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라를 여행하는 군필술쟁이를 위한 안내서

4일 차. 태초에 꿈틀임이 있었음에

by 서문교


꾸무리한 아일라의 전경

넷째 날 아침은 위의 사진을 보면 알다시피, 비바람이 불어 닥치는 최악의 날씨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 거리를 누비며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어쩌면 원래부터 날씨가 저랬는데 내가 맛이 가서 몰랐던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BOWMORE ASTON MARTIN 10 YEAR

식사는 이제부터 전과 소개했던 메뉴가 반복해서 먹은 관계로 구태여 올리지는 않겠다. 오늘 아침식사에 곁들여진 한 잔은 바로 보모어 애스턴 마틴 10년이다. 이 녀석은 보모어 기본 라인업이 가지고 있는 짠맛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단맛의 밀도는 더욱 짙게 느껴지는데, 스코틀랜드 전통의상 '킬트'를 입은 소년소녀가 연상되는 한 잔이다. 한국에서는 15만 원 정도에 팔리는데, 현지에서는 얼마인지 잘 모르겠다. 중요한 점은, 저렇게 맛이 더 뛰어난 경우에는 쏙쏙 뽑아서 상품화만 하느라 정작 중요한 기본 라인업의 품질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보모어 증류소의 아쉬운 현실이다.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해야 하려나.


브룩라디까지의 여정

오늘 갈 증류소는 위스키 업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증류소라고 불리는 브룩라디(brichladdich)이다. 증류소를 수식하는 문장처럼 브룩라디는 아일라 섬의 왼쪽에 위치하고 있는데(2005년 킬호만 증류소의 설립으로 인해 최서단의 타이틀은 뺏긴 상태이다), 보모어와는 만 하나를 끼고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어 상당 시간이 소요된다. 직선으로 가로지르면 도보로 40분인 거리가 돌아서 가면 3시간 40분이 돼버린다. 버스 요금은 2.90파운드, 버스는 오전 오후에 1대씩만 편성되어 있어 아무쪼록 빠르게 출발해야 했다.


아일라 고등학교와 초등학교

버스 정류장 앞에는 아일라에 있는 고등학교와 초등학교가 있는데 건물이 게리모드에서 한 번쯤 볼 법 직한 느낌이다. 버스 정류장 앞에 있으니 등교하러 많은 아이들이 버스에서 하차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바로 이들 때문에 보모어-브룩라디 간 버스가 오전 오후에 1대씩만 있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공부하는 어린 학생들 중 상당수는 아마 자기 부모님의 과업을 이어받을 것이다. 어부나 농부, 식당, 어쩌면 증류소까지. 그렇다면 나는 먼 훗날 아일라에 있는 증류소의 마스터 디스틸러 중 한 명을 만나게 될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먼 훗날 내가 다시 아일라, 그것도 보모어에 방문하면 이곳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그리고 여기서 수학했던 학생들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나름 호기심의 감정에 젖었다.


브룩라디의 제품들이 적혀있는 오크통. 그러면 다른 제품들은 어디에다 적어야지?


마침내 도착한 브룩라디. 브룩라디는 게일어로 '해안의 제방'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그 이름답게 다른 증류소들과 달리 야트막한 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담이라도 하더라도 사람의 출입을 막기 위한 그런 담은 아니다. 단순히 증류소의 경계를 구획 짓는, 마치 제주도의 돌담과도 같은 푸근함을 느낄 수가 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브룩라디 증류소는 각 곳마다 티파니 블루색이 칠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브룩라디 고유의 특성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데, 2001년 증류소 재개장 이후부터 '자연스러운 위스키', 그리고 '투명성'이라는 증류소의 핵심 철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상징으로 볼 수가 있다. 사실 이건 증류소가 하는 설명이고, 무엇보다 이 색감이 브룩라디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전신만신 칙칙한 색(특히 아드벡) 투성이 사이에서 혼자서 청량한 푸른색을 지니고 있으면 누가 눈길 한 번 더 주지 않겠는가?


앞서 말했듯이 자타공인 가장 진보적인 증류소인 브룩라디는 자기네 증류소에다가도 큼직 막하게 'PROGRESSIVE HEVRIDEAN DISTILLERS'라는 부제를 붙여 놓았다. 자기가 진보주의자를 자처하거나 평소 사회 평등이나 환경, 인권 등을 강조하는 사람이라면 이 증류소를 들려보기를 추천한다. 아닌 게 아니라, 후술 하겠지만 제품을 제작하는 데에 있어서도 실제로 진보적인 가치를 녹여내고자 노력하는 증류소이다.



내가 신청한 투어는 'BRUCHLADDICH EXPERIENCE'라는 프로그램으로, 브룩라디 제품군의 생산 과정을 전부 구경해 본 다음, 숙성 창고에서 증류소가 제공해 주는 위스키 3종을 시음하는 구성으로 되었다. 인당 75파운드인데, 다른 증류소와 비교하면 투어 비용이 상당히 착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브룩라디의 보비 제분기

여느 증류소가 그렇듯이, 브룩라디 역시 제분기의 소개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얘네는 조금 더 심하다. 제분기에서부터 침을 튀겨가며 자랑을 시작한다. 골동품으로 분류해도 이상하지 않은 보비 제분기를 사용하여 몰트를 분쇄하는 게 특징이란다. 그래, 나도 그거 여러 증류소 돌아다니면서 봤는데 뭐 어쩌라고?

