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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모모 Apr 03. 2022

한 번만 돌아봐 주세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반갑지 않은 손님

아침 TV 프로그램에서 치매라는 질병에 대해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다가 문득 몇 년 전 스치듯 만난 고운 얼굴 선을 가지신 할머니 한 분이 생각났다.

 



코로나 19가 시작되기 전 어느 여름날 저녁, 남편과 나는 퇴근 후 신촌에 있는 현대백화점에서 만났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집으로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가는데, 마른 체형의 고운 인상이 눈에 띄는 할머니 한 분이 에스컬레이터가 내려가는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계셨다.


우리 부부는 혹시 할머니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무서워서 그러신가 해서 "어르신 손 잡아 드릴까요?"하고 여쭸더니 "지하철 타러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해요?"라고 답을 하신다.


"몇 호선 타시는데요?"

"아, 나 지하철 타야 해요."

"그러니까 몇 호선 타시는지 모르세요? 가시려는 동네가 어디세요?"

"지하철에서 내려서 바로 여기로 왔는데..."

"그럼 2호선 타시고 오셨나 보네요?"

"그래 맞아 2호선..."


70대로 보이는 할머니의 대답이 영 석연찮았다. 차를 백화점에 주차해 둔 상태였지만 일단 할머니를 지하철역까지는 모셔다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할머니의 느린 걸음에 맞춰 걸음을 걸으며 조심스레 몇 가지를 여쭤 보았다.


"할머니 사시는 동네가 어디세요?"

"그건 왜 물어요?  나 집에 알아서 갈 수 있어요."

우리를 살짝 경계하시는 것 같아서 빨리 다른 질문을 떠올려 보았다. 

"아 네.. 백화점에는 뭐 사러 나오신 거예요?"

"나 여기 자주 와요. 이것저것 둘러도 보고... 오늘은 아무것도 안 샀어요."


할머니 손에 들린 천으로 만든 작은 손가방이 보였다. 그냥 근처 사시는 할머니가 여름 더위를 피해 나들이하셨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백화점에서 지하철 입구까지는 느린 노인의 걸음으로는 꽤 걸리는 시간이었다. 천천히 함께 걸으며 가자니 갑자기 할머니가 물으신다.


"근데 나 알아요?"

"네?"

"날 어떻게 알아요?"

"아... 할머니, 저희 백화점에서 만났잖아요. 할머니 지하철 타는 거 봐 드리려고 같이 따라온 거예요"

"아.."


뭔가 이상했다. 그냥 깜빡깜빡하시는 정도의 질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집까지 모셔다 드리는 게 낫겠어. 우리 차로 모셔다 드릴까?"

"글쎄? 오히려 그러면 더 겁먹으실 거 같은데.. 지하철 타시는 거까지만 보자."


신촌 지하철역 입구에 도착해서 어느 방향의 지하철을 타시는지 여쭤 보니 망설임 없이 신촌에서 홍대입구 방향으로 가는 쪽으로 들어가신다. 나와 남편도 할머니를 따라 지하철 승강장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할머니가 가시는 곳이 어딘지 알고 가시는 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할머니 지하철 타시면 어디서 내리는지 아세요?  어느 역에서 내리세요?"

할머니는 옅은 주름이 잡힌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답하신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아요?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헉... 아무래도 할머니가 건망증을 넘어선 치매 증상인 것 같았다.

나와 남편은 잠시 의논을 했다. 할머니를 안전하게 댁으로 모셔다 드리는 일이 우리 두 사람만으로는 쉽지 않은 것 같아서 남편이 지하철 직원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고 나는 도와줄 분들이 올 때까지 할머니를 붙잡고 있기로 했다. 승강장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할머니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할머니 저녁은 드셨어요?"

(방긋 웃으시며) "먹었어요. 근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나를 어떻게 알아요?"

"할머니 좀 전에 현대백화점에서 만났어요."

"아 그래요.."


얼굴도 고우신 할머니가 어쩌다 이런 병이 걸리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할머니, 혹시 핸드폰 있으세요? 있으시면 자녀분과 통화 한번 해보면 좋을 거 같아요"라고 하자 이내 어두워진 얼굴로 답하신다.

"그건 왜요? 우리 아이들이 나한테 잘해 줘요."

