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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네 Apr 08. 2023

몸으로 써내려 가는 존재의 변론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내게는 뇌병변장애를 앓고 있는 사촌 동생이 하나 있다. 나이는 이제 15살인데, 의사소통과 거동이 어려워 평생을 누워 지내는 중이다. 짧게 깎은 머리와 쉼 없이 깜빡이는 검은 눈,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긴 속눈썹. 우리 가족은 예쁜 동생을 무척 귀여워하면서도 마지막에는 한숨을 내쉬는 걸 잊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누워 지내야 할 아이를 걱정하는 한편으로, 매년 바뀌는 보험 제도와 사회적 시선 때문이다.


동생은 바로 집 앞에 있는 미용실을 나가기도 어렵다. 겨우 나가서는 아이의 머리를 잘라줄 수 없다는 답변을 받기 일쑤고, 그나마 잘라준대도 미용은커녕 계속 누워 있어서 머리가 엉키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까까머리’를 만들어놓는 수준이다. 거기에 매년 복잡하게 바뀌며 매번 신청을 달리해야 하는 사회보장제도는 머리를 더 지끈지끈하게 만든다. 무엇이 장애를 이토록 어렵게 만드는 걸까? 이 질문에서부터 나의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장애를 공부하겠다고 나섰는데, 막상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동생에게 장애에 대해 묻기에는 동생이 말을 하지 못하고, 무작정 장애인시설을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애인의 경험에 대해 듣고 장애인의 시점에서 장애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지체장애인 변호사이자 작가, 연극배우인 김원영 변호사가 쓴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었다.


휠체어에 앉은 장애인 곁에 비장애인 여성이 서 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잘못된 삶(wrongful life)’ 소송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잘못된 삶 소송이란 장애를 가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으로 부모가 장애인을 대리하여 산부인과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의 한 종류이다. 듣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이 발상은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판례가 있는 소송으로, 장애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잘못된 삶. 개별적인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하는 삶이 바로 장애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요컨대 ‘잘못된 삶’이란 착하지 않거나 나쁜 짓을 저지른 삶이 아니라 존중받지 못하는 삶, 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격당한 삶이다. - 14쪽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실격당한 삶을 전제로 한 ‘잘못된 삶’ 소송에 대한 장애인 당사자의 변론이 바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다. 책은 총 9장에 걸쳐서 ‘잘못된 삶’이란 왜 존재하지 않는지를 설명한다. 1장과 2장에서는 인간의 성찰성과 상호작용을, 3장과 4장에서는 장애 운동의 예시와 정상성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음으로 5장과 6장에서는 장애의 수용과 법 앞에서의 장애를, 7장과 8장은 평등에 대해, 마지막 9장에서는 인간의 권리 존엄을 다시 한번 언급하며 최후 변론을 마친다.


성찰성은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노련함의 근본 조건이다. - 36쪽


그중에서도 인상적으로 읽힌 부분은 바로 ‘노련함’과 ‘사회적 상호작용’이었다. 작가는 일군의 사회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은 일종의 ‘공연’이며 이 공연에 장애인들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한 명의 삶이 실격되기도 실격되지 않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빛내는 데만 몰입하는 사람들을 ’품격주의적 태도‘라고 명명하며, 이들의 삶에서는 성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지적은 곧 ’존엄‘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데, 앞서 우리 삶이 일종의 공연이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작가는 우리가 공연을 바라보는 나와 공연으로 보이는 나 사이의 간극을 좁힐 것을 제안한다. 즉, 이 간극의 좁힘을 통해서 진정한 장애의 ‘수용’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시선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 가능성은 이제 ‘수용’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나의 몸, 운명, 삶, 실존에 관한 수용을 전제로 한다. - 91쪽


그러나 수용의 과정으로 가는 데 있어서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 바로 오랜 시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우생학’이라는 사상이다. 우생학 아래에서 우리는 유전자 진단 기술을 통해 장애아를 ‘걸러낼‘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장애에 대한 의료, 사회복지 지출에 둔감해져 왔다. 이것은 곧 장애인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사회에서 장애인이 ‘제거되어야 할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장애라는 정체성을 사회가 공유하고 ’정신의 스타일‘로 만듦으로써 우생학에 반발할 것을 제안한다. 철저히 자발적으로 장애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수용할 때, 우리는 우생학을 극복하고 몸과 정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법적, 도덕적으로 평등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장애가 있는 몸,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신체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혐오나 피해의식에 기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이 구축해 놓은 외모의 위계질서에 종속되지 않으며, 앞으로의 삶을 외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혹은 피억압자로서의 의식과 트라우마에 짓눌리지 않은 채 살아가겠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 태도(입장)’를 수용한 것이다. - 144쪽


따라서 작가는 ‘수용’이라는 실천적 선택의 맥락에서 바라보며, 장애라는 정체성 역시 어떤 결과이자 산물이기보다는 장애라는 경험에 맞서 한 개인이 작성해 나가는 ‘이야기’라고 정의한다.(149쪽) 이에 따라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장애인에게 주어지는 권리의 경험을 작가는 차분하고도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한 명의 장애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있어 새로운 권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짚어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동권‘을 들 수 있겠다. 이때 특히 작가의 변호사라는 직업이 빛을 발한다. 작가는 법적으로 명시된 우리의 권리를 하나씩 읊어주면서 장애인의 권리가 형성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지체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이동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재미있게 읽혔는데, 장애인이 한 명의 권리 주체자이자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거리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권리’란 국가에 의해 보장되고 주어지는 것이지, 개인이 투쟁해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우받기 위해서는 직접 거리로 나서 권리를 이야기하고 법제도에 권리를 편입시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니!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권리를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해 왔고 내 인생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지 못하고 있었음을 확인받는 것 같았다.


장애인이 자신의 이동할 권리를 발명하고, 이를 법제도에 진입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이동해서 거리로 나와야 했던 것이다. 이는 권리가 법제도 안에서 국가권력의 힘을 통해 인정되어야만 실질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 자신의 신체나 정신 혹은 처한 사회적 상황의 문제를 권리의 언어로 표현하고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법제도 안으로 진입시켜 실질적인 힘을 갖도록 정치적, 도덕적, 헌법적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 자체가 ‘잘못된 삶’들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이다.  - 231쪽


권리는 누군가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영위해 나가면서 스스로 써나가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명 깊었고, 가장 와닿았던 부분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삶이라는 연극을 써 내려가지만, 연극을 하는 나와 그 연극을 보는 나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내 권리를 찾고 내 인생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위해서는 둘을 일치시키고 나의 존엄을 위해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점에서 장애를 공부하고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함께 싸워야겠다고 다짐했다. 타인의 삶에 깊이 공감하고 그 사람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같이 노력하는 것이 곧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고 그 정체성 안에서 숨 쉴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존재가 정체성을 넘나들면서 우리 사회의 공감력을 키우고 다 함께 어우러져서 살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치 김원영 작가가 자신의 존재로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몸으로 쓴 것처럼 말이다.


장애인 표시 그림판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 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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