다다다 뛰는 소리가, 자꾸만 똑같은 부분에서만 틀리는 옆집 아이의 피아노 소리가 짜증 났다. 두 번째 시도에 충전 단자가 반대일 때도.




별 것도 아닌 데 짜증이 나고, 그때마다 나를 다스려야 하는 내가 너무 싫다. 열에 한 번은 타오르고 마는 이 감정을 아이가, 남편이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사랑해 죽을 것처럼 꽉 껴안다가 (아이의 어느 행동에) 갑자기 엄마가 짜증을 내면, 그러다 또 금방 괜찮아져서 돌아오면 아이는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될까, 그게 가장 두렵다.


짜증이란 게 불이 아니라 눈으로 이뤄진 감정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누군가 건드렸을 때 활활 타오르지 않고 스르르 녹을 텐데... 혹시 불과 불의 만남이었나? 아니어떤 공격에도 평정심이 유지되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그도 아니면 안전하게 이별하고 싶다. 짜증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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