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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Feb 22. 2021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할 수는 없는 그들의 간격에 관하여.

해피 투게더


왕가위

왕가위는 1990년대에 활발하게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화의 영상미, 미장센을 논할 때, 빠짐없이 언급되는 감독이다. 1997년 개봉한 그의 여섯 번째 작품 <해피 투게더 (1997)>는 어쩌면 뻔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를, 두 남성이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더했다. 범주에서 보면 성소수자를 소재로 한 장르에 해당하는 영화이지만, 보다 보면 이 부분보다는 인물 간의 감정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왕가위 감독의 연출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영화 <해피 투게더>를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보영과 아휘

아휘와 보영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아휘는 보영을 따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오게 되고, 이곳에서 둘은 언제나 그랬듯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왔다고 해서 이 둘의 관계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헤어지고 '다시 시작하자'는 보영의 말과 함께 또다시 사랑하는 굴레를 반복한다. 아휘는 보영과 다툰 이후 그에 대한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는 것이 아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아휘와 헤어진 후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던 보영은 결국엔 다시 아휘를 그리워하게 되고, 아휘는 그 사이 누구와의 만남도 갖지 않은 채 오직 보영만을 곱씹는다.


아휘는 보영의 반복될 행동을 인지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 (1857)>를 통해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렇게 한결같이 이기기만 하는 엠마가 원망스러웠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의 구두 소리가 울리면 그는 마치 독한 술을 본 술꾼처럼 맥을 못 추게 되는 것이었다.'


과연 늘 그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아휘의 사랑이, 보영에 비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도달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의 결실


아휘 방의 이구아수 폭포 랜턴

아휘와 보영은 아르헨티나의 거대한 폭포인 이구아수 폭포로 향하려 한다. 하지만 길을 잃고 중고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결국 도달하지 못한 채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다. 그렇게 이 둘의 만남은 다시 한번 끝났다. 아휘는 보영과 헤어진 후 어느 탱고바의 도어맨으로 일하는데, 그러던 중 우연히 손님으로 온 보영을 마주친다.


아휘는 직접 이구아수 폭포를 보지는 못했지만, 마음 한편에선 폭포에 대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 보영이 가지고 왔던 이구아수 폭포가 그려진 랜턴은 여전히 그의 방을 비추고 있었고, 언젠가 보영과 함께 가기 위해 혼자서는 찾아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구아수 폭포는 이 둘의 사랑에 있어 목표이고 결실이자 맺음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너는 또 어디로 흘러가서 누구의 눈을 멀게 할 것인가


아휘와 손을 다친 보영

작가 황경신의 시 <청춘>의 한 대목인 이 문장은 <해피 투게더> 속 아휘가 보영을 보며 느끼는 감정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보영은 어느 날 싸움을 하다 크게 다쳐 두 손에 붕대를 감은 채 아휘 앞에 나타난다. 그런 보영을 내칠 수 없었던 아휘는 그를 집으로 데려오고, 그렇게 그들은 다시 시작한다. 아휘가 몸이 성하지 않은 보영을 돌보던 시간은 이 둘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다. 도어맨 일을 그만두고 한 중식당에서 일하던 아휘는 근무 시간 중에 보영에게 전화해, 집에 갈 때 사갈 것을 물어보기도 하는 등 계속해서 그를 떠올린다. 보영 또한 하루 종일 집에서 아휘가 오기을 기다리며, 그가 돌아오면 어린아이처럼 먹을 것을 차려달라 하고 같이 자자고 달라붙거나 하는 등 장난치며 그에게 크게 의지한다. 이 순간은 영화 내 유일하게 아휘와 보영의 '해피 투게더'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하지만 보영의 손은 낫게 되어있다. 그의 손을 감싸고 있는 붕대가 풀리면, 그는 다시 아휘의 도움 없이 식사를 할 수 있고, 아휘의 도움 없이 목욕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아휘가 일을 하러 간 사이 홀로 외출을 할 수 있고 다쳤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둘은 다시 삐그덕거린다. 보영의 다친 손을 핑계로 아휘는 그를 구속했고, 그를 손아귀에 넣은 채 사랑할 수 있었다. 한편, 아휘의 이런 태도가 자유로운 보영에게는 한없이 갑갑하게만 느껴진다.


