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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빈 Apr 07. 2021

영화 <나이브스 아웃> : 추리와 심리의 시각적 재현






* 본문에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리 서사는 문학, 영화 등을 넘나드는 많은 콘텐츠를 관통하는 고전적인 장르로서 오랜 세월 동안 고유의 스토리텔링 문법을 구축해 왔다. 미스터리 한 사건을 쫓아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장르의 특성과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특징인 시각적 묘사가 만났을 때 재미와 몰입감은 배가 된다. 특히, 범인 찾기라는 하나의 주제를 쫓는 일명 '후더닛' 구조의 영화는 그동안 많은 영화들을 통해 변주되어 익숙한 구조 함께 신선한 재미를 꾀했다.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의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과정을 그린 라이언 존슨 감독의 <나이브스 아웃>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과 같은 고전 추리소설과 함께 꾸준히 언급되며 퍼즐 미스터리 장르에 바치는 오마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라이언 존슨의 각본이 지닌 각별함은, 비교적 일찍 죽음에 관련된 정황을 관객에게 드러내고 나서도 긴장을 유지하며 나머지 러닝타임을 끌고 간다는 데 있다. 또한, 하나의 공통적인 목적 혹은 진실을 쫓는 단순한 구조를 가져가면서도 비밀의 절반을 초반에 밝히고 결론까지 이르는 경로를 작은 단위의 서스펜스로 채우는 전략을 택했다. 장르의 상투적 장치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지만 그것들은 모퉁이마다 예기치 못한 전개를 끌어내며 관객이 긴장감을 끝까지 놓지 못하게 만든다.  


복고적 엔터테인먼트로서의 특성을 잘 살리면서도 탄탄한 이야기 구조와 신선한 전개 방식으로 호평을 받은 <나이브스 아웃> 속에 나타난 많은 연출 기법과 미장센 중,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두고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시각적 스펙터클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영화 매체의 특성을 활용한 사례 중 하나로, 감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물들 간의 '심리적 변화'를 조명, 소품 등과 같은 장치나 프레임 속의 구성과 같은 시각적 단서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각 장치의 활용을 따라가 보며 인물들의 심리 변화와 사건의 양상을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 명(明)과 암(暗)을 이용한 심리묘사



선과 악의 구분과 대립은 매우 보편적이고 익숙한 방식의 구조로, 할리우드 영화 또한 큰 틀에서는 이러한 선과 악의 대립 구조가 분명한 영화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범죄를 다룬 영화의 경우 분명하게 악한 동기를 가지고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있기 때문에 선악의 대비는 보다 뚜렷하다. 선과 악, 거짓과 진실이라는 극명하게 다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빛’을 이용하는 방법은 효과적으로 관객의 이해를 높여 준다. 빛이 비치는 밝은 부분과 대조를 이루는 그림자를 활용해 진실과 거짓이라는, 영화 전반을 통틀어 탐정 블랑이 밝혀내고자 하는 가치를 두드러지게 나타낸다.




극 초반, 사건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탐정 블랑이 사건의 핵심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마르타에게 자신의 수사를 옆에서 도와줄 것을 요구하는 장면에서 그는 작은 담뱃불만 보인 채 어둠 속에서 숨어있다. 마르타와의 대화에서 시종일관 어둠 속에 앉아있거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블랑이 자신의 방법이 반드시 '진실'에 도달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의 곁에 환한 빛이 함께 한다. 이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단서라는 빛을 찾아 나서는 블랑의 캐릭터를 표현해 주는 장치이다. 또,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서 나타난 빛은, 거짓에 신체적 거부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진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는 마르타와 함께 블랑이 '빛'으로 대변되는 진실을 찾아낼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집안 전체가 앤티크 풍 소품으로 채워진 할런의 집에는 전체를 비추는 전등이 존재하지 않고 모닥불과 곳곳의 조명들이 군데군데 집안을 밝히고 있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실내는 이러한 조명의 특성 때문에 그림자의 명과 암이 정확히 드러난다. 이러한 저택 안에서도 블랑은 주로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과 한 발짝 떨어져 모닥불 앞에 앉아 있거나 조명을 등지고 앉아 그림자를 속에 자리한다. 또, 마르타가 진실을 밝히려 가족들 앞에 서 있을 때도, 진짜 '진실'을 가리키고 있는 증거를 가진 블랑은 이번에도 한 발짝 떨어져 벽등 조명 아래 서있다. 작은 불빛이 찰나에 번뜩이며 진실에 닿을 수 있을 거라던 블랑의 대사는, 결국 벽등 조명의 빛 아래에서 비로소 그 단서를 발견하며 실현된다.





마르타가 할런의 집을 나와 랜섬과 손을 잡고 할런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숨기기로 약속한 뒤 메그와 마르타의 통화 장면에서도 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마르타는 메그의 전화를 받을 때 몸을 돌려 빛을 등지고 돌아선다. 즉, 빛이라는 양심을 피해 죄책감이라는 어둠 속에 숨은 것이다. 메그 또한 빛을 등지고 서 있다가 마지막에는 양 눈만 남긴 채 완전히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가족들의 부추김에 못 이겨 거짓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용된 빛과 그림자의 활용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상황에서 양심과 죄책감이라는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묘사해주고 있다.






