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암 아버지의 <벌레 이야기>에 대한 고찰 - 용서와 자기 상실
알암 아버지의 <벌레이야기>에 대한 고찰 – 용서와 자기 상실을 중심으로
소설 <벌레이야기>는 실종된 알암과 그로부터 파생된 신앙심 앞에 절망하는 어머니 의 심리를 중점적으로 조명하고 있으나, 이례적이게도 남편, 즉 알암 아버지의 시선에 의해 전개된다. 단순한 전개와 알암 엄마의 심리묘사만을 기술하는 일이라면 저자로서의 제3자 서 술방식을 택했어도 되었을 터인데, 어떠한 의도로 독자들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알암 아버지 의 시선을 빌려준 것일까.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해석이나, 소설 내내 알암 아버지는 대체로 덤덤한 듯했는데, 후에 그가 아내와 아이의 희생을 겪고 나서 써내려간 이야기임을 인지하고 그것이 ‘감정의 무뎌짐’이 아닌 체념적 말투의 일환이었음을 깨달았다.
‘알암이에 뒤이은 또다른 희생자가 아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내의 희생에는 어떤 아픔이나 저주를 각오하고서라도 나의 증언이 있어야겠기 때문이다.’(p.103)
해당 대목에서 그의 서술은 분노와, 현실파악과 상황 객관화가 정립된 상태임을 살펴볼 수 있 다. 그는 당위적이게도 아내와 마찬가지로 자식의 유괴와 살해 사실에 좌절한다. 다만 ‘어느 무디고 잔인스런 아비가 그 자식의 애처로운 희생을 이런 식으로 머리에 되떠올리고 싶겠느 냐’며 납득되지 않은 사실들과 아내의 희생에 대한 ‘공론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감정을 표출하되 현실파악과 객관화를 신속히 이뤄낸 인물이었기에, 더욱이 한 순간이라 도 과격한 표현이 사용될 때면 상황의 심각성을 엄중히 인지하게 되기까지도 했다. 알암 엄마 의 광적인 신앙과 심리 변화가 서술자의 비장하고 일관된 문체와 대비됨으로써, 독자는 자연스레 아버지의 시선에 이입하게 된다.
“하지만 아아, 아내의 그 절망과 고통의 뿌리가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를 차마 짐작이나 했을 것인가. 아내는 결국 그러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었다.”(p.121)
전개 중 관찰 외에 감정을 어렵사리 드러내던 알암 아버지는, 가해자의 태도와 아내의 절망을 마주하고서야 탄식을 내뱉는다. 감정의 집약을 고스란히 느낌으로써 그의 무력감과 체념적 태 도에 동요할 수 있었다. 해당 소설을 ‘무력감에 대한 한 남편이자 아버지의 공론화 글’로서 간 주하니, 그의 주관이 드러난 문장의 뿌리와 형용사 하나에마저 집중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 이는 절망과 상실, 나아가 인간성의 통찰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의 본질적인 감정에 닿도록 유도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동정할 때 복잡 미묘한 안도감과, 스스로가 더 우월적 위치에 있다는 쾌감을 자연스레 느낀다. 알암 엄마의 시선으로 글이 전개되었다면 물론 그녀 의 내면을 보다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 자신의 고통과 절망이 곳곳에 묻어나는 감정 수기에 불과했을지 모르며, 독자들에게는 비극적 주인공을 향한 동정심 과 연민만이 강렬히 남았을 터다. 반면 관찰자 시점의, 사건의 자취를 ‘재정립’중인 아버지를 화자로 둠으로써, 독자는 마냥 동정하기보다 공감하여 자기 내면의 통찰에까지 이른다. 보편 적인 가족애, 용납되지 않는 가해자의 태도에 대한 분노와 황당함, 어머니로서 알암 엄마의 비탄 등,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 무수히 발견되는 작품이기에 가능한 일이 다. 쓰디쓴 불쾌함이 남는 이유 역시 스스로에게까지 공감되는 시선과 이야기인 탓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남편이자 아버지의 시선’임을 인지한 상태이기에, 설령 서술자가 아내의 태도와 감정에 대한 사족을 제멋대로 추가한다고 한들 독자 개개인의 상황과 판단에 따른 해석이 가능하다.
문학작품에서 나타나는 용서의 양상은 곧 소년만화와 반대되는 전개로 설명할 수 있 겠다. 소중한 사람을 해친 원수 – 일반적으로 작중 최고 강자 - 에게 복수하고자 점진적으로 능력을 키워내는 주인공을 조명하는 것이 소년만화의 전형적인 클리셰라면, 문학작품에서는 ‘복수’라는 지점까지 동일하나 그 이후부터 ‘용서’가 경이로운 깨달음의 경지로 묘사되곤 한다.
