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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Feb 13. 2021

마틴 스콜세지의 <사일런스>

내면의 신념과 외부를 향한 사랑의 실천, 그 사이 어떤 지점에 관하여.

마틴 스콜세지


마틴 스콜세지

마틴 스콜세지는 어렸을 때부터 스토리보드를 그리며 놀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인지, 그는 각본과 연출에서 강점을 보이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마틴 스콜세지는 참 매력적인 작가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감독인데, 이는 등장인물의 내레이션에서 알 수 있다. 그의 영화 대다수는 다른 영화에 비해 긴 러닝타임 동안 이 내레이션을 기반으로 여러 사건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진행된다. 미국의 갱을 보여준 <좋은 친구들 (1990)>, <갱스 오브 뉴욕 (2002)>, <아이리시맨 (2019)> 혹은, 월 스트리트 주식 사기를 다룬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2013)>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영화를 찍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영화에서는 이야기가 중점이 되어왔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그는 내레이션뿐만 아니라 많은 대사의 양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의 영화를 보다 보면, 시각 매체가 더해진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를 보조하는 영상 또한 훌륭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중점은 이야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콜세지의 2016년 작품 <사일런스 (2016)>는 여태 그가 보여줬던 영화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의 이전 영화들을 참작해보았을 때, 이 영화는 대사의 양이 적은 편이다. 내레이션이 또한 빈번하게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인물 간의 대사와 내레이션을 줄임으로써 그는 영화 제목 그대로의 [silence], '침묵'을 표현할 수 있었다.


영화 <사일런스>를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톨릭 선교 활동과 이에 대한 탄압


고통 속에서 처형당하는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

<사일런스>는 17세기 포르투갈 예수회의 로드리게스 신부와 가르페 신부가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배교했다고 알려진 그들의 스승 페레이라 신부를 찾아 나서며 시작된다. 일본은 과거 가톨릭을 매우 강하게 탄압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영화도 이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선교 활동을 하러 온 신부들과 이를 따르는 일본인들은 매번 모진 고문을 당한다. 이러한 과정을 견디지 못한 몇몇 일본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가 새겨진 석판을 밟으며 배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그들의 신념을 꿋꿋이 이어나가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러던 중, 아무리 탄압해도 사라지지 않는 가톨릭 신자들로 골머리를 앓던 일본 당국은 신자들을 참수해봤자, 신자들은 그들이 순교했다는 의미로 해석해 그 믿음이 더욱 굳건해짐을 파악한다. 이들은 전략을 바꾸는데, 이는 포교를 하러 온 신부들을 배교시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결국 가르페 신부는 사망한다. 그리고 오랜 고생 끝에 페레이라 신부를 만나게 된 로드리게스 신부는 그에게서 일본에 가톨릭을 포교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는다. 결국 로드리게스 신부도 가톨릭의 신념을 저버리고 배교한다.


로드리게스 신부가 예수의 얼굴을 밟았을 때


로드리게스 신부가 배교하던 때

로드리게스 신부는 일본에서 정말 깊은 고뇌에 빠진다.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면서까지 본인으로 인해 고문받는 수많은 일본 신자들을 구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럼에도 하느님에 대한 신념을 배반할 수 없다는 것인지, 이 두 선택 사이에서 그는 방황하고 기도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런 그가 결국은 최후의 순간에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석판을 그의 오른발로 밟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보다 먼저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는 그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당신 로드리게스를 위해 순교하던 것이지, 주를 위해 순교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끝없는 정부의 탄압에 지칠 대로 지친 신자들이다. 가톨릭이라는 것이 생명의 위협을 감내하면서까지의 가치가 있는가에 관해 이들은 회의감을 갖는다. 의심하고 의심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 고통을 참아내던 이유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주에 관한 믿음 때문이 아닌 그들을 이끌어주고 그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준 신부 때문이었다. 어느샌가 신부를 믿고 있던 것이다. 페레이라 신부는 이 점을 꼬집었고 로드리게스 신부는 크게 흔들린다. 과연 신부는 이들에게 고통을 줄 권리가 있는가?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하기 직전, 그는 "당신이 구할 수 있는 영혼들을 생각하시오."라는 말을 듣는다. 신부들은 일본에 왜 갔을까? 왜 그 먼 타지까지 가서 이들은 고생을 했던 것일까? 물론 가톨릭교의 전파를 위해서도 이유가 되겠지만, 기독교적 철학 핵심인 '사랑의 실천', 이것을 위해서이다. 이들은 이들의 사고와 관점에서 원죄를 안고 태어나고 수많은 죄를 저질러 온 사람들을 주에게로 이끌어 그 죄를 들어주고 사면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 위안과 평온함을 선물하고자 한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처럼 행동했던 이들은 모두 사형당하고 고문당했다. 여기서 페레이라 신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했던 것일까.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거룩하신 주'만 반복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거북했다. 오직 내세만을 위해 현세를 살아가는 것 같았다. 옆에서 들리는 비명과 신음에도 그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절대자를 향해 도와달라 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페레이라 신부는 인간으로서의 결정과 주의 아들로서의 결정 사이에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는 보다 현실적인 결정을 했다. 하느님을 뒤로한 채 고문당하는 이들을 살려냈다. 하지만 그에겐 꼬리표가 붙었다. 배신자, 배반자, 배교자.


