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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븐 킹 Mar 19. 2021

고향 사람

갑자기 이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소설로 써 보고 싶다는 생각에 어제 남편과 산책하며 이 말 저 말을 하다 생각이 난 이야기다.

참고로 나는 소설을 쓸 깜냥은 못 된다. 겨우 짧은 글이나 쓰고 있는 주제라서.

지금부터 쓰는 글은 내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고 또 비실명 처리를 할 것인데 혹 글 속 인물이라 여겨지는 끄나풀이 있다면 널리 양해를 바란다. 순전히 나는 내 어릴 적 기억으로만 써 나갈 뿐임을 명시한다.


내가 자란 60~70년대 고향 마을은 참 지지리도 못 살았다. 하긴 그 시절을 논하자면 도시를 제외하고 거의 비슷할지도 모른다. 새마을운동으로 차츰 나아지기는 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거의 유교사상으로 똘똘 뭉쳐져 남아선호 사상이 단단하고 약간은 양반 행세를 하고 싶어 하며 가부장적이고 권위의식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보통 그 시절에는 작은부인을 두는 집이 있다. 즉 본처가 아들을 못 낳으면 후처를 들여 한 집에 두 부인이 있는 경우도 있다. 우리 집도 어머니가 내리 딸만 넷을 낳아 후처를 들이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나마 내 밑으로 남동생을 낳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마을은 주로 집성촌인데 김 씨. 고 씨, 현 씨가 주를 이루었다. 물론 타 성씨가 살기도 했지만 물 맑고 대나무로 유명한 고장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대략적인 마을에 대한 정보를 말한 것이다.


우리 아랫집은 당숙이 사셨는데 키가 몹시 작고 못생기신 분이었다. 보통 시집오기 전 아내가 살았던 마을 이름으로 택호를 정하는데 그분은 성메 양반이다. 그분에게 딸이 있었는지 기억에 없고 아마 있었다 해도 시집을 갔으니까 모른다. 어쨌거나 아들이 둘이 있었다. 당숙모도 이미 돌아가셨는지 내 기억에 없다. 큰아들은 고 작은 아들은 만다. 가난했으니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을 리는 없다. 아마 보냈다 해도 그 시절 국민학교 정도일 것이다. 내 기억으로 큰아들인 오빠는 나보다 서너 살 어린 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분의 결혼식은 기억에 없다.     


한 번은 그 집 딸과 봄나물을 캐러 들에 갔다. 나는 대바구니를 들고나갔는데 그 아이는 그즈음 유행하는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나물을 캐다 말고 심심한 나는 칼로 대바구니를 쿡쿡 찔렀다. 그러면 대와 대 사이로 칼이 비켜 나간다. 대 사이로 삐져나가서 바구니에 그다지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 아이 바구니도 칼로 찔러보았다. 사실 플라스틱의 속성을 알았더라면 안 했을 행동인데 나는 처음 접해서 몰랐던 것이다. 재미있어서 몇 번 더 찔렀더니 칼에 촘촘하던 구멍이 커졌다. 재미가 있었다. 그러고 난 후에 까맣게 잊고 집에 왔는데

  "당숙, 애기씨가 바구리 다 망가뜨렸어요. 이게 뭐시 당가요?"

하고 길길이 날뛰며 부인인 올케가 우리 집 마당으로 쳐들어왔다.

그날 나는 아버지한테 지게 작대기로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 나중에 보니 온몸에 퍼렇다 못해 빨갛게 피멍이 들었다.

  "안 할께라우."

수십 번을 외쳐도 매는 멎지 않았고 그것을 쳐다보고 말려주지 않던 어머니가 그리 인정머리 없어 아마 그때부터 엄마에게 정이 떨어졌을 것이다.

언젠가 신창원이 탈옥을 하고 자기 아버지 탓을 하며 자식을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는 말을 언론에서 할 때 격한 공감을 한 적이 있다. 비록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자라 하더라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나마 이 정도로 잘 큰 것은 남자가 아니어서이고 또 내 성품이 그나마 착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아마 내가 남자아이였다면 신창원이 됐을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다른 길로 샜다. 아무튼.

절구통

오빠의 부인은 미모가 좋고 머리도 좋았다. 성깔은 사나워서 자주 시아버지와 다투었다. 우리 집 담 너머로 그녀의 대드는 소리가 카랑카랑 넘어오기 일쑤다. 그녀에게는 영, 경라는 딸이 둘이 있는데 그녀는 어느 날 아이들과 남편, 시아버지를 두고 집을 나갔다. 친정이 광주라고 들었는데 오빠가 찾아가 마누라 내놓으라고 해도 소식을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더란다. 결국 는 두 딸을 키우며 아버지까지 모셨는데 동네 사람이 다른 순한 여자 하나를 붙여주었다. 즉 영에게 새엄마가 들어온 것이다. 호적 정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새엄마는 인물이 좋지는 않았지만 얌전해서 전처의 자식을 잘 거둬들이고 살았다. 우리 집 대소사에도 와서 거들었다. 그렇게 얼마를 살았다. 세월이 흘러 당숙 어른이 돌아가시고 그 소식을 들은 전처가 어느 날 찾아와서 후처인 영 새엄마를 내쫓았다. 아마  오빠가 첫 부인에 대한 사랑이 남았던지 아니면 워낙 야무진 첫째 부인이 홀렸는지 모르지만 결국 작은부인은 쫓겨났다. 그들은 동네 부끄럽다며 광주로 이사를 갔다.