투어 가이드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였다. 자기가 소개하는 이 제분기는 벨트 구동식 보비 제분기로, 제작자 로버트 보비가 2001년 사망 2주 전에 개조한 '마지막' 벨트 구동식이라는 것이다.


그렇구나, 그래서 유달리 가이드가 힘을 주어 자랑하는 것이었구나. 듣고 보니 다른 제분기와 다르게 모양도 좀 달라 보이고 더욱 굉음을 내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참기름집에 가면 보이던 분쇄기가 훨씬 더 커진 느낌? 목재 외관의 제분기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것을 보니 마치 스팀펑크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것을 사용하는 것도 진보적인 증류소라는 칭호를 붙이는 데 사유가 될까? 하기야 학창 시절 진보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선생님께서 항상 개량 한복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 같긴 하다.


브룩라디의 분쇄기

몰트는 골동품 분쇄기를 지나 분쇄하는 기계에 당도했다. 이 분쇄기 역시 그냥 지나칠 만할 물건이 아니다. 1881년에 제작된 7톤짜리 캐스크 철제 갈퀴로 이루어진 쟁기 매시툰(mash tun)에 채워진다. 이 기계는 퍽이나 오래되기도 했지만 현재 스코틀랜드에서 운영 중인 세 대의 쟁기 매시툰 중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1881년이라...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는 미국 캔자스 주에서 금주법이 실시된 해이고, 국내로 한정해 보았을 때는 조선 정부가 청나라로 영선사를 파견했을 때다. 아마 고조부가 저 때 태어나셨을 랑말랑 했을 것이다. 과연 증류소에 설치된 매시툰 부품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과연 몇 개일까? 아직까지 남아있긴 한 걸까?

테세우스의 배라는 개념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역설로, 대상의 원래 요소가 교체된 후에도 그 대상은 여전히 동일한 대상인지에 대한 사고 실험이다. 과연 이 분쇄기는 1881년에 제작된 기계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다른 기기라고 봐야 하는 것인가? 분쇄기는 인간들의 철학과 관계없이 잘도 돌아갈 따름이다.


브룩라디의 워시백

증류소 공정 투어를 돌면 무조건 워시백을 구경하는 코스가 있긴 하지만, 여기는 구태여 특이하다고 따로 적었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우선, 향이 다르다. 원래 한창 발효하는 워시를 맡으면 마치 푹 삭힌 홍어 냄새를 맡는 것처럼 코를 탁 치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브룩라디의 워시는 코를 탁 치다 못해 얼얼할 정도이다. 여기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평생 이비인후과를 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감기나 비염이 있다면 당장 워시백에 머리를 넣고 온몸을 비틀면서 눈물콧물을 흘릴 때까지 가만히 처박히게 하면 될 일이니깐 말이다.


둘째, 워시백마저도 흙빛이 느껴질 정도로 상당히 오래되어 보인다. 투어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모두 합쳐 21만 리터이며, 너무 오래되어 세척을 해도 나무에 이미 효모가 박혀 있다고 한다. 새 나무통을 이용하면 세척도 간편하고 사용하기는 수월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무의 향이 지배적이게 되어 브룩라디 본연의 느낌을 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전 브룩라디 생산 책임자였던 짐 맥퀴완이 이 워시백에 대해 '최고의 수프는 가장 오래된 항아리에서 만들어진다'는 속담을 인용했다는 것을 덧붙여 알려주었다.


브룩라디의 심장, 증류소

앞서 언급했듯 브룩라디 증류소를 돌아다니면 스팀펑크물이 연상된다. 그리고 그 연상은 증류소에 들어와 확신으로 변하게 된다. 끊임없는 소음과 후끈한 온기, 철과 나무의 끊임없는 조화. 이러한 예스러움은 정말이지 가장 진보적인 증류소라는 호칭과는 모순되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 틀린 말인 아니기에 더욱 혼란스러우면서도 우스울 따름이다.

브룩라디의 증류기

마시는데 악영향이 있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증류기. 구리 증류기가 검게 그을려진 것을 보면 말은 다한 셈이다. 투어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사실 증류기가 검게 된 이유는 오일 처리를 해서 그렇다는데, 잘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오일을 발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오래 써서 그런 것 같은데... 일부러 선의의 거짓말을 치는 것일까?


브룩라디는 최대한 오일리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짧게 컷팅을 거친다고 한다.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브룩라디 증류소에서는 브룩라디뿐만 아니라 옥토모어, 포트 샬롯 등 오만가지 다양한 제품군들을 출시하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정답은 동일한 증류소에서 그냥 뽑는 것이다. 브룩라디는 피트 처리를 하지 않은 제품이고 포트 샬롯, 옥토모어의 경우 피트 처리를 한 제품인데 동일한 증류기에서 뽑는 것이라고? 가이드는 시간에 맞춰 세척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답변하였다.

