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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빈 Apr 05. 2021

영화 <메기> 리뷰 (3) : 매듭짓는 말

불신의 몫은 누구의 것인가





<메기>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여성의 입장에서 그 문제를 들여다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성의 이야기가 작품으로서 별다른 가치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깨고 최근 흥행을 일으킨 작품들에서 눈에 띄는 점은 여성 창작자가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향이다. 중학생 소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벌새>가 그러했고, 한국 사회 구조 안에서 여성들이 겪는 보편적인 갈등과 문제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 <82년생 김지영> 또한 마찬가지다. <메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여성 서사는 여성의 훌륭한 그 무엇인가 만에 얽매이지 않는다. 여성은 연대하며 그 문제를 스스로 박차고 나아가며 해결해가는 주체로서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는 분명 ‘여성이기 때문에’ 혹은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시그널이기도 하다. 특히 성범죄 혹은 폭력 사건 가운데서 약자의 입장에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여성은 어쩌면 피해자로서 그에 대한 것을 밝히고 싶지 않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 창작자들이 스스로 이 문제를 폭로함으로서 문제의 근본과 부조리를 알아가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본 뒤 현실의 고민은 어느 쪽을 향하는가 생각해 보면 한쪽 그룹은 인물에 공감하거나 자신을 비추어 보는 개인화한 고민이 주를 이루는 경우가 있는 반면 다른 한쪽으로는 드러나는 사건들을 경유해 제도와 구조를 향해 고민을 던지는 그룹이 있다.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언제나 뒤섞여 있게 마련이지만, 어떤 이가 개인의 문제로 한정 짓는 사이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구조의 문제가 된다. 영화는 피해자의 입장에서서 그 심정을 씽크홀 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하며 여성 개인의 문제로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만든다. 오랜 시간 보이지 않는 균열과 누수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아슬아슬한 균열 위에 서있을 때가 많았다. 모르는 누군가에게 찍혔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내가 사랑하는 이 사람이 누군가를 때렸고, 나에게도 어쩌면 폭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동안 사회가 방치해온 부조리 가운데 온전히 여성의 몫이었다. 이전처럼 피해자들이 부조리에 대해 침묵한다면 사회는 균열로 인해 누수 될지언정 그 체제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가라앉아버리는 씽크홀처럼 우리가 방치하고 있던 부조리들이 더 큰 비극을 낳을 수 있다. 하나의 잘못은 해당 사회가 어떤 태도로 진단하느냐에 따라 처방도 달라지고 재발 가능성도 달라진다. 가해자의 입장을 우선시 해주는 사회에서 피해자와 잠재적 피해자들은 불신을 키워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형성된  불신사회를 과연 개인의 잘못된 의식이라고만 비판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윤영은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씽크홀을 주시한다. 윤영이 의심을 품지 않고 있을 때 만난 구덩이는 작은 구멍에 불과하지만, 성원에 대한 의심을 이미 품고 그를 만났을 때 그가 빠진 구덩이는 그 깊이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깊고 까마득하기만 하다. 비로소 의심을 걷어내고 진실을 마주했을 때,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위치는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것이다. 구덩이 밖에서 깊은 내면의 씽크홀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온전한 진실을 마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한 발짝 물러서 바깥에서 세계의 내면을 바라보는 전지적 시점의 관찰자 ‘메기’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이 세계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을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 진실을 찾아가며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통찰과 함께 강렬한 느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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