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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die Apr 02. 2023

‘아싸’에게 친구란

직장에서 서류를 작성하는데 ‘친교인물’을 기재하라는 공간이 있었다. 친구도 아닌 친교인물이라니. 익숙하지 않은 단어에다가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난감했다. 사실 20대 중반부터 비교적 일찍 한 가정을 이루고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오다 보니 가족 외에는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대학시절부터 타고난 아웃사이더 기질도 한몫했지만.


물론 '아싸'인 나도 학창 시절부터 알고 지내 온 오랜 친구들이 있다. 정말 가끔씩이지만 연락도 주고받고 있고, 굳이 직접 만나지 않아도 서로의 사정을 알기에 멀리서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만나고, 연락하는 빈도가 그리 높지 않다 보니 왠지 서류에 명시된 친교인물이라고 지칭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었다. 20대 같았으면 망설임 없이 적었을 친구들이 있지만, 30대 후반의 지금 시점에서는 특정한 누구를 기재하기가 망설여진다.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을 못하고, 만나지 못한 미안함의 표시랄까.


직장동료들을 적자니 ‘친교’를 나눌 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직장에서는 그리 친하게 지내온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사내정치에 호되게 당한 이유로 직장동료들과는 항상 적정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 이유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당연히 직장동료들은 내게 그저 ‘적당한 관계’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이다. 따라서 친교인물로는 여전히 부적절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할까 싶다가도, 이런 고민을 이어나가다 보니 문득 내 인간관계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니 상대방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과연 나란 사람을 '친교인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에 대해 무심하게 살아왔고, 직접 들어본 적도 없어서 의문은 더 깊어졌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카톡창을 열어봐도 죄다 동문, 직장 단톡방 밖에 없다. 단톡방에 입장해 있는 수명의 사람들 속 'one of them'이었다. 슬프지만,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어쩌면 이 문제가 내가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의 어려움의 원인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내향형 인간으로 살면서 최대한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으려 인간관계를 최소화하며 살아왔다. 외골수에다,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한 성격을 갖고 있다 보니 '아싸'로 사는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일 뿐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해왔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원래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주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명제를 잊고 지냈던 것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스스로를 '아싸'라 낙인을 찍고, 스스로 옭아매어 삶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이미 좋은 '친교인물'들이 주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마흔의 문턱에서, 내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숙제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다. 이미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쓸데없는 고민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 독립적으로 살아왔기에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노력하고 있지만 이제는 조금 버겁다. 인생에 관해 조언해 주고 이끌어줄 '멘토'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며, 타인의 마음속에는 어떤 사람으로 남아있을까?

과연 나를 '친교인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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