덧붙여, 옥토모어의 경우에도 의도적으로 피트의 강한 페놀수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피트 처리한 몰트를 증류하는 도중 페놀수치가 높은 원액이 발견되면 그건 옥토모어로 따로 빼서 분류한다고 한다. 씁... 생각보다 허무한 것 같아 맥이 빠졌다. 그 육중한 곤봉 같은 제품이 사실 무당이 결혼식날 간택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니.


어글리 베티 증류기

브룩라디에서 생산하는 또 하나의 주종, '보타니스트 진'을 만들기 위한 증류기도 눈에 띈다. 로몬드 증류기로 분류되는 기계로, 그 외관 때문에 '어글리 베티'라는 호칭으로도 불린다. 로몬드 증류기는 다른 여러 증류기에서 생산되는 원액의 스타일을 한큐에 얻을 수 있도록 내부에 여러 개의 판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판을 넣고 뺌으로서 그 환류량과 원액 스타일을 조정하는 것이다.


다만 증류기를 분해하고 일일이 청소를 해야 하는 불편함으로 인해 로몬드 증류기는 1950년대 등장했다 감쪽같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증류기이다. 그렇다면 이 증류기는 뭐냐고? 브룩라디에서 사용하는 어글리 베티 증류기의 경우 2010년 짐 맥퀴완이 폐쇄된 증류소(인버레븐)에서 가져온 것으로, 내부 판이 현재까지 작동되는 유일한 증류기이다.


원래 보타니스트 진의 품질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드는 기구를 보고 나니 보타니스트로 만든 진 토닉이 더욱 마시고 싶게 되었다. 어렸을 때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에서 주인공 성찬의 라이벌 봉주가 옛날 국수틀을 이용해 막국수를 뽑는 것을 보고 침이 뚝뚝 흐를 정도로 식욕이 폭발하였던 나는, 그날 저녁 모친에게 밖에서 막국수를 먹자고 졸라댄 적이 있었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매체를 보다가 식욕이 당겨지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이건 만국공통이라고 생각한다.


브룩라디의 Yellow Submarine

증류소 공정 투어를 마치고 웨어하우스를 가는 도중 발걸음이 멈춰졌다. 노란 잠수함(yellow submarine)이다. 갑자기 느닷없는 잠수함이 나타나니 브룩라디가 비틀즈가 왔다 갔거나, 그와 관련된 증류소라고 생각한 분들이 분명 계실 것이다. 훌륭한 추리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증류소에 있는 노란 잠수함은 비틀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이 잠수함은 왜 아빠차 자동차 뒤에 있는 북어포처럼 박제되어 있을까? 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2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2005년 6월 아일라에서 어부 생활을 한 남자가 원격으로 조정되는 무인잠수정을 발견하였다. 그는 해안경비대로 일하는 자신의 처남과 함께 그 잠수정을 인양하고, 처남은 해군에 연락해 본인들이 국방부 마크가 붙어있는 잠수정을 인양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웬걸, 해군에서는 사라진 잠수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대에서 사고 은폐하는 것은 만국공통인가 보다. 아무튼 그는 주인 없는 잠수정을 자기 집에 두었고, 이로 인해 그의 집은 관광 명소가 되는 수혜(?)를 얻게 되었다. 그러자 뒤늦게 사고 수습을 하려는 영국 해군(이것 역시 동쪽에 있는 어떤 나라 군대와 똑같다)은 지뢰 탐지 활동을 하는 잠수정을 잃어버렸다고 하고 잠수정을 회수해 갔다.


때마침 14년 숙성 위스키를 출시하고자 계획하고 있었던 브룩라디는 특유의 힙스터 감성을 살려 자기 제품에 노란 잠수정을 그려 넣고 'WMD Ⅱ Yellow Submarine(대량살상무기 2탄 - 노란 잠수함)'이라고 명명하였다. 위스키 마니아들은 새로운 라벨과 그 유래를 듣고 혹하여 냉큼 사버렸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었으면 교활한 진보주의자 증류소 브룩라디가 아니다.


잠수함 실종 사건이 10년 지난 후, 그 노란 잠수정이 이베이 경매에 매물로 나왔다. 구식이 된 잠수정을 해군이 매각하고 난 뒤, 여러 주인을 거쳐 이베이까지 당도한 것이다. 잠수정을 이용해 짭짤한 재미를 본 브룩라디는 잠수정을 구매한 후 수리 과정을 거쳐 증류소 뒷마당에 박제시켜 놓았다. 그 후 전리품을 얻은 치적으로 25년 숙성한 위스키에도 잠수정을 박아 넣고 'WMD Ⅲ Yellow Submarine(대량살상무기 3탄 - 노란 잠수함)'이라고 명명한 다음, 뼛속까지 우려내 먹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활용법이라고 할 수 있다.


