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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 Apr 23. 2023

수프 한 그릇, 뿌리의 조각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본문은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재일조선인 강정희 씨는 닭백숙을 삶을 때 닭의 배에 대추와 마늘, 인삼과 약재, 찰밥을 넣는다. 한국에서처럼 파나 양파, 다른 감미료를 넣어 간을 하지 않고, 오로지 닭의 배에 채운 재료와 닭 자체만으로 국의 맛을 낸다. 그렇게 닭의 고소함이 한껏 우러나온 수프는 무척이나 풍미 있고 감칠맛이 넘친다. 닭살을 매우 부드럽고 닭의 뱃속에 들어갔던 재료들은 말랑말랑하게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강정희 씨의 사위, 아라이 카오루 씨가 연거푸 맛있네요, 정말 맛있어요, 라고 말하며 닭다리를 씹을 때 나도 꼭 그 자리에 앉아 수프를 맛보는 것 같았다. 강정희 씨와 그의 딸 양영희 씨, 그리고 아라이 카오루 씨가 처음 마주보고 앉아 닭백숙을 먹는 그 장면을 보면서 음식을 먹는 행위에 대해 계속해 생각했다. 일본인 사위는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던 어머니가 기꺼이 일본인 사위를 위해 닭백숙을 삶고 함께 음식을 먹는 그 장면과 행위, 그들이 사상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정말 다른 생을 살아왔지만 결국 한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하는 무엇에 대해서.



나는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다른 인물과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볼 때면 늘 신비롭다, 라는 감상이 먼저 든다. 음식을 먹는다는 건 가장 근본적인 행위, 그래서 우리 삶에서 가장 필수적이고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삶의 일부를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음식을 나누고 자기 앞의 몫을 먹는 장면을 볼 때마다 인물들 사이에 ‘인간’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교류와 공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러한 취약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보면서 그 무엇보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뿌리‘를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한 그릇 치킨 수프를 끓이듯이 느리고 은근하게, 그러나 매우 확실히 ’뿌리‘를 파고든다. 뿌리의 한 축에는 우리가 ’인간‘으로 살면서 가족이라는 뿌리를 내리는 것(양영희 씨와 아라이 카오루 씨의 결혼)이 있다. 다른 한 축에는 그런 가족이 형성되기 이전 가족의 ’정체성‘을 되짚어 올라가는 경험(강정희 씨의 제주 4.3 사건 피해 경험 증언)이 자신의 쌍을 마주보고 있다. 이 두 개의 축은 서로 긴장하고 풀어졌다가 다시 맞물리면서 하나의 다큐멘터리를 충실하게 엮어나간다.



그렇기에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다큐멘터리로서의 르포르타주보다는 한 편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영화 전반에 걸쳐 딸 양영희 씨가 평생 이해하기 어려웠던 어머니 강정희 씨를 이해하고자 하는 과정을 한 편의 서사로 완성하기 때문이다. 이 서사는 작위적이지도, 대단히 서사적이지도 않지만 ‘이해’와 ‘뿌리’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깊은 울림을 남긴다. 마치 심심하지만 풍성한 재료들로 깊은 맛을 내는 한 그릇의 닭백숙처럼.


조그만 캠코더로 어머니의 얼굴을 가까이서, 빼곡히 찍는 이 영화의 촬영 방법도 기억에 남는다. 다큐멘터리는 무엇보다 ‘진실’과 ‘사실’을 촘촘하게 엮어내는 장르다. 그렇기에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 영화 전반의 분위기와 주제를 결정하게 되는데, 이 영화는 소재와 주제를 완벽히 결합하기로 한 것 같았다. ‘어머니’(곧 ‘뿌리’를 상징하기도 하는)라는 소재를 파고드는 것으로 ‘뿌리’라는 주제에 한 걸음 더 바싹 다가가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양영희 감독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가슴 안에 일었을 파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의 어머니의 삶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이해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가슴 안에 일어났을 어떤 일렁임에 대해서. 그것을 생각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나에게 하나의 커다란 성취로 느껴졌다. 어떤 끈기로 이 영화에 작용했을,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나에게 의미를 남겼다.


이번 여름에는 일본에 갈 예정이다. 운좋게 한일 교류단에 선정되어 국비 지원으로 일본에 갈 기회가 생겼다. 이번 여름에는 빼곡히 이 영화를 생각하며 일본을 여행하게 될 것 같다.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면서 어머니에 대한 영화를 찍어야 했던 양영희 감독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끝내는 인정하고 이해하게 되었던 ‘뿌리’에 대해 곱씹으면서. 그리고 그곳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이번 여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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