그 뒤로 소식은 잘 모른다. 바람결에 들려올 뿐이다. 뭐~ 아들까지 하나 낳고 잘 산다더라였다.

참,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 둘째 부인의 인생은 뭐란 말인가? 우유부단하고 똑똑하지 못한  오빠가 잘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내 기억으로는 둘째 부인의 인생이 가련하다 싶다.

 



당숙의 둘째 아들인 6촌 만 오빠 이야기다.

농촌에서 장가를 가야 하는데 직업은 농사꾼이요, 외모가 수려한 것도 아니고 배움이 많은 것도 아니라서 재 너머 여인을 중매로 만났다. 그 시절에는 대부분 그렇게 결혼을 했다.

그녀는 아주 젊은 나이에 우리 동네 만 오빠에게 시집을 온 것이다. 그녀의 친정은 산 너머이니 우리 동네보다 더 가난한 동네일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녀의 남동생들이 시집온 누나 집에 가끔 묵어가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친정붙이 들이 살림 거덜 낸다고. 그들이 와서 며칠 놀고먹어봐야 얼마나 한다고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 시절은 한 식구 입을 더는 것이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는 처지라 이해를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녀는 눈 쌍꺼풀도 있고 올망졸망하게 생긴 얼굴이라 그런대로 귀여운 상이다. 술을 좋아하여 농사일을 하다가 막걸리를 사발째 마시기를 좋아했다. 얼굴이 벌겋게 되어 눈웃음이라도 치면 옆에 보고 있는 사람까지 기분이 싹 좋아졌다.

그 오빠에게 우리 밭을 부쳐먹게 한 결과로 우리 집은 그 들의 일손을 한 번씩 빌려 쓸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 막걸리에 흥이 나서 노래도 부르며 즐겁게 일을 했다.

"애기씨, 이리 와서 잡아주랑께."

하며 애교도 부렸다. 그런 그녀가 아들을 낳았는데 우리도 엄청 귀여워해 줬다. 다시 둘째를 임신하여 산달이 되어 광주 시내로 아기를 낳으러 택시 타러 가다가 길가에 낳아버려 그녀의 둘째 아들은 길○가 되었다.

알콩달콩 아들 둘을 키우며 열심히 살았다. 문제라면 그녀의 술버릇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부부 사이가 나빠 보이지 않았는데 술로 흥청망청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웠다.


세월이 흘러 나는 학교를 다 마치고 고향을 떠나 직장 생활을 하다 잠깐씩 다시 갔을 때는 그녀의 얼굴이 많이 부어있었다. 예전의 예쁜 얼굴은 어디 가고 둥그런 달덩이 하나가 있어 어머니께 여쭈어보니 술을 많이 먹어 간경화가 왔다고 했다.

간간이 고향에 가면 그녀와 오빠를 만날 수 있었지만 나 역시 결혼을 하고 바쁘게 사느라 찾아보지 않아서 몰랐다. 어느 날에 그녀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젊은 나이에 남편과 아들 둘을 남겨놓고 갔으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들려오는 소식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 길에서 낳은 아들놈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는 일을 하다 사고가 나서 하반신을 쓸 수 없는 장애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런 아들을 돌보던 만오빠는 어느 날 술이 취해 저수지로 훠이훠이 들어가 인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가슴 아픈지 모른다. 그 오빠에 대한 기억은 '사람 참 좋다.'이다. 골목길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한다. 다른 친척 오빠들은 우리를 괴롭히거나 농담으로 곤욕을 치르게 하지만 그 오빠는 항상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 주는 몇 안 되는 오빠 중의 하나였는데.


사랑하는 마누라 잃고 아들마저 불구가 되니 살아가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아마 오빠는 하늘나라에 가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행복할지 모르지만 남은 아들은 어찌하라고 그런 것인지. 그의 무책임에 화가 나다가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싶다. 그의 형인  오빠는 부인 덕에 광주로 가서 잘 산다던데. 그는 이 세상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으면 스스로 걸어 저수지로 향했을까?

아마 그는 저수지 가장 깊은 곳에서 내가 불러 따라갔을 뿐일지도 모른다. 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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