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한 May 21. 2022

내게는 우울이 어떻게 찾아오는가

토요 글쓰기 모임 [끄적이는 소모임] #1


22.05.21


우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고등학교 다니던 시기였다. 나를 이해하는 건 오직 나뿐이라고 여겼던 날들이 내게는 우울이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십여 년째 되지 않던 아이에게는 문득 세상이 너무 컸고, 문득 사람의 존재는 너무 작았으며, 문득 그 사실이 무참히 외로워졌다. 나는 그럴 때면 시를 썼다. 선생님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내 생각은 글로 적으면 그럴싸해졌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후 ‘우울’은 나에게 잘 찾아오지 않았다. ‘우울’한 나 자신을 못 견뎠기 때문일 수도 있고, 홀로 타지에서 살아가는 내게 ‘우울’이라는 감정은 사치라고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해를 영영 붙잡을 수 없는 우주 한 공간에 놓아버린 것이다.


지금도 가끔은 아무도 나를 보는 이가 없다고, 지금 이 순간 나라는 사람이 사라진다 해도 전혀 바뀔 게 없어 보이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게 처절하게 우울하다.


그 우울이란 것은 또 금세 신기루처럼 사라지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상을 남긴다. 그 자상을 훑어보며 타인에 대한 불신은 좀 더 선명해진다.


어느 날은 문득 우울의 정의를 알고 싶어졌다.  ‘우울’은 근심스럽거나 답답하여 활기가 없다는 점에서 기분이 언짢은 느낌 또는 반성과 공상이 따르는 가벼운 슬픈 감정. 언짢은 느낌까지는 알겠는데 ‘반성과 공상이 따르는’에서 갸우뚱해진다. 잘못된 행동에서 반성을 하고,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는 공상이라면 어쩌면 우울의 또 다른 정의는 후회가 아닐까. 미련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날 정도로 뼈저리게 후회한 적이 있다. 매일 밤 내가 한 선택을 잘못이라고 여기며 내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했었다. 아마 그때 지나왔던 모든 밤들이 나에게는 우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왜 살아가는 걸까. 왜 나는 잘못된 순간만 지나오는 걸까. 왜 내가 한 선택들은 잘못된 것이었을까. 답이 없는 질문을 매일 반복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그 굴레를 벗어나 내가 한 다짐은 다시는 내 스스로에게 이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만들기.  내가 한 선택이 가장 나은 선택으로 만든다면, 잘못되었음에도 최선을 다한다면 좀 더 나를 미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수많은 후회와 미련을 안고 살아간다. 완벽한 답안만을 고르는 인생은 없으므로.  아쉬울 때도 있고, 못 견딜 때도 있고, 내려놓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에 살아가는 게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거니까 조금은 묻어둬도 되지 않을까. 점점 묻어두면 그게 또 나의 양분이 되지 않을까.


나는 요즘에도 잘한 선택을 하고 잘못된 선택도 한다. 기분이 좋기도 하고 가끔은 우울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다시 미워하지 않는다. 나를 탓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나는 이 아픔과 슬픔은 모두 나의 인생의 한 부분이라 여기며, 또 가끔은 지나간 과거의 상처를 흉터로서 바라보며 앞으로만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그게 내가 가장 원했고 원하는 삶의 모습이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