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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븐 킹 Feb 16. 2021

친구가 한 말


  내게는 아주 친한 친구가 있다. 초·중학교를 함께 다녔던 고향 친구인데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그 친구와 함께라면 꿋꿋하게 헤쳐 나간다. 별거 아닌 것에 깔깔대고 웃으며 책을 읽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등산을 같이하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친구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그 친구 이웃 동네에 살던 또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와 친한 사이였기에 나까지 그녀들과 친하게 되었다. 물론 세 친구 모두 고향 친구이긴 하지만 그녀의 친구인 조○○와 나는 썩 친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그녀와 한 반이었던 적이 많았지만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은 옆으로 째지고 늘 그늘이 드리운 인상이라 내가 좋아하지 않았다. 공부는 제법 잘해서 나보다 한 수 위였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살아가는 그녀의 가정환경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다 고집이 세고 말 수도 없어 깔깔대던 나와는 정 반대라서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친구 사이였다. 그런 나와 그녀 사이에 가까워진 계기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절친인 친구 때문이었다. 남편과 여행사를 크게 운영하다가 IMF 때 망해 서울로 야반도주하여 힘들게 살았던 친구는 남편마저 암으로 하늘나라에 보내고 어린 아들 둘을 혼자 힘으로 키우고 있었다. 친한 친구를 위해 난 작은 것이라도 자주 나누었다. 마침 그 친구와 친했던 조○○도 친구를 위해 김치를 담가 택배로 보내 주거나 학교에서 비누 만들기 하고 나면 자투리 비누 등도 보내주면서 그 친구를 위해 온 마음을 써줬다고 하였다. 그녀의 행동을 친구한테 들으면서 감동을 받아 나는 그 조○○를 새롭게 보게 되었다. 동창회 사이트에서 보는 그녀 모습도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검은 피부지만 탱탱하고 주름살 하나 보이지 않고 밝게 웃는 예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 후로 그녀와 잦은 만남을 갖게 되었고 어느새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도와주는 세 친구가 되었다.


  “야, 나는 너 학교 다닐 때 맘에 안 들었어.”

  왜냐고 묻는 조○○에게

  “니 인상이 지랄 같아서 ……”

라고 까르르 웃으면서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난 우리 아들 대학교만 가면 남편하고 안 살 거야.”

하는 조○○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내가 전남 섬에서 애 둘을 키우며 학교 선생 하느라 고생하는데 하나도 도와주지 않고 또 교사 그만둔다니까 이혼 하자는 거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글쎄 그 인간은 내가 교사 안 하면 살지 않겠다는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 결심했지.”

  내가 그 소리를 들을 때면

  ‘설마 …… 그러겠냐?’

  하지만 조○○의 주선으로 우리 가족이 영암 월출산에 등산을 갔다가 그녀의 가족을 만나고 나서 그의 남편을 단편적으로나마 알게 되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조○○가 재직하던 학교의 교감 선생님 소개로 고등학교 교사인 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기만 아는 남자라고 했다. 섬에서 아이 둘을 혼자 키우며 교사 생활하기가 너무 힘들어 결국 사표를 냈을 때 이혼하자고 했다 한다. 다시 광주 임용고시를 볼 때까지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와 자주 전화로 수다를 떨다 내가 좋아하는 WBC 야구를 보고 있을 때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저녁때가 되어 우리 남편이 삼겹살을 구워 식탁에 차려놓고 먹으라고 재촉한다는 소릴 친구에게 했더니 그 소리를 그녀 남편에게 했던가 보다. 월출산행 후 음식점에서 그녀의 남편은 우리 남편을 만나 초면에도 불구하고

  “아니, 왜, 아내 야구 보게 하고 삼겹살을 구워 줬어요?  문제가 다 그 집에서 나온다니까.”

  따지듯 묻는 그 집 남편 말에 우리 남편은

  “아내가 좋아하니까요. 나도 야구 보는 거 좋아하지만.”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데 묘하게 기분이 나쁘더라고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남편이 그렇게 말했다. 친구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남자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월이 흘러 그녀의 딸은 자기 뒤를 이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아들이 막 대학에 입학을 하던 해였다. 바쁘게 살다 보니 소식이 뜸한 때이기도 했다. 동창회에서 부고가 날아들었다.

  <조○○ 사망>

어디에 있는 장례식장, 발인 날짜 등이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난 그 부고를

  <조○○ 모친 사망>

인데 모친이 빠졌다고 확신했다. 팔순 노모가 요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하더니 돌아가셨나 보다고 생각하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옆 직원이 받으며 그 부고 소식에 친구가 쓰러져서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 귀에 전화기를 대 달라고 하면서

  “야, 왜 그래?  그 친구 엄마가 돌아가셨잖아.”

  당연한 사실을 왜 왜곡하였는지 오히려 내 쪽에서 어이없어하며 친구를 나무랐다. 그때서야 친구는 정신을 차리고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부고를 보낸 친구에게 전화로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나도 까무러칠 뻔했다. 엄마가 아니라 그 친구가 정말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제야 겨울 방학을 맞은 친구가 오래전부터 갱년기 우울증에 시달렸고 아들이 기대치만큼 안 따라줘서 실망했으며 허약한 체질로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모든 음식을 거부하다가 결국 자살을 택했다는 것이다.

  저녁 9시만 넘으면 그녀의 휴대폰은 늘

  “전원이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였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카리나 동호인 모임에서 분홍과 검정이 곁들인 원피스를 입고 화사하게 웃던 사진들을 내게 보여주며 자랑하던 조○○는 상반신에 검은 띠를 두르고 영정 사진으로 돌아와 장례식장에서 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왜?  왜? ……, 말이 씨가 된다더니…… 네 아들 대학 들어가면 남편과 안 살겠다더니, 정말 그리 되었구나. 너의 소원대로 이루어졌구나. 그런데 이혼하면 되지. 이건 아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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