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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븐 킹 Mar 31. 2021

고향사람들 2

내가 어렸을 때 고향 사람 중에 택호가 심 0 댁인 집에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이 재0이다. 그를 동네 사람들은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주먹손'이라고 불렀다. 요즘 같으면 장애인 비하라고 고소감인데 그 시절에는 별로 개의치 않고 그리 불렀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하고 벌 받을 일이다.


심 0 댁은 큰부인 작은부인이 있어 한 마을에 살았다. 난 어려서 기억을 잘 못하는데 언니 말에 의하면 첫째 부인의 행동거지가 못나서 둘째 부인을 들였다고 했다. 결국 윗동네는 큰부인이 딸과 아들 하나를 낳고 살았다. 아랫동네에는 둘째 부인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여러 명의 자식들과 남편이 사는 형국이었다.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로 인해 큰부인이 소박 맞고 쫓겨난 경우란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큰부인과도 사이가 좋았던지 가끔 그 집에 가서 살림을 보살펴주기도 했고 아이들도 보살펴주기도 했다. 큰부인의 집에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뭔가 부족한 지금으로 말하면 자폐아에 해당했다. 말을 어눌하게 하고 행동도 이상해서 동네에서는 놀림을 당했다. 내가 그녀와 말을 섞거나 놀기라도 하면 우리 형제들은 나를 괴물 대하듯 하고 놀렸다. 나는 어쩌다 그녀와 놀다 보니 그리했는데 그것을 빌미로 나를 몰아붙이는 언니나 남동생이 참 미웠다.

그 여자아이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똘똘하여 그 누나를 따라다니며 놀고 가끔 그녀의 보디가드 역할을 해주었다. 어느 날, 그녀는 동네 빨래터에서 자기를 따라다니는 남동생을 떠밀어 물에 빠뜨려 죽여버렸다. 온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그녀가 정상이 아닌 관계로 곧 잊고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도시의 어느 집으로 식모살이를 떠났다.

곡전재의 마루와 등잔


작은부인에게는 여럿의 자식이 있었는데 나보다 한참 위의 나이인 오빠가 바로 재 0이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가 자는 아이를 눕혀놓고 잠깐 마실을 간 사이에 깨어나 울다가 호롱 불을 발로 찼다고 한다. 이불에 불이 붙고 아이가 반쯤 불에 타서 화상을 입었단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전기가 들어왔으니까 그전에는 기름을 담은 작은 사기그릇에 심지를 심어 밝힌 호롱 불이 밤을 밝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그 후에 남폿불이 등장했다.

귀와 머리 부분이 문드러져 머리카락도 나지 않았고 오른손의 손가락도 모두 문드러져 손가락 자체가 없어져 주먹만 남은 아주 불행한 경우이다. 그 사람의 인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 편이 아려오고 먹먹해져 온다.

하지만 성격은 좋아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 놀 때 그는 우리의 선배로 제법 잘 놀아줬다. 다른 쪽의 머리카락을 넘겨 화상을 입은 곳의 머리를 가렸지만 바람이 불거나 뛰어 숨바꼭질이라도 할라치면 미끈하게 반질거리는 머리가 다 보였다. 쥐불놀이 깡통도 주먹손을 이용하여 잘 만들어줬다.

그는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며 지냈다. 그가 학교에 다녔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런 그가 결혼할 때가 되어 동네 사람이 중매를 섰다. 광주에 사는 처녀인데 등에 혹이 난 키가 작은 곱사 여인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척추 장애라고 한다. 가끔 그녀가 빨간 삐딱 구두(뾰족구두의 전라도 방언)를 신고 또각이며 동네에 들어서던 모습이 생각난다. 다행인 것은 둘이 죽이 잘 맞아 결혼식을 치르고 광주 시내로 분가해서 나갔다.


그 뒤로 소식은 잘 모른다. 나도 그 동네를 떠나 결혼을 하고 살았으니.

