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여름의 빌라>
관계란 둘 이상의 사람들이 특정 시간과 공간을 경험한 뒤 남겨진 기억을 더듬어가며 발견하는 흔적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미술’이라 부르는 고유명사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되는 개념적 정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과거 구석기 시대의 <라스코 벽화>부터 오늘날 니키 리의 <Part>(2002-2005)까지 지구상에서 창작된 모든 작품을 미술이라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미술이란 미술가들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미학적으로 재구성된 어떤 것, 그러니까 미술가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통해 발견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수린의 소설은 이 ‘미술’의 자리에 ‘관계’라는 명사를 대입한다. 백수린의 소설에서 관계란 둘 이상의 사람들이 특정 시간과 공간을 경험한 뒤 남겨진 기억을 더듬어가며 발견하는 흔적이다. 미술가들이 그려놓은 작품을 통해 미술이 무엇인지 가늠해보듯 백수린의 화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시간을 돌이켜보며 그들 사이에 있었던 관계란 무엇이었는지 고민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시선을 거쳐 소설 속에서 관계의 모습은 언제나 사후적인 것, 인연과 만남이 끝난 뒤에야 되짚을 수 있는 궤적으로 나타난다. 작가가 「시간의 궤적」을 소설집의 처음에 놓아둔 이유다.
「시간의 궤적」. 제목 그대로 ‘나’는 이 소설에서 궤적을 그리듯 자신이 30대였을 때 언니와 보냈던 시간을 회상한다. 회상은 백수린이 타인과의 관계를 그려낼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으로, 작가는 회상을 통해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과 지금의 시간에 거리를 벌려놓은 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갈등하고 헤어지는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면밀하게 살펴본다. 눈여겨볼 점은, 이러한 거리 두기가 소설 속 화자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지점이다. 이는 비단 「시간의 궤적」뿐만 아니라 백수린의 화자들에게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에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우며, 상처를 줄까 봐 혹은 받을까 봐 두려움이 많은 화자들.
소설에서 이들은 대개 책상물림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무엇을 하고 싶고 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해본 경험이 적기 때문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그 확신 부족에서 비롯된 세계의 비좁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자기 자신을 가둬두는 세계에 불만을 느끼는 것이다. 이 불만을 해소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그들은 타인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을 선택한다. 그들에게 동경의 시선을 보내며 그들이 자신의 세계를 넓혀줄 거라고,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 상황을 해소해줄 거라고 덜컥 믿어버린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애초에 일방적인 욕구였기에 당연하게도, 실패하고 만다.
「시간의 궤적」에서 ‘나’와 언니의 관계는 ‘나’가 언니의 비밀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파열된다. 이때 언니의 비밀이란 그녀가 이제는 다른 이의 남편이 된 옛 연인을 잊지 못하고 그에게 연락하는 것으로, 이것은 서른 살의 ‘나’가 언니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더욱 좁혀주었던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쩌다가 ‘나’는 그것을 언니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나’는, 자신이 브리스와 결혼하고 나서부터 미술사를 공부하러 프랑스에 온 유학생이 아니라 프랑스인과 결혼해, 프랑스에 계속 남아 있을 사람으로 위치가 변화했기 때문에, 그래서 한시적으로 프랑스에 머물다가 떠날 그녀에게 부러움과 질투,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설명하는 대신, 그 자리에 자신이 보았던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이미지들을 놓아둔다.(36쪽) 불행한 자신의 삶을 견디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려야만 한다고 믿는 그들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행동이 그들과 다를 바 없었음을 담담하게 고백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이 회상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의 좁은 세계와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타인과의 관계 맺음을 시도했지만, 그 시도가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오히려 타인과 다시 한번 가까워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뒤늦게나마 타인의 세계를 상상하고 이해해보려는 마음, 자신이 망쳐버렸던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라는 바람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면 해결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왜 ‘나’는 언니에게 사과하지 않았을까? 왜 언니와 연락할 방법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지 않을까? 역설적이게도 그 이유는 ‘나’가 그 순간을 회상해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협소한 시각으로 타인을 바라봤기에 그 한계에 다다른 순간 언니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다는 걸 현재의 ‘나’는 알고 있다. 1인칭 화자의 눈으로 보는 타인의 세계, 경험, 삶이란 얼마나 협소한가. 같은 이유로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재해석되고 복구된 과거의 범위도 좁기는 마찬가지다. 상대와 이별한 지금의 시점에서 ‘나’가 언니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화자는 회상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기에 언니에게 사과를 건네거나 연락을 취하는 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나의 한정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해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훗날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현재의 ‘나’는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저지를지 모르는 폭력으로부터 상대방을 지키려는 것과 동시에 그 폭력을 저지르기 두려워하는 나를 보호하려는 마음일 수 있다. 언니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이 언니를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38쪽) 문장의 모호한 의미는 그렇게 타인에 대한 화자의 조심스러운 태도와 연관된다.