"네.. 그러니까요.. 제가 자녀분과 잠깐 통화 좀 해볼게요."


그렇게 말하는 즈음, 다음 지하철이 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할머니가 일어나서 성급히 가시려고 했다. 자녀와 관련된 내 질문이 불편하셨나 보다 싶었다. 일어나는 할머니 손을 붙잡았다.

"할머니 저랑 좀 더 얘기해요."

그러자 방금 전 불편했던 마음을 잊으신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앉으신다.

"우리 어디서 봤더라?"

"현대백화점에서요."

"그래요?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아요?"


무한 반복되는 질문과 대답, 그리고 지하철을 타려는 할머니를 붙잡는 내 모습이 이상해서인지 몇몇 분들이 할머니와 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지하철 직원 한분과 경찰 두 분과 함께 왔다. 혹시나 할머니가 내 손을 뿌리치고 지하철을 타려고 하시면 어떻게 하나 싶은 불안함과 할머니와 나를 향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나 불편해서인지 남편의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도착한 경찰분들께 백화점에서 만난 상황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설명했다. 경찰관 중 한 분이 할머니께 다가가자 할머니의 얼굴이 긴장과 두려움으로 경직되어갔다. 댁이 어디신지, 같이 사는 가족이 있는지, 연락되는 자녀분이 있는지.. 할머니는 어떤 질문에도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시고 땅만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는 계속 "내가 알아서 집에 갈 수 있어요."라고 하셨다.


할머니의 손가방에서 신분증을 확인한 경찰이 우리에게 '이제 가셔도 됩니다'라고 했다. 경찰분들에게 할머니를 부탁했음에도 왠지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그분들은 이런 일을 자주 겪으셔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바쁠 때 우리의 도움 요청이 마뜩지 않은 것인지, 할머니에게 건네는 말투가 그다지 친절하게 않다고 느낀 데다 방금 전까지도 보여주셨던 할머니의 온화한 미소가 사라지고 안절부절못하시며 불안해하시는 모습의 할머니가 너무나 마음에 쓰였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더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음을 느끼고 경찰분들께 수고하시라는 말씀을 건네고 할머니에게 "할머니 조심히 들어가세요."라고 전한 뒤 지하철 역을 빠져나와 다시 백화점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왠지 맘이 불편하네. 경찰관분들이 조금만 더 친절하게 얘기해 주면 좋으련만. 할머니가 겁을 잔뜩 먹으신 거 같아. 집이 어딘지만 알려 주시거나 자녀 중 한 명과 통화만 되었어도 우리가 모셔다 드릴 수 있었는데..."

"아냐, 우리가 할 최선을 다했어. 경찰분들이 잘 모셔다 드리겠지."

"할머니가 참 고우시던데.. 자녀들은 얼마나 마음을 졸일까?.. 저렇게 집도 못 찾으시면서 자꾸 집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될 텐데..". 




할머니를 만난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그 할머니 생각이 났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셨는지. 잘 지내시는지. 또 길을 잃고 헤매지는 않으시는지.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할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그때 그 할머니 있잖아. 현대백화점에서 만난.."

"응.. 왜?"

"나 오늘 그 할머니 봤어."

"그래? 어디서?"

"우리 회사 앞에서.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시더라고... 얼굴이 딱 그 할머니더라고. 잘 차려입고 가시던데.."

"그래? 자기 회사 앞이면.. 대흥역인데.. 거긴 2호선이 아니라 6호선이잖아.."

"그러게.. "

"그 동네에 사시는 건가?"

"글쎄.."

"에구.. 또 어디 가셔서 집 못 찾으시는 건 아닌가?"

"못 찾으시더라도 우리처럼 누군가가 또 도와드리겠지..."

"그러게.. 이제 밖에서 두리번두리번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면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겠어. 그런데 그거 잠깐 도와드리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긴 하더라..."

"그렇지?  다행히 우리가 시간이 되니 도와드렸지 바쁜 걸음 가다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어..."

"그건 그래..."

"아무튼.. 할머니가 잘 지내고 계셨던 것 같아서 반갑긴 하네..."

"그러게..."


그날, 바쁜 걸음 잠시 멈추고 손 내밀어 도울 수 있었음이 감사했다. 앞으로도 우리의 작은 용기로 어려움에 처한 약자를 도울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자고 착한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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