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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브 Feb 07. 2022

우리 모두는 가엾은 리어왕의 저주를 타고났다

셰익스피어 '리어왕'

셰익스피어는 어째서 리어왕을 이토록 극단적인 심성의 소유자로 표현했을까?



‘가난하고, 물러설 곳 없고, 병들고 멸시받는 이 늙은 사람 나.’

3막 2장부터 절규하는 리어왕의 모습은, 권력자도, 국왕도 아니라 그저 비애에 휩싸인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비, 바람, 번개, 천둥, 너희 그 누구도 내 딸이 아니다. 너희 (자연의) 원소들이여, 나는 너희들이 타락했다고 비난하지 않겠다.’


동시에 딸들을 저주하는 과격한 표현, 왕족의 품격과 교양에 뒤떨어지기까지 하는 리어왕의 숨겨진 광기로부터 누구나 지닌 원초적 비애와 슬픔을 엿볼 수 있다.

타인에게 배신당하는 것과 가족에게 배신당하는 것은 그 상처의 결이 너무도 다르다. 한평생 믿고 살던 나의 편에게만은 기대가 큰 것이다. 등장인물 리어를 군주(=자신에게 감히 대항하는 이 하나 없는 존재)로, 그리고 그 세 딸(코델리아는 일차적으로 '말'로써, 두 딸은 행동으로서 배신을 행했다)을 등장시킨 것은 그러한 마음이 어느 누구에게나 다름없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 테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공허함에 머릿속이 새하얘져 격하게 내뱉어버린 원망. 그러나 죽을 만큼 원망하는 것 또한 사랑이 있기에 비롯될 수 있다. 그 절절한 비애와 초조함에 독자로서 역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는 광적이었고 딸들에게 단 몇마디로 유산을 배분해버린 즉흥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적어도 나에겐 안타까운 인물로 남는다.


'리어왕'은, 셰익스피어 극 중 유일하게 가족애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타 작품 역시 "가족애를 다루었다"고 볼 수 는 있지만, 극단적인 가문 전쟁과 근친상간은 공감대상이 아니었다). 막을 올리는 첫 질문부터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와 같은 원초적인 질문이었음에, 독자 개인의 경험까지 확장시켜 작품에 더욱이 이입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리어왕 역시, 여느 비극과 다름없이 후회와 한탄 속에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더더욱 와닿은 이유는 누구나 한 번쯤은 공감할 수 있을 '핏줄, 가족이란 존재'와 '원망'을 다루었다는 데 있다. 실제로 - 1막의 유산 담화가 있었던 이래로 - 리어왕의 담화 하나하나엔 원망이 깃들어있다. (e.g. 나는 너희에게 왕국을 내주지 않았고 너희들을 자식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너희는 내 앞에서 길 필요가 없다. 그러니 맘껏 퍼부어라 너희 참혹한 즐거움을…) 시대와 연령과 사회적 계층을 불문하고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은 가족애, 나아가 소속감. 그것이 리어왕이 4대 비극 중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가 아닐까.


필연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이란 삶에, 누구나 소중한 존재와 원망하는 존재가 생기곤 한다.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사람이 생기게 되었을 때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기도, 때로는 의도와 관계없이 소중했던 이로부터 내쳐지기도 한다. 나아가 언젠가는 분명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게 된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다 그렇다.


숨을 쉬고 주체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삶이지만, 그만큼 고통이라는 감정을 수반하게 되는 과정이다. 배신과 질투와 원망이라는 감정을 불가피하게 견뎌내야만 하는 우리 모두가 리어왕의 저주를 타고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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