WMD Ⅱ & Ⅲ Yellow Submarine

스토리텔링 마케팅이라는 마케팅 기법이 있다. 브랜드 내 이야기를 만들어 광고나 판촉 등에 활용하는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기법으로, 특정 브랜드나 상품의 특성과 잘 매칭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소비자의 마음을 좀 더 자극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아일라를 갔다 온 후 복학하고 나서 마케팅조사론이라는 수업에서 이 개념을 배웠는데, 듣자마자 바로 브룩라디의 노란 잠수함이 생각났다. 출시했을 때도 잘 팔렸고, 수업 중에도 떠올리게 만든 것을 보면 브룩라디는 정말 마케팅 수완이 좋은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브룩라디의 마케팅은 아일라 위스키 중 상위권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제품들에서도 스토리텔링 마케팅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코카콜라의 경우 재료나 공장, 발명가, 기업 등 제품과 하나도 관련이 없는 산타클로스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당시 여름 한정 음료라고 생각했던 코카콜라의 통념을 깨고, 코카콜라가 “겨울에도 상쾌하게 마실 수 있는 있는 음료”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겨울의 상징인 산타클로스를 사용한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빨간 옷의 산타 클로스가 아이들의 머리맡에 포장된 코카콜라를 선물로 두는 모습으로. 이는 겨울을 상징하는 산타클로스와 코카콜라를 상징하는 빨간색을 잘 연합시켰고, 이 스토리텔링의 효과로 코카콜라의 겨울철 판매량은 크게 상승했다. 덕분에 산타클로스의 표준 영정은 코카콜라에서 만들어준 것으로 만국공용으로 통용되고 있다.

코카콜라와 산타클로스


반면 최악의 스토리텔링 마케팅도 존재하는데, 구 해태그룹의 해태유업 광고가 바로 그것이다. 칼슘우유 광고를 위해 그 당시 501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최악의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배경으로 내걸었던 것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의외로 당시엔 별다른 비판이나 지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 와서 이태원 참사를 배경에 넣고 '좀 더 튼튼했더라면...'이라는 구호로 건설사 광고를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그 회사 주가는 폭락할 것이다. 아니, 주가만 떨어지면 다행이지 회사 이미지를 반전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90년대만 하더라도 이런 광고가 존재했었다


중요한 것은 잠수정을 이용한 브룩라디의 스토리텔링 마케팅은 두 번이나 우려먹을 정도로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한 마케팅컨설턴트는 스토리텔링 마케팅은 매우 간단해야 되고, 그걸 통해 다양한 상상력이 자극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브룩라디 역시 잠수정이라는 매우 간단한 소스를 제공했을 뿐이고, 이를 통해 사람들은 브룩라디 몰트들의 특징과 잠수함을 결부시켜 구매욕을 자극시켰다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들어맞는다고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술은 어떨까?


국순당 백세주만 보더라도 옛 고사를 훌륭히 인용한 스토리텔링 마케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밝은세상영농조합의 '호랑이배꼽'이나 한영석의발효연구소의 '화산귀환 청명주'로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전자는 한반도의 호랑이 모양을 제품명에 녹여냈으며, 후자는 유명 웹툰의 등장인물과 제품명이 동일하다는 것에서 착안해 스토리텔링을 구현했다. 다만 많은 양조장이 세워지는 요즘, 불필요한 스토리텔링을 시도하는 경우가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백세시대부터 몇 천년 전간 이어져 내려온 제법으로 빚는다고 하거나, 집안에서 우연히 발견된 비밀 레시피를 가지고 복원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홍보는 오히려 소비자들에게 위화감을 자아내는 '지하철 보따리장사식' 마케팅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전통주들이 출시되는 만큼, 그에 따라 술과 관련된 다양한 스토리텔링들도 나오길 바란다.


브룩라디의 웨어하우스

다른 증류소와 비교했을 때 브룩라디 웨어하우스의 특징은 오래됨이다. 널빤지들의 모서리들도 삭은 것 같아 보이며, 오크통에도 곰팡이가 슬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땅바닥도 자세히 보면 일부 장소들은 흙으로 되어 있어 꽤나 축축한 느낌이 든다. 물론 이러한 요소 역시 위스키 풍미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으나, 적어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증류소라면 청결적 요소도 신경 쓰면 어땠을까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에서 소주 만드는 양조장의 저장고가 저랬어 봐라. 사람들이 얼마나 개떼같이 물어뜯었을까?


브룩라디의 오크통은 대부분 버번 캐스크로 이루어져 있지만, 약 25%는 셰리 캐스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특히, 브룩라디 역시 보르도의 유명 와인 산지에서 가져온 와인 캐스크를 활용한다. 브룩라디의 이러한 진취적 특성 때문인지, 내 생각에는 브룩라디가 아일라에서 와인캐스크를 가장 잘 활용하는 증류소인 것 같다. 브룩라디는 부지 내 8개의 저장고를 가지고 있으며, 해안 도로를 따라 2마일 떨어진 곳에 4개의 추가적인 저장고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중 6개는 전통적인 더니지 저장고이며, 2개는 주로 미국에서 이용되는 랙형 저장고이다. 저장고에는 총 35,000개의 캐스크를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브룩라디에서 제일 오래된 캐스크

내가 가이드에게 브룩라디 웨어하우스 내 가장 오래된 캐스크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저 캐스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1989년에 통입된 캐스크로,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저 캐스크에 들어가 있는 위스키 원액의 경우 확인 결과 알코올 도수가 40도 미만이 되어버렸기에, 유감스럽게도 병입해 판매하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저 캐스크에 들어가 있는 원액들은 어떻게 써먹는단 말인가? 가이드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브룩라디의 고숙성 위스키를 제작할 때 일부를 첨가하거나, 아니면 증류소 직원들끼리 순찰하면서 한 잔씩 하던가. 물론 자기는 후자가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하였다.