2. 소품을 이용한 심리 묘사



영화의 제목 <나이브스 아웃>은 말 그대로 '칼을 뽑아 든다'는 의미이다. 특히 영화의 초반과 끝에 경찰들과 블랑이 트롬비 가족을 심문하는 방에 있는 여러 개의 칼이 안쪽을 향하는 모양의 구조물은 제목과 더불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 의미로 작용한다. 수십 개의 칼날이 향하는 하나의 방향과 정 중앙의 작은 여백은 결말에 도착해서야 그 기능을 발휘한다.   





가운데 작은 원의 빈 공간을 둘러싼 날카로운 수십 개의 칼들은 블랑이 계속 언급하는 '도넛의 구멍'과도 같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조형물에 비스듬한 각도에 앉아 경찰의 조사에 임하지만 그들의 말에는 모두 거짓이 존재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유일하게 ‘진실’을 추구하는 블랑과 마르타가 마지막에 이르러 진실을 알게 되고 사건을 재조립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두 사람은 칼들이 가리키는 정 중앙에 앉게 된다. 이는 도넛의 구멍처럼 작지만 꼭 있어야 완성되는 작은 퍼즐 한 조각, 결정적 단서를 쥔 블랑을 가리키며 진실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할런의 유언장이 공개되기 전 트롬비 가족들은 각자 마르타에게 매우 호의적이고 친절한 인물로 그려졌다. 하지만 유산이 모두 마르타에게 상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난 후로부터 그들은 마치 한 방향을 향하는 수십 개의 칼처럼 마르타에게 폭언을 행사하며 그녀를 몰아붙인다. 또, 마르타와 블랑이 밝힌 진실 때문에 자신의 범행이 드러난 랜섬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르타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던 가면을 벗고 실제로 칼을 꺼내 들어 마르타를 찌르려 하는 직접적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이른다. 이러한 구도는 칼들이 향하는 방향과 일치하면서 악이 선을 해치려 하는 전형적인 대립 구조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는 영화의 제목과 일치하는 상징적인 조형물이 그 의미를 결정적인 순간에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되는 것이다. 진실의 한가운데 있는 결정적 퍼즐 한 조각인 마르타를 향한 위선으로 가득했던 트롬 비 가족의 본심은 비로소 '칼을 꺼내 들었을 때' 드러나게 된다. 한 방향을 향하는 칼들은 진실을 향하고 있지만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 내용은 이기적인 폭력에 가깝다.

 




3. 인물의 배치를 이용한 심리묘사




처음 심문을 시작할 때는 경찰과 조사관이 전경과 중경 그리고 블랑은 후경에 희미하게 자리하고 있다. 사건의 진위와 경과를 밝히려 하는 경찰과 조사관은 가족들에게 형식적인 질문을 묻는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는 모두 거짓이 존재한다고 믿는 블랑은 가족들의 심문에는 후경에 자리하며 크게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실만을 말할 수밖에 없는 마르타를 개인적으로 심문할 때는 오히려 전경에 자리하며 그가 진실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 준다. 이는 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강조하는 고전적인 방법의 배치로, 여기서는 블랑과 경찰이 추구하는 결말과 가치에 대한 태도 차이를 효과적으로 보여 준다.




영화의 결말에서 진실을 밝히고 할런의 유산을 받게 된 마르타는 이제 저택의 주인이 된다. 영화는 이러한 사실을 대사가 아닌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로 짧지만 분명하게 표현한다. 할런이 생전에 쓰던 머그컵을 들고 2층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마르타의 시선과 집 밖에서 그런 마르타를 올려다보는 트롬비 가족의 시선을 일치시킴으로써 이들 사이의 상황의 역전을 표현했다.

 


이 외에도 영화에서 나타나는 편집의 백미는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진술로 구성된 교차편집이다. 마치 각기 다른 사람들의 기억으로 구성된 것 같은 편집은 관객으로 하여금 관찰자의 입장에서 나름대로의 추리를 시도하게끔 가능성을 열어준다. 전체적으로 퍼즐 맞추기의 형식으로 진행되며 전반부에 점진적으로 제공했던 정보의 단편들을 후반부에서 범인을 밝혀냄과 동시에 의문점을 해소시켜주는 구조는 영화 전반에 깔려있던 숨어있던 단서와 설정들을 성실하게 증명해 낸다. 또한 결말에 이르러서야 행동의 동기가 분명히 선과 악으로 나뉘는 구도가 형성되지만 그전까지는 누가 선과 악을 표방하는지 알 수 없는 구도로 극을 진행해 나간다. 하지만 결국 선한 동기를 가진 마르타가 랜섬이 설치 해 놓은 장애물을 자신만의 선한 방식으로 이겨냄으로써 이야기의 결말은 선과 악의 대립에 대한 선의 승리인 고전적 방법을 따른다.

 

이렇듯 <나이브스 아웃>은 세부적인 묘사와 이야기 전개 방식을 새로운 변주의 방법을 이용해 트위스트, 반전을 가져다주면서도 거시적으로는 익숙한 고전적 방법의 틀을 구성하면서 관객들에게 복고적 장르에 대한 익숙함과 함께 신선한 재미를 가져다주는 스토리텔링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추리의 과정과 그에 따른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저택의 꽉 찬 미장센, 인물들의 배치와 시선 등을 통해 효과적으로 발현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적인 요소 이외에도 미국 내의 이민자 문제에 대한 인식과 백인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정치적 메시지를 위트 있게 풀어낸 점 또한 이 영화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 이기도 하다. 감각적인 영상미와 추리 서사의 짜릿함을 맛보고 싶다면 최근 넷플릭스 신작으로도 공개된 <나이브스 아웃>을 꼭 만나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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