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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Apr 12. 2024

'힐링포션'을 추억하며

첫 번째 직장이었던 회사가 더 큰 회사에 인수되면서 두 번째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그 회사에는 동호회 제도가 있었는데, 동호회 활동을 하는 직원들에게 매월 1만 원씩을 지원해 주었다. 그래서, 기존에 존재하는 동호회들을 살펴봤지만, 딱히 활동하고 싶은 동호회가 없어 가입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다가, 나처럼 동호회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매월 1만 원씩 나오는 돈으로 기부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기부는 동호회 활동이라고 보기 어렵다. 모여서 어떤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직원들 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되면 좋고 안 돼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회사에 기부 동호회 개설이 가능할지 물어봤다. 다행히 회사가 취지에 공감해 주었고, 다소 예외적으로 기부 동호회 개설을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힐링포션'이라는 이름과 함께 5명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동호회 회원 수만큼 기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동호회를 알리고 회원을 모집하는 활동을 조금 했다. 적극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기부 동호회가 존재한다는 것과 기부 현황 정도를 가끔 전사에 공유했다. 그러자 회원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고, 매월 후원하는 금액도 그에 따라 늘어났다. 사람이 많아져서 나중에는 회사에서 두 번째로 큰 동호회가 되기도 하였는데, 그래서 매월 몇십 만원씩 후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동호회는 꽤 오래 존속되었고, 가끔은 기부에 동참하겠다며 후원금을 건네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동호회에서는 바자회를 열고, 그 수익금을 모두 우리 동호회에 보내주기도 했다. 처음에 5명이 모여서 매월 5만 원씩 후원하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결국 동호회가 지속되는 동안 수천만 원을 기부할 수 있게 되었다. 활동이 끝난 지 꽤 오래되어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총 3,000만 원 이상은 기부했던 것 같다.


'힐링포션'을 운영하면서 몇 가지 생각하게 된 것이 있다. 일단, '좋은 일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동호회를 시작하면서 그렇게 회원이 많아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5명을 모으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는 50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하게 되었다. 문턱을 낮춰주고, 누군가 번거로운 일을 대신해 주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좋은 일에 동참했다.


또 한 가지는, 좋은 일은 널리 알리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남 모르게' 하는 선행을 더 고귀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선행을 했으면 그것을 널리 알려 다른 사람이 동참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얼마나 하는지 모를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 사람은 그 일에 더 쉽게 동참한다. 그래서 힐링포션의 홍보에서도, 회원의 수와 기부 금액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지막으로, 좋은 일을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도리'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부를 하건 안 하건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기부를 하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기부를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을 이야기하고, 그 효용이 기회비용보다 충분히 크다는 것을 어필해야 한다. 한 마디로, '좋은 일'이라는 제품을 구매하도록 '마케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시절인데, 웬일로 그런 동호회를 만들고 운영했을까 싶다. 그 이후로는 그런 활동을 다시 한 적은 없다. 그래도, 가끔씩 그 동호회를 추억하면 내 인생이 좀 더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만든 '힐링포션'이,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치유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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