로드리게스 신부도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이러한 행동이 배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는 죄 많은 다른 인간들을 대신해 본인이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순교했다. 주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것과 같은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로드리게스 신부 스스로는 다시는 가톨릭으로 돌아올 수 없을 만큼의 깊고 어두운 강을 건넜지만, 그의 이런 선택으로 죽어가던 많은 일본인들은 살아남았다. 그 또한 누군가를 도왔다. 그도 그가 선망하던 과거 예수의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느님께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게.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구하게! 교회의 판단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도 있네.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랑의 실천이야." 페레이라 신부는 고뇌하던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말한다. 그렇다. 이건 어쩌면 간단한 형식일 수도 있다. 물론 로드리게스 본인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무거운 죄책감을 가지고 여생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석판에 새겨진 예수의 얼굴을 바라볼 때, 영화는 고요한 침묵에 잠긴다. 우리는 로드리게스 신부의 막대한 내적 고뇌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순간 그에게만 들리는 주의 목소리가 말을 건넨다. "어서 하거라. 괜찮다. 날 밟아라. 네 고통을 아노라. 인간의 고통을 나누고자 이 땅에 태어났고 너의 고통을 위해 이 십자가를 지었다. 이제 네 생명은 나와 함께 있다. 밟아라." 희미하게 사라지는 예수의 얼굴과 그를 밟은 후 적막함 속에 울부짖는 로드리게스. 그간 그의 절실한 신념을 스스로 배반해버린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살기 위해 믿는 것이지, 믿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로드리게스 신부와 기치지로

사실 <사일런스>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일본인 기치지로라고 생각한다. 그는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석판을 몇 번이고 밟으며 배교하지만, 고문의 현장을 벗어나면 다시 로드리게스 신부를 찾아와 고해하고 주에 대한 신념을 되새긴다. 이 과정을 그는 끊임없이 반복한다. 얼핏 그는 성경의 유다 이스카리옷과 같이 비치기도 하지만 감독 스콜세지의 의도는 그것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기치지로는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는 죽임을 당할 것 같으면 예수의 얼굴을 밟지만, 이를 하나의 상징이라고만 생각할 뿐 그 본질까지 잃어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부에게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신부를 찾아와서는 그 죄를 모두 털어놓으며 다시금 주에 대한 믿음을 이어간다. 극심한 탄압 속에서, 기치지로와 같은 신자로서의 삶이 가장 현실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공동체 속에서 혹은 나 스스로에게 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을, 그리고 뉘우치는 삶을 살기 위해 종교를 믿고 따르는 것이지, 현세를 포기하면서 구원받을 내세만을 그리며 따르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종교 자체가 삶의 전부일 수는 없다.


