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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빈 Jan 17. 2022

연극 <마우스피스> 리뷰

*  내용을 전반적으로 담고 있는 글입니다. 참고하고 읽어주세요.*



이것은 데클란의 이야기다.

동시에 리비가 쓴 데클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리비는 극 작가이자 이야기의 화자이다.

리비는 데클란을 대변해 그의 이야기를 무대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


40대의 극작가인 여자와 홀로 그림을 그리는 10대 소년. 전혀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은 밝게 빛이 나는 도시의 풍경을 발아래에 둔 언덕에서 만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처음부터 굉장히 ‘불안정’ 한 상태로 시작한다. 언덕에서 곧 죽을 것처럼 위태롭게 생을 지탱하고 있는 여자와 불안함을 종이 위에 그려내는, 각자의 방식으로.


두 사람은 데클란의 그림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된다. 리비는 진심으로 데클란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고 데클란 앞에서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화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들려줄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 또한 하나의 이야기이며 그것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체감하게 된다. 어쩌면 리비는 자신의 입을 통해 객관화된 인생을 발화 한 그때, 이야기를 다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리비의 이야기를 듣던 데클란 또한 자신의 인생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한다. 단 한 번도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 대해 관심 가져 준 사람이 없었던 데클란은 때로는 무심하게 툭툭, 때로는 불안정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리비 또한 그런 데클란의 이야기와 그의 그림에 깊이 빠지게 되고, 데클란은 리비 앞에서 더욱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리비는 극작가로 살아온 세월 동안 예술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사람이다. 그녀는 이야기에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으며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고,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비평가와 극장주는 ‘극적인 무언가’를 늘 원했으며 적당히 솔직하고 적당히 자극적인 이야기를 원했다. 그녀는 그런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으며 진실되지 못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는 허망함은 그녀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러던 와중에 만난 데클란의 ‘진짜’ 이야기는 리비의 마음을 움직였고, 자신이 화자가 되어 이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는 마음으로 두 사람은 극을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첫 문장, 도입부를 지나 중간 지점에 선 리비는 이렇게 말한다. 중간 지점에는 늘 반전이 존재한다고, 아주 나쁜 방향으로 흐를 때는 반등할 기회가, 혹은 아주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아주 빠른 속도로 추락할만한 그 어떤 무언가가.


대화를 통해 깊은 교감을 나누던 두 사람 사이에 반전이 일어난다. 자꾸만 불행하고 버림받아 불안해지는 데클란은 버림받은 그 순간에 리비를 찾는다. 불안에 떨고 있는 데클란을 보며 리비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를 안아주고,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반전을 맞이한다.


그날 이후 유대감으로 단단해졌던 두 사람의 사이는 다시 위태롭게 흔들린다. 데클란의 감정은 삐뚤어진 집착과 애정으로 변해버렸고 리비는 그런 데클란의 행동에 결국 그를 끊어내 버린다.


하루하루 절망 속에 살아가던 데클란이 리비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건 신문 속 그녀의 기사였다. 그녀가 쓴 그의 이야기, 아니, 한때는 함께 만들었던 작품 마우스피스가 극장에 올라온다는 소식. 극이 끝난 후에 관객과의 대화가 있다는 그 말 한마디에 데클란은 극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데클란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밝히자 사람들은 ‘진짜’가 나타났다며 환호하기 시작한다. 데클란은 이 이야기의 결말은 진짜가 아니라며 리비와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지점부터 리비와 데클란은 다른 결말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리비의 결말은 어디에선가 본 듯한 적당히 자극적이고 극적인 단어들로 가득하다. 그에 비해 데클란의 결말은 지극히 평범한 그의 일상의 일부로 돌아간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같은 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찢고, 그것을 바라본다.

어느 것이 진짜 결말인지, 가짜 결말인지   없다. 그저 그곳에는 암전만이 존재할뿐.



연극 <마우스피스>는 전통적인 이분법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인생 또한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이 명제 앞에서 과연 진짜와 가짜, 진실과 거짓, 이러한 이분법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인간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타인’의 비극을 보면서 카타르시스, 즉, 감정의 정화를 경험한다. 이것은 그 비극이 나의 이야기가 아니며 철저하게 무대와 객석을 사이에 둔 타인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작용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은 그 보다 더 비극적일 때가 많다.

우리는 종종 역사적 기록 앞에서, 직접 마주하는 사회의 단면들 사이에서, 인간이 만든 가상의 무대보다 운명이 만들어 놓은 현실이 더욱 각박하고 혹독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제 아무리 극적이고 잘 짜인 이야기일지라도 그것이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런 세계에서 진짜와 가짜의 이야기를 구분 짓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마지막에 데클란의 비극을 이야기하다 가짜와 진짜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리비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장르를 불문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완벽하고 진실한 이야기를 쓴다 할지라도 인간은 신이 만들어 놓은 운명 앞에서는 그것을 피할 재간이 없듯이, 절대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사실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화자가 된다는 일은 생각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펜을 드는 일임을 늘 염두해야 한다. 자신의 입을 열어서 타인의 이야기를 말하는 일에는 보다 더 섬세하고 사려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 그것은 나의 인생을 객관화하는 것 보다도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로소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될 때 우리는 타인을 모두 알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세심한 배려와 사려 깊은 사유가 이야기를 다루는 모든 예술가들이 지녀야 할 마음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 이 극은 불안정성에 대해 말하는 극이기도 하다.

리비와 데클란은 각자를 둘러싼 인생의 여러 정황들과 인물들 때문에 불안한 상태에서 서로를 만난다. 어디론가 당장 사라져 버려도 누구 하나 크게 슬퍼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인생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극작가의 극이 뭐냐고 묻는 데클란에게 리비는 불안정성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말미에 데클란은 사람들 앞에선 리비를 보고 당신 불안정해 보인다, 라는 말을 꺼낸다.

우리 모두는 안정적인 삶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불안정한 삶을 버텨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안정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이상적인 허구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내면에 어떤 두려움 혹은 불안함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내면의 불안함과 더불어 당장 1분 뒤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 매분 매초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외부적인 불안함과 내면의 불안함이 결합될 때 인간은 극도의 불안정함에 견딜 수 없게 되곤 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이 부정적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세상의 순리를 바꿀 수 있지 않는 한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안정한 세상 속에서 인간은 결국 그때그때의 불안감을 해소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안정감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이 끝나는 그 지점 까지, 완전한 결말은 없다. 내 이야기의 화자가 되고 싶다면 펜을 들어 치열하게 쓰고 기록해야 한다. 입을 열어 크게 내 이야기를 말해야만 한다. 비록 오늘의 하루가 위태롭고 불안정할지라도, 언젠가는 돌아보았을 때 이러한 삶을 살아왔노라고 한 줄로 회상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 때문이다.

입(mouth)을 열어 나의 일부분(piece)을 말할 때, 나의 인생은 무대 위의 걸작(masterpiece)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아마 마우스피스가 가지는 복합적인 의미 중 하나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텅 빈 무대 위 눅눅하고 꿉꿉한, 슬픔인지 괴로움인지 알 수 없던 그 감정들이 흘러내리던 이 극을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날카롭게 감정을 파고드는 이러한 경각심이야 말로 좋은 극이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에너지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 더 나아가 예술가, 화자에게 필요한 섬세한 감성, 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주체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에 정해진 답은 없다. 끊임없이 묻고, 부딪히며,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는 오늘도 알 수 없다 할지라도.



CAST : 김신록 / 장률

장소 :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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