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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라멜 Jan 07. 2025

중요한 날이면 빨간색부터

미신이라고 그냥 무시하기엔 다들 이유가 있다

시험 날이면 난 빨간색 속옷을 찾았다.

그렇게 된 건 우연히 결과가 좋았는데 빨간색 속옷을 입었다거나,

그동안 좋지 않았는데 빨간색 속옷을 입었더니 결과가 좋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난 시작은 그 둘에 해당되지 않았다. 철저히 사주명리학 때문이다. 

사주의 오행(목, 화, 토, 금, 수) 가운데 '불'을 뜻하는 '화(火)'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 만이 아니었다.

나를 뜻하는 '일간'마저 '토(土)'인 만큼 오히려 불이 더 필요했던 거다.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이제는 이해가 됐다. 

불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오행이며, 그게 날 도와준다는 건 어느새 믿음이 됐다.

사실 미신이 될 수 있고, 과학적 근거도 없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간 속옷을 고집한 것은 사실 '정신적 안정감' 때문이다.


나에게 없는 무언가가 나에게 도움이 되고, 나를 도와준다는 생각이 

시험 때마다 긴장하고 떨어서 자주 실수하고 망쳤던 나의 예민함을 치유해줬던 게다. 

그 이후로 더이상 우황청심원 따위는 먹지 않아도 됐다.

그 뒤로 빨간색은 내 주변에 하나둘씩 늘어갔다.


# 속옷

다른 브랜드지만 거의 비슷하다.

처음엔 하나였는데, 부족했다.

"어디 선물하실 건가봐요?"

"아니요. 제가 입을 건데요..."


가는 곳마다 빨간 속옷이 있으면 용기있게 직접 샀다.

속옷 가게에서 빨간 속옷들은 주로 어르신들을 위한 선물용이 많았다. 복을 기원하거나, 부자가 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의 무늬가 그려져 있기도 했다. 한자로 크게 뭔가가 씌어 있거나, 부적 같은게 은박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고, 호랑이 그림이 그려진 것들도 있었다.


빨간 속옷을 입을 일이 많았다는 건 그간 살아온 하루하루가 시험과도 같은 날의 연속이었기 때문일까?

그만큼 매사에 자신감이 없어지기 때문일까? 속으로나마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서일까?


# 필통

아내가 성수동에서 발견했다. 쓸수록 마음에 든다.

필통을 쓸 일이 있을까 했는데 의외로 많았다. 가방에서 굴러다니는 펜을 찾는 시간을 단축해주며, 만년필이나 볼펜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준다. 핸드폰과 노트북을 쓰면서 모든게 터치나 자판으로 끝나는 거 같지만 의외로 펜을 쓸 일은 여전히 많다. 특히 내가 필통이 필요한 이유는 아래에 있다.


# 만년필

검은색, 남색, 기타색의 가는촉, 중간촉이지만 모두 빨간펜이다.

다이어리에 뭔가를 써야할 때 모나미153 볼펜을 쓸 수도 있지만 만년필이 주는 '사각거림'과 비교할 수는 없다. 인터뷰를 하거나 나름 공적인 회의 석상에 갈 때도 만년필이 주는 느낌은 볼펜과 비교할 수 없다(내가 상대에게 받았던 느낌이 그랬다). 아직 만년필로 중후하게 서명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잉크 색상에 맞춰 펜을 구입할 수도 있었지만, 사다보니 모두 빨간색 계열이 됐다. 빨간색 펜을 쓰는 사람들이 적어서 그런지 잘 잃어버리지도 않고, 어디 놔두고 와도 금새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사람들에게 다 알려졌나보다. 


# 노트(A4 중간 크기)

노트 장인의 작품인데, 빨간색이 품절될까봐 '사재기'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거나 회의 중간에 메모할 일이 있으면 휴대폰에 써놓을 일이 많았다.

하지만, 전자기기에 씌어진 파편화된 메모는 다시 볼 일이 드물었고,

무엇보다도 생각을 정리하는 데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노트에 정리해 놓은 메모와 생각들은 최소 10여 번 이상은 들쳐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관련 기록을 찾아보는 데 도움이 된다. 


# 나이가 더 들면 '빨간 차'를 타게 될까?



누구나 슬럼프에 빠질 수 있고, 그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이 있다.

누구나 징크스가 있고, 그 징크스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는다.


슬럼프(slump)

1. 운동 경기 따위에서, 자기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저조한 상태가 길게 계속되는 일. 

2. 경기(景氣)가 향상되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현상.  


징크스(jinx)

1. 재수 없는 일. 또는 불길한 징조의 사람이나 물건.

2. 으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악운으로 여겨지는 것.  


징크스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직업은 운동선수들이다. 잘못된 결과가 나왔을 때 그 과정을 복기해보고 '우연'보다는 '필연'의 의미를 부여하는 거다.


그런 징크스를 극복하는 방법은 우연히 생기는 경우가 많다. 어떤 선수가 우연한 계기에 '어떤' 일을 겪거나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날  '홈런'이라도 치거나 평소와 달리 '공'이 잘 맞으면 그걸 믿게 된다. 그날 우연히 던지는 족족 '스트라이크'를 던져 삼진이 되면 그걸 믿게 된다. 축구 선수가 '헤트트릭'을 하거나 야구 선수가 '사이클링 히트' '노히트 노런'이라도 했다면 그 날 그 선수가 했던 모든 행동은 '징크스 극복'의 해법이 될 가능성이 높다. 특정 색깔의 속옷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라도 해서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다면 그걸 미신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운동은 심리 게임이다. 심리가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만큼이나 사소한 것에 집착하거나 뭔가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징크스는 없었지만 빨강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난해 말, 난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른바 흙수저 출신이다. 지금은 매출 수백억 원의 학원 그룹을 운영하는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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