B2006RUCHLADDICH 2006

가이드는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 있으니 따라오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이 캐스크, 양면이 유리로 되어있다. 2006년에 통입된 이 오크통의 경우 와인 캐스크인데,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이 캐스크를 구매하였지만 모종의 사유로 아직까지 병입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오크통의 양쪽 면을 유리로 만들고 사람들이 캐스크의 숙성 과정을 시각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했다. 사진으로는 그 색감을 확실히 느끼기 어려우나, 두 번째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가이드가 반대편에서 빛을 투과하니 확실히 와인 캐스크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붉고 어두운 느낌이 마치 용이 잠자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유를 들자면, <반지의 제왕>에서 스마우그가 깊은 지하 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BRUICHLADDICH 2007, 유달리 허접스러운 게 귀여워서 찍었다.


웨어하우스 시음회 장소

시음은 웨어하우스 내부에서도 좀 더 장소가 넓은 곳에서 진행되었다. 웨어하우스의 상태를 보았을 때 처음 들렀는 곳보다 나중에 지어진 곳 같은데, 그만큼 넓고 또 한기가 돌았다. 자리에는 시음용 글라스와 운전자를 위해 준비된 앰플병이 상자 안에 들어 있었으며, 특이하게도 브룩라디 술병을 물병으로 재활용하고 있었다. 참 이러한 곳에서도 환경을 생각하여 알뜰살뜰하게 사용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옛날 어머니들께서 델몬트 주스병을 보리차 담는 용기로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브룩라디에서 제공한 몰트는 다음과 같다.

1) BRUICHLADDICH BERE BARLEY 2009 (BOURBON CASK, 61.8%)

2) PORT CHARLOTTE 2003 (BOURBON + SAUTERNES CASK, 54.9%)

3) OCTOMORE 7.3 2010 (BOURBON + WINE CASK, 63%)


전날 부나하벤에서 당한 것이 있어 추가적으로 받을 수가 있는지 미리 물어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캐스크 내 있는 원액들이 거의 고갈되어 제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하였다. 기왕 증류소에서 공짜로 바이알 용기를 받았으니, 좋은 날을 받아 한국에서 시음을 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고로, 후술 한 내용은 모두 시향 한 것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해 주시길 바란다.


BRUICHLADDICH BERE BARLEY 2009 (13 YEAR, BOURBON CASK, 61.8%)

코에 닿자마자 버번 캐스크의 특성은 달콤한 꿀내가 매우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그 밖에도 짚풀이나 잔잔한 시트러스 등 버번캐스크가 가질 수 있는 특성들을 고루 갖춘 위스키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버번 캐스크 위스키와 다른 결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독특한 유제품향이 난다는 것이다. 약간의 밀크캬라멜이나 밀크티에서 느껴질 법한 향들도 솔솔 풍겨져 왔는데, 나는 그것이 이 원액의 원료가 되는 '베어 발리'에 있지 않은가 강력하게 추측한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2줄 보리와 베어 발리


보리에 대한 애정과 집념은 브룩라디가 가장 진보적인 증류소라고 불리우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이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보리는 2줄 보리와 6줄 보리가 있는데, 2줄 보리의 경우 맥주 양조용으로 사용하고 6줄 보리는 보리밥 등 식용으로 적합한 품종이다. 60년대 산업화 시기 국민들의 굶주림을 우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6줄 보리를 집중적으로 육성하여 국내 보리 품종의 주류는 6줄 보리이다.


그러면 베어 발리는 무엇인가? 이는 신석기시대부터 스코틀랜드에서 재배되었던 보리 품종으로, 북부 지방에서 오랫동안 재배되어 왔으니 수율이 좋은 신품종의 등장은 20세기 재배율이 급감했다고 한다. 이러던 와중 증류소도 오래되었고, 저장고도 오래된 브룩라디는 혁신을 위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재료다. 브룩라디는 지역 농부들과 연계해 아일라에서 생산한 보리로 위스키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품종을 복원하거나, 유기능 보리, 바이오다이내믹 보리 등의 제품을 생산하는 등의 지대한 변화와 다양성을 꾀하였다.


나는 위 두 개의 보리 품종을 보면서 케리건이 불현듯 떠올랐다. 스타크래프트 Ⅱ- 군단의 심장 캠페인을 진행하다 보면 케리건이 저그 종족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해 원시 저그들의 고향인 제루스를 방문하여 그들의 정수를 흡수하고, 케리건은 원시 저그의 힘을 얻어 칼날 여왕으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그로 인해 케리건은 마침내 오랜 숙적이었던 맹스크의 자신의 손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과거와의 조화를 통해 미지로의 도약을 자아내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케리건이 그렇게 저그 종족을 진화시켰으며, 브룩라디는 가장 진보적인 증류소라는 타이틀을 따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국은 어떨까? 내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 응답하라 시리즈가 등장하였고, 그때부터 뉴트로라는 것이 막 유행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2000년대에 유행한 것들이 재등장하고 있다. CD플레이어, 무한도전, 싸이월드 등등... 그다음은 무엇인가? 신태일? 노스페이스? 아니면 20세기를 모방한 2010년대를 다시 모방한 그 무언가?


