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한 Nov 10. 2022

억누르는 감정,

토요 글쓰기 모임 [끄적이는 소모임] #10

22.10.24




이번 주제는 사실 내가 골랐다. 그런데 분명히 주제를 골랐을 당시엔 그렇게 할 말이 많더니, 막상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려니 그때의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나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주제를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자.


억누른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억누른다.


아아, 아마 나는 내 눈물에 대해 글을 쓰려고 했었을 것이다. 나는 내 인생 전반을 울지 않기 위해 애쓰며 보냈으니까. 나는 사실 너무 자주 울컥하는 사람이니까. 좋은 걸 보아도, 감동적인 걸 보아도, 속상한걸 보아도, 웃겨도, 슬퍼도, 멋져도 그냥 코가 매워져 버리는 게 디폴트인 사람이 바로 나다.  그렇지만 그런 기색하나 보이기 싫어 몰래 닦아버리고 멋쩍게 웃고야 마는 사람이다.



울고 싶으면 그냥 울면 되는데, 왜 그 모든 감정을 이렇게 억누르려고 했을까, 나는 왜 그렇게 애썼을까 생각을 해보면 아마 수많은 요인이 있겠지만은 아무래도 가장 먼저 나의 신체적인 키를 앞세워본다. 사실 나는 키가 작다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세상엔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을 것이고, 키 큰 멋진 동생들이 든든하게 있으니 그건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체구가 작다 보니 ‘나’라는 사람 자체를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연약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마 소위 말하는 ‘센 척’을 하였나 보다. 나는 내가 작고 어린 사람일지라도 절대 울지 않고, 절대 지지 않으며, 절대 쉽지 않은 사람이길 원했다. 나에겐 눈물은 여린 나를 보여주는 창이었으니까. 눈물을 흘리는 상황 자체를 아주 민망하고 부끄럽게 바라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뭐 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어쩌면 이 모든 게 하나의 자기 방어였던 것임을 어떻게 스스로 모르겠는가.



그다음 요인은 나의 눈물점이다. 난 특히 다른 이들보다 눈물점이 아주, 아주 낮나 보다. 언제였던가, 그 당시 감동적이기로 유명한 영화가 있었는데 영화관에서 우는걸 특히 싫어했던 나는 관객수가 천만을 돌파했다는 소식에도 절대 찾아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 티비프로그램에서 그 영화를 간단히 소개하는 부분이 나왔는데 그 장면만을 보고도 눈물콧물 다 흘리며 엉엉 울었다. 누가? 바로 내가. 제대로 된 줄거리도 모르면서 젖은 휴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찔해졌다. 나 왜 이렇게 눈물이 많을까.

또 하나, 이것도 영화랑 관련되어있는데, 한 천재 수학자의 실화를 다룬 영화를 다 보고는 영화관을 나와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을 먹는 그 순간까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동생들은 이미 맛있게 국물을 들이켜고 있는데 옆에서 계속 훌쩍이는 나에게 부모님은 그랬다. 저건 울만한 내용이 아니라고. 저 영화를 보고 지금까지 울고 있는 건, 그건 좀 이상한 거라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현재의 나는 ‘네가 운걸 거의 본 적이 없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살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게, 매 순간 이건 눈물 흘릴만한 일이 아니라고 자기암시를 해와서 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내 안의 그 섬세한 감정 또한 녹슬어서 인지 잘 모르겠다. 눈물이 나오는 게 좋은 것인지, 안 나오는 게 좋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난 눈물을 참으며 살아왔다. 울 것 같을 때는 그 감정을 무시하고 피하면서 애써 억눌렀다. 근데 가끔은 울음을 참았던 그 모든 순간들이 아직도 마음속에서는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면 그날들의 내가 안타깝다. 울어도 돼- 지금이라도 말해주고 싶지만, 이미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 모든 감정을 표출해낼 수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울고 싶어질 때면 글을 썼다. 나의 어떤 내밀한 부분을 건드렸기에 울고 싶었는지 적어 내려갔다. 처음에는 기록하지 않으면 이때의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으로 시작했고, 그 후에는 철자로 다시 읽었을 때 스스로의 감정을 더 이해할 수 있기에 계속했다. 내가 슬펐던 이유, 기뻤던 사건, 감동받은 날, 억울했던 순간들을 적으면 적을수록 그 글 안에 감정을 가둘 수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의 형태로 남겨졌기에 현재의 나,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를 다시금 들여다보고 대견해한다. 위로를 한다. 나를 한번 더 이해한다.


아직도 수많은 글이 나를 기다린다. 나는 이제 울지 않지만, 울고 싶어질 때면 다시 무언가를 또 적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날 나와 마주한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