이러한 조심스러운 태도는, 어떤 면에서는 타자와 자신의 사이를 불가해(不可解)의 위치에 세워두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여겨지기도 한다. 절대 좁혀지지 않았던 나와 타인의 거리를,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좁혀지지 않은 채로 두는 것이다. 이러한 거리 두기는 상대방을 이해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너무나 이해하고 싶어 발생한다. 「여름의 빌라」에서 주아가 베레나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녀가 2016년 12월에 겪었던 비극을 이해한다거나, 혹은 그녀가 보낸 편지의 내용에 동의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시엠레아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여름의 빌라에서 갈등이 벌어졌을 때 베레나가 울음을 터뜨렸듯, 주아는 베레나의 편지를 읽으며 자신이 말하는 이해나 동의, 회복이 얼마나 부족한 것인지 알고 있다. 그 점에서 주아가 베레나 부부와 헤어지기 전 울음을 터뜨리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주아는 그때 자신이 그들과 있으면서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와 문화마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이야기할 수 있는 세계시민이 되었다고 느꼈다고(44쪽) 밝힌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과한 애정을 품게 되었으며, 그들과 베를린 기차역에서 헤어지고 나면 다시 자신의 외로운 세계로 돌아갈 것 같아 두려움을 느꼈다고. 그래서 그 두려움에 울음을 터뜨리고 만 거라고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주아가 글에서 밝히듯이, 고작 사흘을 함께 있었던 이들에게 ‘세계시민’으로서의 넓은 세계관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세계시민이 되었다고 느꼈다’는 말은 주아에게 자신의 좁은 시야를 재확인하는 말이며, 베레나 부부와의 간극을 응시하게 될 대의 고통을 더욱 극대화하는 문장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은 주아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과거 세상이 확장되는 경험을 공유했던 서로와 다시 만나게 되면 지금 삶의 어긋난 지점을 봉합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은 베레나 부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베레나와 한스 또한 같은 이유로 주아 부부와의 재회를 희망했고, 그들 부부 사이에 벌어진 비극을 극복할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여름의 빌라에서 벌어진 다툼을 통해 아프게 배신당한다. 「시간의 궤적」에서 ‘나’가 관계의 회복을 기대하며 언니와 떠난 여행에서, 도리어 ‘나’가 자신의 열등감을 확인하고 언니에게 상처를 준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과거의 인연을 회상하고 재구성하며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알아보려는 시도는 또다시 실패하고 만다. 지금의 상태에 다다르기까지 벌어진 일들은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인식하는 세계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그것은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관계의 자리에는 불가해(不可解)의 공백만이 남게 된다.