언젠가부터 우리는 쳇바퀴를 돌고 있다. 그러다 동력이 멈춰지면 그저 흐름에 따라 유영하는 것일 뿐이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시대를 돌뿐인... 대한민국의 문화적 동력도 점차 정체되어가고 있는 것이 보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짱구 극장판에서 나오는 20세기 박물관은 어쩌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상형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걱정과 우려가 얼마나 달콤한 아편인지 실로 소름 끼칠 따름이다.


PORT CHARLOTTE 2003 (BOURBON + SAUTERNES CASK, 54.9%)

두 번째 잔은 피트처리를 한 맥아를 사용한 라인업인 포트 샬롯. 페놀 수치가 대략 40ppm이며, 다양한 캐스크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제품은 2001년부터 생산하였는데, 그래서인지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이 원액은 증류소에서 게스트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 가장 고숙성 포트 샬롯 중 하나라고 한다. 향을 맡아보면 달달하고 진한 복숭아를 불에 한 번 구웠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밖에도 건초, 초콜렛 등의 향도 느껴지는데 특이하게 뜨거운 폭염 속 아스팔트 도로를 걷다 보면 그 열기에서 전해지는 향이 기저에 깔려있다. 결코 좋은 향으로 분류될 수 없는 노트이지만, 묘하게도 자꾸 끌리는 향이다. 계속해서 딴 위스키에 정신 팔리지 말고 나한테 집중하라고 유혹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OCTOMORE 7.3 2010 (BOURBON + WINE CASK, 63%)

마지막 시음은 옥토모어 7.3이다. 혹자는 저거 이미 출시된 지가 언젠데 무슨 이상한 소리 하냐고 하겠지만 모르는 소리. 이것은 자그마치 9년 동안 캐스크에서 더 푸욱 익어 기가 막힌 맛을 자아낸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붉은 베리류와 빨간색 묽은 감기약의 느낌이 농밀하게 느껴지면서 후미의 진한 꿀의 느낌이 자아내는데, 피트감이 코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솔직히 마지막 잔의 경우 두 가지 캐스크가 곱하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 더하기의 느낌이 없지 않아 아쉬웠지만, 분명 맛에서는 피트가 그 어두운 발톱을 감추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남은 술들을 바이알 용기에 쏟아부었다.


브룩라디 증류소의 기념품샵

웨어하우스 투어를 마치고 다시 비지터센터로 돌아와 추가적인 시음을 기다리는 동안, 느긋이 증류소의 기념품 센터를 둘러보았다. 솔직히 브룩라디의 색감은 이뻤지만, 그것을 이용한 굿즈들은 매우 형편없기 그지없었다. 마치 푸른색과 하얀색이라는, 솔직히 말해 가장 근원적이고 심플한 팀컬러 조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최악의 유니폼과 굿즈를 뽑아내는 삼성 라이온즈와도 같다. 대한민국 제일의 광고대행사가 모기업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달라질 생각이 없으니, 그 구단 디자인팀은 전부 돌을 데려가다 앉혀놓아도 전혀 문제가 없을 지경이다. 돌은 적어도 돈을 축내질 않으니 말이다. 덧붙여, 옥토모어 BBQ 소스가 있어서 하나 사 먹어 봤는데, 자신이 돈이 많다고 생각하거나 짤짤이를 털어야 하는 경우에만 사드시길 추천한다. 필자는 이 소스에서 미약한 스모키함 이외에는 전혀 피트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뒤풀이 음주 3종

추가적으로 아일라에서도 교통편이 거시기한 증류소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았다고 브룩라디에서 3종을 추가적으로 시음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돌아오는 차편이 하나밖에 없어 후다닥 시음한 점 양해 부탁드린다.


1) BRUICHLADDICH BERE BARLEY 2013 (BOURBON + PAUILLAC WINE CASK, 50.0%)

앞서 맛본 베어 발리와 동일하게 크리미 한 우유, 오트밀의 느낌이 들었다. 덧붙여 뭔가 커피스러운 느낌도 드는데, 이것이 뽀이약 와인 캐스크에서 발현된 특성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유의 캐릭터와 커피의 캐릭터가 합쳐져 라떼, 혹은 당직 설 때 마시는 커피맛의 느껴져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전반적으로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 들지만, 피니쉬에서 밀가루 풋내가 강하게 치고 들어와 썩 유쾌하진 않았다. 두 번째로 베어 발리를 맛보고 이것이 그 특징이라는 확신이 들었는데, 이것을 미루어 보아 나는 베어 발리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다.


2) PORT CHARLOTTE 2010 SYC:04(SYRAH CASK, 64.5%)

세컨드필 쉬라 와인 캐스크에서 15년간 숙성된 포트 샬롯이다. 가죽과 검은 베리류의 향이 응집되어 있는데, 이것이 농축되다 못해 하나의 점으로 이루어져 마치 장향과도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거기에 피트에서 발현되는 해조류의 캐릭터가 같이 합쳐져 일식집에서 맛볼 수 있는 진하고 걸쭉한 느낌의 간장, 기꼬만 간장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녀석은 분명 기름이 잘 오른 등푸른 생선회, 가령 고등어나 꽁치 과메기와 찰떡궁합일 것이다. 이번 겨울에는 여자친구와 함께 포항에 가야겠다. 추위에 에는 바람 속에서 아랫목이 뜨근한 횟집. 거기서 설경을 내다보며 먹는 과메기와 포트샬롯. 이렇게 한 명을 또 피트성애자로 타락시키는 것이다.