가끔 정월 보름날이 되면 재 0 오빠랑 동네 어귀에서 쥐불놀이와 자치기, 연날리기하던 생각이 난다. 지금쯤 손자, 손녀 보고 잘 살고 있으리라 예상해 볼 뿐이다.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운조루 고택


내 고향에는 집성촌으로 형성된 100 가구 넘는 마을이라고 일전에 말했었다. 그러니 많은 사연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고샅에 나와 같은 종씨인 ○철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아마 먼 친척 뻘인데 그의 형제는 아들만 셋으로 기억한다. 우리 큰언니보다도 더 위였으니까 아마 나보다는 근 20년 이상의 연상이었을 것이다. 그의 형은 장가를 가서 아들, 딸 낳고 서울로 이사를 갔고 그의 동생은 서울에서 직장에 다닌 것으로 안다. 그이만 농촌에서 총각으로 지냈다. 하지만 풍채가 좋고 인물도 좋아 누군가 중매를 섰거나 연애를 해서 한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키가 작은 편이지만 도시풍으로 피부는 하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아주 미인이었다. 시골집에 신혼을 차렸지만 예쁜 것을 좋아하는지 시집올 때 가져온 그녀의 물건은 좀 독특하고 예뻤다. 가끔 큰언니를 따라 그 집에 마실을 가면 뭐든 다 좋아 보였다. 그녀가 첫아이를 낳아 분유를 먹일 때도 무척 신기했다. 보통 그 시절은 분유 자체를 몰랐다. 또 알았다 해도 시골 살림에 분유는 언감생심이었다. 캐노피를 달고 나무로 잘 짜인 아기 침대는 너무나 멋있었다. 시골 아이인 내 눈에 참 신기하고 예뻤다. 레이스가 주절주절 달린 캐노피 아래에 누우면 나도 예쁜 꿈을 꾸고 꿈나라로 갈 것만 같았다. 그것이 캐노피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내가 어린이집을 운영할 때였으니 한참 어른이 되고 나서다. 그때는 막연하게 모기장 정도로 알고 신기해하였다. 아들 이름은 ◇금인데 그녀의 지극 정성으로 잘 자랐다. 골목길에서 마주치면 우리도 그 아이를 무척 귀여워해 주었다.

캐노피


○철이 오빠는 농사일을 열심히 하는 편이 아니었다. 주로 술을 먹고 흥청망청 또 마을 회관에서 화투나 치고 인생을 허비하는 인간이었다. 그의 아내와 다툼이 잦았다. 그 문제로 인해.

사람의 습성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법. 그가 아무리 예쁘고 부지런한 아내를 얻었다 해도 도로아미타불이었다.

그녀의 끈질긴 잔소리에 조금 고쳐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기 일쑤였다. 아마 ◇금의 분유도 어쩜 미혼일 때 모아서 가져온 지참금으로 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논밭에 데려가서 바구니에 앉혀놓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그 벌이는 시원찮았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으니.

그런 그녀가 다시 임신을 하여 두 번째도 아들을 낳았다.



작은 아이의 이름은 ◇각이다. 그 아이가 6개월쯤 되었을 때 급하게 우리 아버지가 부름을 받아 병원에 가셨다. 택시에 눈이 뒤집힌 그녀를 태우고.

나는 어려서 잘 모르지만 아이 먹을 분유를 잔뜩 사놓고 그녀는 농약을 마셨다고 했다. 병원에서 위세척을 했지만 독한 농약은 그녀의 장기를 모두 녹아내리게 했다고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혀를 끌끌 차셨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천성이 게으른 남편으로 살 일이 막막해서 저지른 일이었다. 또 내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아보니 그즈음 산후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그 어린아이들을 두고 떠나가려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던가 보다. 작은아이 먹일 분유를 그리 많이 사놓고 간 것을 보니.

그 후로 작은아이인 ◇각이가 또박또박 걸어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어미 소를 바라보던 모습은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TV에서 보는 북한 아이처럼 비쩍 마른 모습으로.

그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게 남아있는 것은 어린 내 마음에도 녀석이 그리 불쌍할 수가 없었다. 엄마 없이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자라는 것이 안타까워서.


○철이 오빠는 몇 년 후에 새 장가를 갔다. 인물은 첫 부인만 못했고 약간 게을러 보였으나 말이 없는 편의 여인이었다. 그나마 두 아이를 건사하는 것이 기특해 보였다. 그 뒤로는 고향을 떠나 ○철이 오빠 가족은 그의 형이 사는 서울로 이사를 갔다.

그 후, 바람결에도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다. 나도 결혼을 하여 고향을 등졌기에. ◇금, ◇각 형제가 새엄마 밑에서 잘 자랐을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들이 건강하게 잘 컸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쯤 어디에선가 그들도 나처럼 늙어가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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