예로, 영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 중 손예진은 “용서는 마음속에 반 한 칸만 내주면 되는 거야”라는 대사를 남긴다. 남편에게 어릴 적 그를 버린 모친을 용서하라는 권유였던 셈이다. 영화답게 재회와 화합의 과정은 아름답게 그려지나, 이는 실은 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부분이다. 제멋대로 인간관계의 환상을 연출함으로써 감동은 불러일으키지만 그만큼 공감은 결여될 수밖에 없다. 문학작품에서의 용서가 아름다운 화합이라는 쾌감보다 감정 손실이라는 불편함을 남기는 요인으로도 볼 수 있겠다. 반면 <벌레이야기>는 두 가지 상반되는 양상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신선함과 공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알암 엄마가 신앙을 다짐하는 과정은 즉흥적이며, 그로 인한 여파는 인간 본질의 고찰로 이끌어 대놓고 불쾌함을 곱씹게 만 든다. 본격적으로 그녀가 신앙에 뛰어들기 시작한 ‘한데 아내는 그토록 심장이 절박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건 물론 아내가 지속적으로 신앙을 가지려는 결단의 표시는 아니었다’(p.105) 대목부터 ‘아니, 하느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중략) 그렇다면 하느님은 그놈과 한패 거리와 다를 게 뭐예요.’(p.107) 까지 전개에서 신앙에 대한 그녀의 성급함과 즉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긴박한 흐름 속에서 독자 또한 – 대뜸 신앙을 찾아댈 수밖에 없는 그녀의 상황에 상당히 공감한 상태이므로 -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가해 자의 초라한 낯짝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가 생기기도 한다. 이후 알암 엄마는 용서를 결심하는 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위안도, 무언의 기대에 대한 충족도, 경이로운 깨달 음도 못 되었다. 다만 ‘용서받아야 할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용서한 것’에 대한 황당 함과 기이함만이 남았을 뿐이다. 나아가 인간으로서 자기의지까지 부정당한 상황에서 독자는 문학작품에서 ‘용서’의 역할을 재 정의하게 된다.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 에겐 사람으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p.113)
알암 엄마가 교도소로 찾아가기 전 서술자의 독백이다. 사람만이 가야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 밖에 없는 일, 즉 인간으로서 주어진 최소한의 이성과 도의성에 대한 고찰능력은 우리를 어떠 한 고난에서든 딛고 일어서게 한다.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곧 자기의지를 지닌 인간임을 깨닫는 가치 있는 한 걸음 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반면 알암 엄마가 경험한 신성 앞에서의 무력함은, 인간으로서의 자의성을 철저히 부정당하게 했다.
‘비록 아이를 잃은 아비가 아니더라도 다 만 저열하고 무명한 인간의 이름으로 그녀의 아픔만은 함께 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p.121)
알암 아버지의 독백에서 또한 최소한 인간이라면, 얼마나 하찮고 광적이던 간에, 자기상실의 절망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는 처절한 분노가 드러난다. 궁극적으로 자살이라는 비극에까지 치 닫게 된 것은, ‘인간은 왜 원치 않아 태어나고 자의적인 삶을 끊임없이 지향하도록 요구받는가?’ 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이르게까지 만든다. 하이데거는 극한의 상황에서 죽음 앞으로 미 리 달려 나가봄으로써 자기 의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삶의 가치는 오직 고 통 앞에서만 드러나며 인간의 정신의 크기는 고통에 직면했을 때에야 가늠된다는 것이다. 알 암 엄마는 어떤가. 자식을 잃었다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서 온전히 고유의지로 벗어나기도 전에, 무려 가해자로부터 구원되었으면 한다는 진심어린 바람을 듣는다. 용서의 주체가 절대 적인 추상적 존재라는 사실에 맞닥뜨린 알암 엄마의 심리는 초라하게 그려지고 만다.
서술자인 아버지의 시선으로부터 1. 알암 엄마의 자기 상실과 자살, 2. 김 집사(=고통의 상황 마다 광적으로 구원과 용서만을 전도하는 이)의 존재, 3. 용납할 수 없는 가해자의 태도라는 세 가지 불쾌함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수많은 불쾌함의 <벌레>들을 엮어낸 이야기로서, 무력한 남편이자 아버지의 통탄으로서 <벌레이야기>라는 제목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