3) OCTOMORE 14.4 (BOURBON, 59.2%)

당시에는 국내에서 미출시된, 그러니깐 양조장에서 갓 출시된 따끈따끈한 신상이었다. 이 친구는 안데스 산맥에서 자라난 콜롬비아 캐스크에서 5년 간 숙성시켰다. 향을 맡아보면 우선 직관적으로 생 땅콩 캐릭터가 느껴진다. 또한 묘한 스파이스와 삼나무도 뒷받혀 주는데, 나는 왠지 모르게 예전에 맛봤었던 달유인 SR이 연상되었다. 그 밖에도 휘발성산과 애기 구토향도 끝에 조금 느껴졌다.


보타니스트 진

앞서 설명한 어글리 배티 증류기를 이용해 만든 진. 보타니스트 진은 9가지의 전통적인 진 재료로 뼈대를 구축하고, 아일라에서 자생하는 22가지의 토종 식물을 이용해 그 특성을 발현시키는데, 특유의 산뜻한 시트러스함 때문에 니트로 마셔도 부담스럽지 않은 훌륭한 진이다. 내가 자주 찾아뵙는 바의 바텐더 역시 보타니스트 진을 기주로 사용하고 있다. 위에 있는 제품들의 경우 위스키 숙성에 사용한 오크통에 각각 3개월과 6개월 숙성해 만든 진이라고 하는데, (방문 당시) 아직 출시가 되지 않은 제품이므로 흔치 않은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입맛에는 의외로 6개월보다 3개월이 더 맛있다. 모름지기 진이라는 것은 종잇장만큼이라도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6개월 숙성은 음... 마치 아이번과 만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왠지 모르게 5일장에서 등장하는 담금주와 비슷한 캐릭터가 있어 외려 당혹스러웠다. 명탐정 코난에서 등장하는 진이 브라운 박사 얼굴이라고 생각해 봐라, 어울리겠는가? 하기야 그것도 나름대로의 재미는 있긴 할 것 같다. 기왕 이리된 거 어떤 캐릭터인지 느껴볼 수 있도록 장기 숙성 보타니스트 진도 출시되길 바란다.


어찌하다 보니 숙소를 저녁에 도착하게 되어버렸다. 이리 보니 서양고전 추리영화에서 등장하는 저택과 동일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며칠 지내다 보니 퍽도 익숙해지게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건만, 다시 뭔가 모르게 기시감이 들게 되었다.


Taj Mahal

대략 7시쯤이 되어 음식점을 찾았으나, 여느 섬이 그러하듯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마저도 열려있는 곳은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불러 마지막으로 이곳 타지마할의 문을 열었다. 분명히 영업 중이라는 푯말을 보았는데 가게 내부는 개점휴업 상태였다. 뭐지? 이 불쾌한 골짜기 같은 느낌의 인테리어는? 가게 앞에 애니메트로닉스를 전시하고 프레디의 피자가게라고 간판명을 걸어도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을 비주얼이었다.


비정상회담에서 나오는 인도인 패널 럭키를 닮은 종업원이 해맑은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왠지 그날따라 화끈한 것을 먹고 싶어 오리 갈릭 치킨 맛살라과 난을 주문한 내게 그는 나의 이름을 물어봤는데 한순간 고민에 빠졌다. 이름으로 말할까? 성으로 말할까? 제대로 말하지 못할 것 같은데?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내 세례명인 '마티아'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답해주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답, pardon? 군대에 있느라 혀까지 퇴화되었나 생각하고 일부러 혀를 굴려서 다시 말해주었지만 모르는 눈치는 매한가지다. 하,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혹시나 하고 풀네임인 '마티아스'라는 이름으로 답변하였다. 그러자 oh, mattias!라고 하며 계산서에 이름은 적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마티아스의 현지명인 마트베이(матвей)도 쓰이고, 모탸(мотя)도 잘만 쓰이는데, 이 양반은 왜 모르지? 혹시 이에 대해 아시는 분이 계신다면 답변 부탁드린다.


갈릭 칠리 맛살라와 난

주문한 지 40분 만에 받은 갈릭 칠리 맛살라와 난. 오래간만에 먹는 인도 요리라서 기대했지만, 솔직히 외관 때문에 김이 샜다. 모양만 봐서는 곤죽이 되어 치아가 부실한 노인들이 먹는 식사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이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침이 꼴깍 삼켜질 정도로 기가 막힌 요리였다! 풍부한 스파이스와 얼얼한 마늘의 느낌이 환상을 이루며 계속해서 난을 손에 꼭 잡게 만들게 한다. 솔직히 난은 어느 정도 빈약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으나, 그래도 괜찮다. 먹은 지 1년 반이 지난 음식 사진을 보면서 식욕이 느껴진다면, 그건 분명 객관적으로 맛있는 음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The Bowmore House Deluxe Blend secert blend of 7 whiskies

밥을 먹고 나와보니 숙소 미니바에 놓여 있는 작은 바틀이 눈에 띄었다. 7가지의 아일라 위스키는 블렌딩해 만든(며느리도 몰라요!) 보모어 B&B표 특제 위스키라는 것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 자리에서 돈을 지불하고 방으로 돌아와 식후주로 한 잔 시음하였다.


