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내가 그렇게 자랑스럽지는 않다. 내 자아의 중심과 내가 맡은 업무는 언제나 듣기 싫은 불협화음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보고서 쓰려고 구글링하는 이 순간에도 불현듯 내 머릿속에서는 '너 솔직히 이거 재미없지', '진짜 하기 싫지'하는 소리가 자꾸만 들려온다. 머릿속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스스로에게 죄책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더 많이 들을게. 그런데 정말 미안해. 네 목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별다른 소용이 없어.
난 한 우물만 파는 스타일이었고 그래서 대학 때도 내가 진심으로 원하고 좋아하는 수업들, 그중에서도 문학 수업들만 골라 듣곤 했다. 그 수업이 인기가 있든 없든, 내가 듣고 싶으면 장땡인 것이었다. (사실 내가 듣고 싶어 했던 수업이 대부분 인기가 없는 강좌이긴 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플랜B,C,D의 시간표까지 계획할 필요가 없었고, 중간에 수강취소를 해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때는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고, 내가 원하는 활동을 해도 딱히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나랑 비슷한 친구들과 같이 지내다 보니 내가 전념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토를 다는 친구들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대학 생활 내내 인문학에 빠져 살았다. 역사 전공으로 입학했지만 문학도 좋아져서 두 영역에 번갈아 몸을 담가가며 내 지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혼자 불 꺼놓고 방에 틀어박혀 고민하는 게 좋았다. 그때의 나는 아주 단순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나는 평생 그렇게 살고 싶었고, 내가 지닌 모든 능력은 인문학적 사고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데미안, 하면 많은 사람들이 압락시스, 압락시스거리면서 새가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장면을 자주 얘기하더라. 아기새를 보호해주던 알껍질이 깨지는 그 순간. 그런데 나는 그 순간을 졸업을 준비하며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 전에는 '대학' 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이 비호하는 인문학이 지닌 권위로부터 무언의 보호를 받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 학문을 향유하면서도 알 수 없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근데 그 껍질이 깨지고 보니 내 능력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단순히 쓸모없는 '교양용 지식'이 되어버리더라. 그냥 잘난 척, 아는 척을 위한 죽어있는 지식. 그 대학이라는 기관에서 한 발자국 벗어났을 뿐인데. 분명히 그곳에서는 내가 배우는 학문이 아주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인류의 뿌리라고 가르쳐 줬는데. 왜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이 학문을 쓸모없는 것으로 보는 거지. 나는 왜 그렇게 무쓸모 한 것에 내 시간을 쏟아낸 거고.
그래서 나는 내가 순식간에 무능한 사람으로 전락해버린 것에 막연한 분노를 느끼곤 했는데, 그 분노의 대상은 불특정 한,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해 있곤 했다. 누구를, 무엇을, 어디서부터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대체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