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숙, 이별의 능력
버릇이 하나 생겼다.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오늘 내가 무엇을 배신했는지 헤아려보는 것이다. 예컨대 어제는 새벽이 오기 전에 자겠다고 의사 선생님과 맺은 약속을 어겼다. 그저께에는 친한 언니에게 안부 연락을 드리기로 다짐한 것을 잊었고, 지난주에는 낮에 비건 도서를 잔뜩 주문해놓곤 저녁에 불고기를 구워 먹었다. 모두 평범하고 소소한 배신이다. 눈 깜빡하면 잊어버릴, 그러나 내게 디테일을 부여하는 작은 배신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그들을 조립해나간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 퍼즐을 맞춰낸다. 모두 우연한 해프닝에 가깝기 때문에 각각의 경험에는 전혀 연관이 없는데도, ‘배신’이라는 감정의 연결고리만 맞추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어 있다. 얼기설기 대충 형태를 갖춘, 일종의 퍼즐 같은 그림이 말이다.
김행숙의 시집을 읽으며 이런 퍼즐을 떠올렸다. 연관이 없는 것 같은데, 공통점만 찾아서 이어 보면 틈이 맞춰져 있는 것들에 대하여. 예를 들어 「이별의 능력」(12쪽)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 화자는 이 짧은 문장 안에서 세 번이나 스스로의 정체를 뒤바꾼다. 바로 전의 진술을 바로 후의 내가 어기는 것이다. 물론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이라는 발언을 통해 담배연기와 수증기, 산소 사이에서 ‘기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그저 공통점일 뿐, 화자의 변화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렇기에 시는 그저 연상되는 감각, 연상되는 단어들을 가지고 말과 말을 우연히 맞물리며 상관관계를 만들어간다.
이어지는 행들 역시 마찬가지다. 첫 번째 행에서 언급된 기체는 두 번째 행에서 산소로 바뀌고, 바뀐 산소는 폐의 산화작용을 따라 에너지를 발산한다. 발산된 에너지는 곧 열에너지로 이어져 비계(몸의 지방)를 태우고, 내장은 태움을 전달하는 연통이 된다. 그래서 피는 끓고, 세상의 모든 새들(아마 연기의 이미지에서 이어졌을)은 모든 안개를 거느리고 이민을 떠난다. 각각의 이미지에서 연상되는 감각이 아니라면 따로따로 전혀 연관 없는 이미지들이다. 2연으로 넘어가면 이 연관 없음은 더욱 극대화된다. 화자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본다. 그리고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이쯤에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대체 화자는 뭘 하고 있는 걸까?
답은 이미 제목에 나와 있다. 바로 이별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이별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누군가를 떠나는 과정을 체험하며, 자꾸 모호해지고 이상해지는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그런 이별이 내가 기체가 되는 것, 내 외투가 기체가 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당연히 관련이 없다. 그래서 이 시는 ‘능력’을 요구한다. 모호하고 이상해지는 감각과 이미지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 기체의 형상을 하는 내가 왜 나중에는 이웃들에 대해 손을 흔드는지, 그 관계성에 다리를 놓아줄 능력 말이다. 능력을 요구함으로써 시는 마치 이 모든 행위에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독자의 감각과 상상력을 빌어,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시의 제목은 ‘이별’이 아니라 ‘이별의 능력’일 수밖에 없다. 이 시는 상징과 의미를 의도하지 않지만, 시에서 상징과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 능력이 얼마나 넓고 좁은가에 따라 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독자에게 이해된다.
이 능력은 「이별의 능력」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뒷장에 나오는 시 「해변의 얼굴」에서도 비슷한 유추가 필요하다. 이 시에서는 해변의 얼굴, 즉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해변의 감각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우선 첫 연을 보자. ‘얼굴로부터 넘친 얼굴, / 나는 당신이 모르는 표정을 짓지만’을 통해 독자는 해변이 얼굴로 치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화자는 이제 해변의 얼굴이라는 낯선 표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는 해변과 얼굴의 의미를 바꾸면서 시작되고, 두 대상은 기존의 의미, 해석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뻗어 나간다. 코로부터 코가 넘치고, 코에서 코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면 결국 코가 없다는 말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다 보니 시의 ‘당신’, 독자는 화자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다. 애초에 ‘나’의 표정은 당신이 모르는 것이기도 하고, 의미와 해석을 시도하는 순간 시가 도망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독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르는 표정에 남아도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이때 남아도는 것이란 해변과 얼굴의 이미지, 각 연에서 등장하는 사물들이 시로부터 취해진 감각을 의미한다. 특히 감각 같은 경우, 얼굴에는 눈, 코, 입, 귀, 피부라는 감각기관이 모두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왜 시의 제목이 해변의 손도 아니고, 발도 아니고, 얼굴이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이 시에서 독자가 맞닥뜨려야 할 것은 의미가 아닌 감각인 것이다.
『이별의 능력』에서 시인은 사물을 조작하여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상징을 넣어 독자가 그것을 파악하느라 진을 빼게 하지도 않고, 실존이나 무의식처럼 어려운 관념을 해석하길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시인은 느낌을 제시한다. 대상을 분해하고, 의미를 해체해서 마지막에 남는 느낌이 무엇인지 느껴보라 한다. 시집 전반에 얼굴, 목, 무릎, 표정, 옆모습, 시체처럼 유독 감각기관이나 신체에 관련된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김행숙의 시집이 다른 시집들보다 유독 난해하게 느껴졌던 것도 이 같은 까닭에서였다. 김행숙의 시를 읽을 때는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감각을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감각은 머리로 생각해서, 이성과 논리로 조합되는 것이 아니기에 연결의 비약이 심하고, 우연을 통해 익숙한 것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바꿔놓는다. 한마디로 낯선 것이다. 낯선 것은 자주 난해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난해하다고 느끼는 것이 그저 느낌이듯, 낯선 것 또한 느낌이기에 느낌을 통해 새롭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시체가 되다」라는 시는 그렇게 낯설고 새로운 방식으로 느껴졌던 시였다.