문화, 사상, 종교, 그 모든 것의 상대성


페레이라 신부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 (1859)>에서 '나는 한 사회가 다른 사회를 강제로 문명화할 권리를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했다. 모든 사회와 문화는 상대적이다. 어느 사상과 체제도 다른 것에 비해 우월하고 열등할 수 없으며, 이는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당시 가톨릭의 선교 활동도 그렇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취지와 목적에서 이러한 행동을 단행했다. 그러나 일본에 이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렇다고 이를 강하고 폭력적으로 억압한 일본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 내 페레이라 신부가 말했듯 그리스도교는 일본땅에 뿌리내릴 수 없다. 그는 그들이 뿌리를 미리 잘라버려서가 아니라 이 땅이 늪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페레이라 보다 앞서 선교 활동을 왔던 프란체스코 하비에르라는 신부는 처음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이들이 신을 어떻게 지칭하는지 물어봤고 '다이니치'라는 답을 들었다. 그건 유일한 신의 아들 '태양'이다. 그들에게 이 모든 개념들, 종교, 신, 신의 아들, 부활 등은 모두 다른 의미이고 해석이다. 그의 말처럼 일본인은 인간과 자연을 초월한 어떠한 존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온 곳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고 매우 다른 역사를 거쳐왔다. 그렇기에 갑자기 들어온 가톨릭교는 어쩌면 일본 이들에게도 강압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마치 '너희들은 틀렸고, 이것이 옳은 것이니 이해해봐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점이 결국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극심한 천주교 탄압을,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의 종교 분쟁을 불러일으킨다고 본다. 


종교에 대한 나의 견해


나는 종교가 없다. 따라서 심적으로 느끼는 그 어떠한 절대적인 힘과 신념 등을 모른다. 또한, 학문적으로 접근하기에도 그 범위가 매우 넓고 깊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한다. 유럽 여행을 많이 다니고 프랑스에 몇 달간 거주한 적이 있는 나는 도시 곳곳의 성당들을 방문할 기회가 많았다. 그때마다 드는 느낌은 엄숙함이었다. 말과 글로 표현하기 힘든 어떠한 느낌이 있다. 성당의 크기가 거대하긴 하지만, 비단 거기에서만 오는 압도감은 아니며, 심적으로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공간 같았다. 나에게 종교가, 특히 가톨릭이 준 느낌은 편안함이었다. 모든 죄를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게 해 줄 것 같은. 난 여기에 종교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고민이 있으며, 그 고민거리들은 현실적인 삶에서 해결하기 쉽지 않은 것들이다. 그럴 때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특정한 장소에 가 그것들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밖으로 그것을 내어놓은 순간 그 무게는 미세하게나마 가벼워진다.


하지만 그 이상의 종교의 신념이 한 국가의 운영을 지배하고 개인의 모든 주관성을 장악하는 부분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종교의 강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진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이고 존재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을 알기에는 종교에 관한 나의 지식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이는 나에게 버거운 생각할 거리이다. 종교의 순기능과 역기능은 항상 둘 다 명확하게 다가왔던 탓이다. 어느 것이 보다 옳은 것인지, 중립이라면 중립의 입장은 무엇인지. 이 질문들의 해답들은 내가 앞으로 찾아햐 하는 것들인 것 같다.


나의 내면에서 그것은 모두 예배였다


그러나 <사일런스>가 주는 메시지는 이 종교적인 것을 넘는 무언가가 있다. 개인의 가장 깊숙한 신념, 이를 위한 그의 분투, 본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 그럼에도 갈구할 수밖에 없는 그것. 이 모든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이야기를 풀어낸 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가톨릭 신자이다. 그의 영화 <사일런스>는 배교하고 일본에 정착해 살아가던 신부 로드리게스가 죽을 때, 손에 쥐고 있던 십자가를 보여주며 끝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검은 화면의 문장으로 막을 내린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그의 신념에 관한 진실은 하느님만이 알고 있다고 스콜세지는 말한다. 로드리게스는 하느님을, 그리고 예수의 존재를 부정하고 배반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상황에 맞게 주의 사랑을 찾고 있었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던 '그'의 침묵(silence)에 그는 실망하지도, 마음을 돌리지도 않았으며 단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신념을 증명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른 모습과 형태의 신념이라고 해서 그의 본질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할 수 있는 것을 했고 그의 속에 있는 것을 잃지 않았다. 생을 마칠 때까지, 배교자라는 주홍 글씨가 새겨졌지만, 신념은 깊고 확고했기에 쉽게 덮을 수 없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1919)> 중 주인공 싱클레어는 과거 본인의 삶을 되짚어보며 말한다.

'나의 내면에서 그것은 모두 예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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