아휘는 담배가 떨어져 사러 간 보영이 보이지 않자, 걱정하고 이 걱정은 그를 구속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어진다. 모처럼 잘 차려입고 외출을 하고 온 보영을 본 아휘는 그에게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낸 뒤, 한 움큼의 담배를 사 온다. 이는 곧 보영에게 이제 담배가 많으니 나가지 말라는 의미로 전달됐다. 아휘는 보영의 여권을 숨기기도 한다. 불현듯 그가 예전처럼 떠나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 밖으로 나다니기 시작하는 보영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아휘의 이러한 행동들은 보영을 옥죄고 그는 다시 한번 그의 사랑에 답답함을 느낀다.


'사실 그의 손이 낫지 않기를 바랐다. 아픈 그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아휘는 떠나버린 보영을 두고 홀로 되뇐다. 아휘와 보영은 매우 다른 성향의 사람이다. 자유롭고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 보영은 아휘에게 있어 너무 자유분방하게 비친다. 반대로, 매일매일 착실하게 일을 하고 정적인 생활을 하는 아휘가 보영의 눈에는 지나치게 정적으로 느껴진다.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과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상충할 수밖에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세상의 끝에, 이젠 그를 그곳에 두고 오다


아휘와 장

보영과 헤어진 후, 아휘는 중식당에서 함께 일하던 장과 친해진다. 아휘에게 있어 장은 본인의 허한 마음을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되고,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다. 하지만 보영에겐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남자들과 짧은 만남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던 중 장은 일을 그만두고 모아둔 돈으로 아르헨티나를 여행한 뒤 대만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며 아휘와 작별 인사를 한다. 둘은 마지막 술자리를 갖는데, 어디를 여행할 거냐는 아휘의 질문에, 장은 아르헨티나 최남단 우수아이아로 간다고 답한다. 아휘는 그곳에 빨간 등대가 하나 서있는데, 세상의 끝이기 때문에 실연당한 사람들이 슬픈 기억을 두고 온다는 말이 있다고 전해준다. 이 말을 들은 장은 녹음기를 꺼내 여기에 그의 목소리를 담으라고 한다. 좋은 일이든 슬픈 일이든, 그의 목소리를 담아 세상의 끝에 대신 버리고 오겠다는 장.


장은 이전 아휘와의 대화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재주가 있다고 말했다. 어릴 적 눈이 아파 잘 보이지 않았을 때, 귀로 듣는 버릇을 들이다 보니 청력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들으려 하면 들을 수 있다며, 귀가 눈보다 나을 때도 있다고 말한다. 듣는 것이 더 정확하기 때문에, 상대가 아무리 행복한 척을 해도 목소리는 못 속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사진 대신 아휘의 목소리를 저장했다.


홀로 남은 아휘는 장의 녹음기를 들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울음을 삼킨다. 후에 세상의 끝에 도착한 장은 들리지 않는 아휘의 목소리를 그곳에 두고 온다. 그는 아휘의 소리 없는 울음의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왠지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장은 아휘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진심으로 이해해줬다. 그런 장의 도움으로, 아휘는 보영을 그렇게 세상의 끝에 두고 왔다. 그는 자꾸만 보영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던 본인의 감정을 마침내 끝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그의 고요한 울음


홀로 남은 보영

보영은 아휘로부터 그의 자유를 상징하던 여권을 돌려받았지만, 이젠 아휘가 없다. 그동안 착실히 돈을 모은 아휘는 홍콩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지만, 보영의 방황은 계속됐고 늘 그렇듯 아휘의 품이 필요해진 그가 아휘의 집을 찾아왔을 때, 그는 그 정적과 밀려오는 외로움을 온전히 맞아야 했다. 아휘가 떠나고 없는 방을 열심히 치우던 보영은 남겨진 이구아수 폭포 랜턴을 바라본다.