「시체가 되다」는 패어 있는 의자의 이미지로 시작된다. 제목에 이미 ‘시체’라는 단어가 나와 있어 의자는 어쩐지 음습하고, 위험한 것으로 느껴진다. 의자가 다문 입술 같다거나, 의자의 형상으로 ‘나’가 이상한 저녁을 통과한다거나 하는 문장을 지나고 나면 더욱 그렇다. 1연은 살인 현장을 얘기하고 있는 건가? 의자가 살해의 도구로 쓰였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시는 그 사건 현장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상한 저녁을 통과한 후, ‘나’가 고요하고 푸른 사람들(시체들)에 속하면서 벌어지는 모습들로 시선을 돌린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나’가 있는 곳이 살아 있는 사람들과 다른 세계라는 점이다. 화자가 살아 있을 때 ‘저승’이었던 공간은 이제 화자에게 ‘이승’의 공간이 된다. 그러므로 다음 연에서 화자의 진술과 김전일의 진술은 엇갈릴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은희는 정희의 언니가 아니라는 화자의 말은 3연에서 김전일의 은희는 정희의 언니다, 라는 문장으로 재구성된다. 재구성된 범죄는 김전일의 창작노트에서 다른 형태로, 다른 추리를 통해 미스터리화 되어간다. ‘나는 대낮에 살해되었다’라는 문장에서 출발한 시의 긴장감은 이 차이가 벌어짐에 따라 점점 증폭되고, 화자가 있는 곳, ‘너무 멀리 떨어져 앉은 듯’한 곳이 어떤 곳인지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가 해체된 곳, 너무 멀리 와버린 곳에서는 어떠한 느낌만이 남는다.
김행숙의 시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유사점이 뚜렷하지 않다. 사견으로는, 시인도 무엇인지 모를 것 같다. 왜냐하면 김행숙의 시는 사물과 사물, 대상과 대상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연히 발생한 느낌이 시의 전부가 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집은 시인이 오롯이 우연성에만 기대는 게 아니라서 흥미롭다. 시각과 후각이 연결되고 후각이 촉각으로 연결되는 과정은 무의식의 흐름처럼 느껴지지만, 전체를 다 훑고 나면 사실 그것이 정교하게 구성된 우연성이라는 걸 독자는 깨닫는다. 시에 정해진 목적지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시가 대상의 감각을 취해 다른 감각, 대상과의 인과를 맞춰가는 방식이 꼭 정교한 화학실험 같다는 것이다. 치밀하게 구성을 짜놓고, 가설에서 비껴가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화학실험. 시집의 후반에 와서야 「호르몬그래피」라는 시에 주목하게 된 건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호르몬그래피」에서 화자는 호르몬에 따라 쉴 새 없이 변화한다. 자신을 아침처럼 밝혀주는 호르몬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호르몬이 명명하는 바에 따라 자신의 성별을 전환하기도 한다. 화자는 호르몬그래피라는 제목처럼 호르몬에 휘둘리며 맹목적으로 그를 따른다. 이 시가 재밌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는 호르몬을 가지고 있는 존재지만, 정작 나를 지배하는 것은 호르몬이라는 것. 그리고 그 지배권은 화자가 기꺼이 내준 것이라는 것. 그렇기에 시에서 화자는 수동적이지만 능동적이다. 당신의 영화관이 되겠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 문장은 화자가 호르몬그래피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호르몬그래피가 화자 덕분에 쓰일 수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화자의 몸이 호르몬에 의해 작동하듯, 호르몬 역시 몸이 없으면 작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호르몬-인간이라는 기존의 지배 관계를 한 번 뒤집어 보인 발상은 결론적으로 호르몬과 화자에게 능동적인 태도를 부여한다. 그렇게 화자와 호르몬은 이후 영화관 → 표정과 풍경의 섞임(영화관의 관객들과 스크린 색의 혼합) → 검은 스크린을 거치게 되고, 마침내 무의미에 다다른다. 「호르몬그래피」라는 화학실험의 결론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다. 『이별의 능력』은 무의미에서 다시 시작하는 시집이다. 의미가 없고, 상징이 뒤섞인 시의 세계에서 감각은 새롭게 감각된다. 「호르몬그래피」의 마지막 문장처럼 말이다. ‘신성한 호르몬의 샘에서 영원히 반짝이는 신호들.’ 꼼꼼한 실험 과정을 거쳐 다다른 무의미, 그곳에서 발견한 감각은 이토록 반짝거린다. 「시체가 되다」의 이승과 저승처럼 경계가 모호하고, 「해변의 얼굴」처럼 표면적이다. 「이별의 능력」과 같이 오감 이외의 새로운 능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감각들로부터 나는 텍스트를 읽는 또 다른 촉수의 필요성을 느꼈다. 공상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 그러니까 사물에서 취해지는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연결 짓는 감각의 세계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촉수가 필요하다. 그 세계에 입장하기 위한 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침대에 누워 그날 있었던 일의 연관성을 아무 의미 없이 찾아보는 것처럼. 그러므로 앞으로의 읽기 역시 이 능력을 찾고, 느끼는 방향으로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김행숙의 『이별의 능력』으로부터 내가 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