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루쓰, 살아있냐? 살아있냐고!

2025년을 떠나보내며

by 끄루쓰


25년도 이제 다 끝나간다. 그래서 쓴다, 연말결산용 반성문.


나에 대한 과신인지 뭔지, 난 내게 주어진 역할 그 이상을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저 제한된 시간 안에 가장 많은 일을 해내는 사람이 가장 멋지고 바람직해 보였다. 그래서 9 to 6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서도 글을 쓰며 대학원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운동도 하고 자기계발용 취미 하나 쯤은 즐길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참 순진했군 나 자신. 하루는 48시간이 아니잖아. 꾸역꾸역 시간을 구겨넣은 하루 하루를 정신없이 살아오다 서른 하나가 되어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니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래, 그래서 지금까지 넌 어떤 삶을 살아왔니?


그걸 파악하는데 가장 쉽고 간편한 방법은 이력서를 들춰보는 것이다. 올해 여름에 두 번째 이직을 했는데, 그때 썼던 이력서에 내 욕심이 다 드러났던 것 같다. 여기 저기 손댄게 많아 경력사항, 학점, 자격증, 학위 등등 쓸 재료는 꽤 있었다. 하지만 경력기술서는 어느 한 곳에 진득하게 오래 있지 못해 정신이 없었고 자격증 끼리도 서로 연관이 없어서 그렇게 자격사항이 중구난방이 되어버린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해내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 이력서엔 가장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내 삶의 이정표가 되길 바랐던 것. 그건 바로 '진심'이다.




오래 숨겨 놓은 꿈이 있다. 괜히 현실감각 없는 몽상가처럼 보일까 입밖으로 잘 꺼내놓지는 않는다. 내 꿈은 글쓰기로 세상이 손톱만큼이라도 더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 꿈이 내 진심의 정수이다.


끄루쓰라는 필명은 어찌보면 내 꿈과도 맞닿아있다. 끄루쓰는 스페인어 Cruz를 음차해서 지은 것이다. Cruz는 '십자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때론 '건널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글쓰기가 나의 십자가가 될 때까지, 항상 진심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건널목이라는 의미도 맘에 들었다. 건널목을 건너면 새로운 길이 나오니까. 그런 처음 보는 길과 조우하는, 기쁘지만 험준한 과업이 글쓰기라 믿는다.


이런 이상적인 말을 적는 이 와중에도 현실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오늘은 분명 크리스마스고,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내일 당장 출근해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이 멀티테스킹 모드에는 스위치도 없다. 제발, 진짜 제에에에발 회사일에는 신경을 끄고 싶은데 월급 받는 임금 노동자에게 그게 어디 쉬운 소립니까? 아니, 다들 어떻게 그렇게 회사 다니면서도 부업을 잘 해요?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


일을 하며 진심을 쫓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매일 실감한다. 하루 9시간을 일터에서 정신없이, 하루 2시간을 출퇴근 지하철에서 보내다보니 집으로 돌아오면 이미 소진되어있다. 정작 나의 진심이 작동할 새가 없고 글쓰기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집에선 꼭 끄루쓰가 되어야지 다짐하지만, 그 친구가 쉽게 튀어나오지 않는다. 끄루쓰는 부끄럼이 참 많아. 제발 좀 나와라, 끄루쓰! 얼굴 좀 자주 보여줘!


주객전도가 일상이 되어버린, 이 건조하고 메마른 삶에서 난 어떻게 하면 내 진심을 지킬 수 있을까.


나 끄루쓰는 점차 떨어지는 체력과, 노동 해방은 평생 불가능하단 숙명과, 이젠 빼박 삼십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서른 언저리의 내가 떠올린 건 결국 선택과 집중이다. 이젠 예전처럼 이것 저것을 모두 이뤄보겠다는 생각은 버리자. 수많은 목표 중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 하나를 정하고, 그것에 몰입하자. 그래서 정해본 나의 목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쓰기 역량 기르기


다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고들 한다. AI다 뭐다 하는 최첨단 기술은 우리 사회의 표면을 빨리, 그리고 많이 변화시켰다. 하지만, 유구한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듯 인간성 자체는 불변한다. 기술은 인간의 표면적 행동 양식을 바꿀테지만, 그 내부의 감정 체계를 바꿀 순 없다. 글쓰기는 그 불변의 감정 체계가 언어를 매개로 표출된 것. 그래서 글쓰기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다만, 얼마나 많은 이들의 마음을 얼마나 깊게 울릴 수 있느냐는 오로지 작가의 역량에 달려있다.

난 그 역량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목표 달성을 위한 몇 가지 행동다짐을 생각해본다.


- 진심에 온전히 몰입할 것

- 가장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볼 것

- 낭만에 기꺼이 마음 여는 사람이 될 것




끄루쓰가 진심으로 살아있길 바라는 26년.

내년엔 내가 좀 더 신경쓸게. 그동안 미안했어. 먹고 사는 문제에만 골몰해서 소중한 너와 멀어졌다니.

알지? 난 너 없음 못 사는거.


26년의 끝에서 한 해를 돌아봤을 땐, 꼭 끄루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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