오, 이거 상당히 마음에 든다. 계면활성제와 쉐리, 그것도 올드 뉘앙스가 약간 있는 것으로 보아 우선 확실히 보모어를 썼다고 확신이 들었다. 중간으로 갈수록 피톤치드, 솜사탕과 함께 메디셔널 한 느낌이 뒷받침해주고, 피니쉬에서 담뱃재와 꿀향, 유제품의 느낌이 살짝 느껴졌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와 지인과 함께 맛을 봤는데 보모어 외에도 쿨일라, 라프로익, 부나하벤, 아드벡을 쓰지 않을까 추측하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2개는 무엇일까? 혹시 포트 앨런 같이 내 돈 주고 맛보기 힘든 원액들도 섞여있진 않을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달짝지근하고(LIGHT SWEET) 아늑하게 피트감이 느껴지는(SNUGLY PEATY) 이 위스키는 자기 집을 방문해 준 손님들을 위해 준비해 주었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느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처럼 이 술 속에서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이대로는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방문을 박차고 해안가로 나왔다.


주락이월드 <아드벡> 편 / 14F 일사에프

주락이월드 <아드벡> 편을 보면 조승원 기자가 아드벡 19년 숙성 트라이반 배치 4와 아드벡 증류소 레스토랑 셰프가 직접 만든 김치를 페어링 하여 먹은 장면이 나온다. 아드벡의 강렬한 피트와 김치의 매운맛이 폭풍처럼 입안에서 휘몰아쳐, 마치 태풍과 태풍이 만나 충돌하는 느낌이라고 하였다.


싸지방에서 주락이월드를 보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도 저기 가서 아드벡에 김치를 안주 삼아 먹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웬걸, 막상 아드벡 레스토랑을 가보니 김치는 따로 있지 않은 것이다! 혹시나 하고 있는지 물어봤지만, 증류소에 많은 한국인들이 와서 물어봤지만 지금은 김치가 없다는 말만 전달받았다. 뭐, 만일을 대비해 호국훈련 때 받은 볶음김치를 들고 왔으니 아쉬운 대로 마지막 날에 여정을 마무리하며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나였다.


하지만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 이 술과 함께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확신감이 들었다. 여자친구와 만날 때도 유사한 감정이 들었다. 분명 이 순간 이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내 순간에 누구와 함께 하는 순간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찰나의 순간 내려졌었다. 이것은 랑데부다. 어떠한 객체가 서로 만나 순간적인 시너지를 폭발시키는 것. 내가 그토록 아껴왔던 볶음김치를 생각지도 못한 위스키에게 내어주는 것, 처음 식사자리에서 만나 교분을 맺게 되는 것. 이 모든 것은 우연을 빙자한 필연일 것이다.

그래서 술잔과 위스키, 그리고 볶음김치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위스키와 볶음김치

그렇게 숙소 앞 해안가에서 나온 나는 볶음김치가 들어있는 캔을 딴 다음, 유리병 속에 들어있는 위스키를 잔에다 따랐다. 바깥에 바닷바람이 매우 매서웠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신속하게도 정확히 처리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차려진 나만의 술상. 이끼 덮인 돌을 반상 삼아 술과 안주를 내어왔다. 이제는 맛보는 일만 남았다.


오오, 이것도 환상적인 궁합이다. 전투식량에서 3년 정도 묵은 것 같은 질감과 쿰쿰한 맛을 지니고 있는 볶음김치가 위스키의 부드럽고 약간의 톡 쏘는 듯한(피트 때문에) 느낌과 잘 어우러졌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내가 먹었을 때의 기억은 위스키와 김치가 아니라, 백세주와 김치라고 느껴질 정도로 부드럽게 입안으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필자는 김치 한 점과 위스키 한 모금을 비워내며 그 여운을 계속해서 즐겨갔다.


조승원 기자는 아드벡과 김치의 궁합에 대해 태풍과 태풍이 만나 충돌하는 느낌이라는 평을 내렸다. 나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갔지만, 그와 동일한 감상을 즐기지는 못하였다. 나는 노인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인상이 선한 푸근한 백발의 두 노인이 만나 함께 장기도 두고 밥도 먹고, 동네 마실도 나가는 그런 느낌. 비록 강렬한 느낌의 아드벡이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보모어 B&B의 위스키로 바뀌고, 얼얼한 느낌의 쉐프표 김치에서 미원맛 강하게 나는 양반 볶음김치로 바뀌어도 문제는 없다. 설령 내게 그 자리에서 조 기자가 먹은 것과 동일한 제품들이 제공된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결코 즐길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겐 그의 맛이 있고, 나에겐 나의 맛이 있기 때문이다. 본디 행복한 순례자는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그 감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행복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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