아휘를 만나는 동안 줄곧 숨 막혀하던 보영은, 이제 그가 없자 더욱 숨이 막힌다. 이젠 정말 혼자 남겨진 보영은 스스로 그의 감정들을 추슬러야 할 것이다. 항상 보영이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면, 아휘는 그의 말에 응했다. 그는 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 같던 수레바퀴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의 이탈을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흐름에 마치 아휘가 보영에 휘둘리고, 그의 사랑이 더 커 보였다. 하지만 반대였다. 보영은 본인이 필요할 때마다 정착시켜줄 수 있던 아휘의 존재 덕분에 그칠 줄 모르던 자유를 끊임없이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휘는 홀로 이구아수 폭포를 직접 바라본다. 보영과 함께 오려고 남겨둔 여행지인 이 폭포를 바라보며 아휘는 보영을 보낸다. 보영은 그러지 못했고 여전히 유리 랜턴 안에 갇힌 이구아수 폭포 그림을 바라본다. 결국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아휘가 되었다.


둘이서 동시에 꿈꾸던 이구아수 폭포는 한없이 압도적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 의미는 아휘에게도, 보영에게도 적용되지 않았다. '악마의 목구멍'이라고도 불리는 이 폭포는 아휘에게는 남은 사랑을 던져버리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곳으로 남은 마음을 모두 흘려보내는 곳이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랜턴 속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이 폭포는 보영에게 버리지 못한 사랑의 목표점이다. 하지만 이를 함께 이룰 수 있는 이는 멀리 떠났다.


가벼움과 무거움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984)>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에 관해 논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어둠, 두꺼운 것-얇은 것, 뜨거운 것-찬 것, 존재-비존재와 같은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 그는 이 모순의 한쪽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극단은 부정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이 이론은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누는, 극단적 이분법이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단, 이 경우는 예외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나는 <해피 투게더>를 보며, 아휘의 사랑은 무겁고 보영의 사랑은 가볍다고 여겼다. 이는 아휘로부터 보다 벗어나 본인의 삶을 영위하며 그를 사랑하고자 하는 보영의 태도와, 보영만을 생각하는 아휘의 태도를 보고 든 생각이다. 중요한 점은 어느 누가 어떠한 사랑을 했든 간에, 둘은 서로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무거움과 가벼움은 절대 한 곳에서 만날 수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토마시와 테레자처럼 이 이분법에 중첩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밀란 쿤데라의 말과 같이 결국 이 둘은 공존하며 살았다. 양극점에 서있지만 균형은 맞출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겐 행복했던 기억 또한 깊게 아로새겨있는 것 아닐까?


아휘에게 보영은 무거운 사랑의 대상이었지만, 그를 아르헨티나에 두고 온 아휘에게 보영은 가벼운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홍콩으로 돌아가기 전 대만에 들린 아휘는 되려 장을 떠올리고 추억하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마다 아휘의 사랑을 갈구하던 보영의 사랑은 다소 가볍게 보였지만, 아휘가 떠난 후에는 그를 계속해서 그리워하고 기다려 볼 수밖에 없는 무거운 사랑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둘의 사랑에서 각자는 저마다의 이유로 답답했지만, 사랑을 끝내는 과정에서 너무나도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본인과는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둘은 각자의 방식대로 더욱 성숙한 사람이 되어갔다는 점이다. 다른 것을 엿보고 체험했기 때문이다. 무겁고 가벼운 사랑은 각자에 시간차를 두고 존재했지만, 둘이 동시에 무겁거나 가벼웠던 적은 없다. 따라서 아휘와 보영은 서로에게 긍정과 부정 중 하나를 택해 이름을 붙일 수 없게 된 것이다.


간격


왕가위 감독은 아휘와 보영 사이의 간격을 보여줬다. 떠나는 자와 남은 자, 잊어버리려는 자와 여전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자, 자유로워진 자와 고립된 자, 더욱 사랑한 자와 역시 더없이 사랑한 자. 사랑은 한때 이 넓은 간격을 메꿔주었다. 시인 이정하는 간격에 관해 이렇게 적었다.


별과 별 사이는
얼마나 먼 것이랴

그대와 나 사이,
붙잡을 수 없는 그 거리는
또 얼마나 아득한 것이랴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할 수는 없다
그 간격 속에 빠져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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