영영 이해할 수 없는 타인.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할까? 그것은 아니다. 타자에게 영영 다가가지 않겠다는 것은 다른 말로 스스로 자신의 좁은 세계에 갇히겠다는 말과 다름없으며, 자기 확신이 부족한 화자에게 자신의 세계에 갇힌다는 것은 화자에게 또 하나의 억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회상을 통해 백수린의 화자들은 자신의 세계의 협소함을 배웠지만, 동시에 그런 좁은 시각으로도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놓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면 이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자신과 타인 사이에 놓인 불가해(不可解)의 공백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실패한 복구는 어디로 가며 이 복구가 우리에게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쉽게도, 「시간의 궤적」은 이 질문의 직전에 정지해 있다. 왜냐하면 「시간의 궤적」 속의 ‘나’는 언니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때보다 조금 객관적이고 넓은 시야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객관적 시각이란 그녀가 현실과 타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인식에는 ‘더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체념이 잔잔하게 깔려 있고, 그 체념으로 인해 이 소설은 시간의 ‘궤적’을 쫓는 것에서 멈춘다. 다시 말하면, 언니와의 공백은 공백 상태로 남아 있고, 이후의 화자의 삶이 포물선을 예측하듯 너무나 쉽게 연상되어 다소 심심하면서도 아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선을 돌려 「여름의 빌라」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아야 한다. 물론 「여름의 빌라」 역시 지금의 화자가 자신의 세계를 넓히려는 시도를 레오니라는 어린이의 순수함에 기대어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측면이 없지 않다. 세계에 그어진 선을 쓱쓱 지우고 경계와 경계를 넘는 것을 어린아이의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그렇게 쉽게 경계가 흐려지지 않는다는 걸 아는 어른의 입장에서는 조금 무난한 선택으로 보이는 탓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결말이 감동적이고, 미래를 꿈꾸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화자가 미약하게나마 자신의 세계를 계속 넓혀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깝지만, 그 불가능을 알고라도 이해를 시도하는 일은 멈출 수 없다는 것. 「여름의 빌라」의 화자에서는 그러한 ‘그럴 수 없음’이 엿보인다. 그리고 백수린은 ‘이해 불가능’과 ‘그럴 수 없음’ 사이의 균형점을 불가해(不可解)에서 찾는다. 오롯이 타인을 이해하겠다는 마음은 잠시 접어둔 채 그 사람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의 세계를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해본다. 그와 자신 사이에 흘렀던 감정, 기억, 경험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 관계의 다른 이름을 고민한다.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그 이해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 백수린이 말하는 관계는 그렇게 하나의 이름이 아닌, 그 사람과 함께 보냈던 전체의 경험으로 설명된다.
백수린의 소설에 ‘우아하다’라는 형용사가 붙는 이유는 아마도 소설이 보여주는 그 불가해의 중의적인 의미에 있을 것이다. 능숙하게 타인과 관계 맺으며 살고 싶지만, 번번이 저의 안전지대로 돌아가 숨어버리게 되는 인물들. 그러면서도 다시 자신의 껍질 밖으로 나오고 싶어 타인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시간이 흐른 뒤 그 관계의 궤적을 따라가 보며 그들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관계란 무엇인지 가늠해보는 사람들. 그들이 냉소에서 벗어나 타인을 사랑하길 원하고, 고통스럽지만 세계를 둘러싼 벽들을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며 타인과 나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고민해보려는 노력은 독서를 거듭할수록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독서를 마친 후에는, 백수린의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그 감동이야말로 이 세계를 조금 더 근사하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할 ‘우아함’이 되지 않을까, 하는 감상을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살기 위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해와 사랑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없다고 믿고 있다는’(289쪽) 작가의 말처럼.
아마도 백수린은 다음 소설에서도, 그리고 그다음 소설에서도 그 사랑의 시선을 놓치지 않을 것 같다. 번번이 그 경계를 허무는 것에 실패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앞으로도 백수린의 소설 속 거듭되는 이해의 실패는, 타인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타인과 나를 가르는 경계를 세심하게 살펴보는 작가의 다정한 응시로 기록될 것이다.
하나가 아닌 전체로서 사람을 기억하는 일, 백수린의 소설은 그 경계의 다정한 응시로 기록될 것이다.
참고자료 :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문고판)』, 백숭길, 이종숭 옮김, 도서출판 예경, 2013,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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