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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Feb 06. 2021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

<프레드릭>을 통해 본, 예술의 역할에 관하여.

동화책의 힘


내가 군 복무를 하고 있던 때, 그때 나는 한창 고전 문학들을 읽고 있었다. 근무 시간을 제외하고는 수면 시간을 줄여서라도 열심히 읽었다. 그러던 중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고, 단테 알레기에리의 <신곡 (1320)>을 해석하던 한 소대장은 나에게 가장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읽고 난 후 가장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책은 동화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웃었지만 몇 달 전 서점에서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프레드릭 (1967)>을 읽고 그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이들은 긴 글을 읽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동화책은 그 양을 매우 많이 줄이고 요약한다. 글로 표현하는 대신 그림이 그것을 대체하기도 한다.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도 이러한 형식이긴 했지만, 작가가 전하고 싶던 메시지는 다른 그림책들과는 다르게 표면에 드러나있지 않고 어딘가에 함축되어 있었다.  


프레드릭과 들쥐들

프레드릭

프레드릭을 포함한 들쥐들은 겨울이 다가옴에 따라 밀과 옥수수 같은 곡식들을 모아두며 준비한다. 쥐들은 모두 열심히 일하지만, 단 한 마리 프레드릭은 일을 하지 않는다. 일을 하던 쥐들이 프레드릭에 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나도 일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라고 답한다. 이후에도 프레드릭은 다른 쥐들의 물음에 "색깔을 모으고 있어. 겨울은 온통 잿빛이잖아.", "난 지금 이야기를 모으고 있어."와 같이 답할 뿐이다. 겨울이 왔고, 처음에 먹을 것이 풍부했던 쥐들은 행복하고 풍요롭게 지낸다. 그러나 겨울이 길어지자 그동안 모아두었던 곡식들이 동이 나고 들쥐들은 침묵 속에 떨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한 마리의 쥐가 프레드릭에게 네가 모아두었던 햇살, 색깔,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냐고 묻는다.


"눈을 감아봐. 내가 너희들에게 햇살을 보내줄게. 찬란한 금빛 햇살이 느껴지지 않니?" 이 말을 들은 쥐들은 점차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레오 리오니는 덧붙인다. '프레드릭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마법 때문이었을까?' 이어 프레드릭은 색깔도 전해준다. 잿빛 배경 속의 들쥐들은 마음속으로 노란 밀짚, 붉은 양귀비꽃, 초록빛 딸기 덤불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레드릭은 그가 모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눈송이는 누가 뿌릴까? 날을 저물게 하는 건 누구일까?"와 같은 이야기들. 그는 생각할 것들과 서로의 의견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거리들을 던진다.


프레드릭이 모아 온 것들을 전해받은 들쥐들은 입을 모아 외친다.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시인 프레드릭


프레드릭은 다른 들쥐들과 다르게 시인이었다. 그는 남들과 다른 형태의 곡식을 모았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 제2부 '시인들에 대하여'에서 시인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여간 모든 시인들은 믿고 있다. 풀밭에 혹은 고독한 산비탈에 누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여러 사물들에 대해 무언가 알게 된다고.'


니체의 말처럼 프레드릭도 홀로 생각에 잠겨 온갖 추상적인 것들을 마음속에 모았을 것이다.


예술이 우리에게 주는 것


이 책을 읽고 보다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에서, 프레드릭은 일을 하지 않고 이를 피하기 위해 변명만 하는 쥐라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겨울을 나는 데에 있어서 따뜻한 보금자리와 풍요로운 곡식을 제외한 햇살, 색깔, 이야기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큰 쓸모없다. 아니 아예 없어도 겨울을 보낸다는 것 그 자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예술이란 그런 것 같다. 냉정하게, 오로지 의식주와 생존의 관점에서만 우리의 삶을 바라봤을 때, 목을 축이거나 배를 채우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과 같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배가 부르고, 편한 잠자리를 얻는 것과 같은 생존의 활동이 끝나고 나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일을 마치고 보는 TV 드라마 혹은 영화, 일 중간에 즐기는 게임과 음악 듣기, 쉬는 시간을 채워주는 책 읽기와 그림 그리기 등. 이 모든 것들은 필수요소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어준다. 예술이란 이런 것 같다. 우리는 생존 활동만으로는 금방 피로해지고 지루해지기 때문에 이것을 메꾸어줄 다양한 형태의 예술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통해 더 많은 힘을 얻는다. 우리에게는 살아가기 위한 의식주의 만족 이외에도 문화라는 거대한 정신적 만족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역할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동안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었다. 물론 이 생각이 지금까지 유효하진 않다. 성인이 되고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고 경험하면서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의 힘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지금도 난 처음 들어보는 좋은 음악에 흥분하기도 하고, 미술관에 가서 본 뛰어난 그림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잘 쓰인 글에 감명받고, 잘 찍은 영화에 몰입하고 여운을 갖기도 한다. 예술은 우리의 감정을 여러 색으로 칠해주고 만져준다. 프레드릭이 지친 들쥐들의 영혼에 따스한 햇빛을 전해주고, 다채로운 색깔을 전해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전해준 것처럼 말이다.


예술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회


사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떠한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고, 어떤 생각을 정의로 설정할 것인지를 정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 근원들을 자세하게 알아보고 싶어, 몇 년 전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1848)>을 읽었다. 이후에도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1859)> 등 몇몇 정치사상 서적들을 읽어보았는데, 저마다의 경제, 분배, 질서 등과 관련된 주장들을 보며, 그럼에도 무언가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들은 본인들이 생각한 가장 올바르고 좋은 세상을 이야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관점에서는 뭔가가 삭막해 보이고 마냥 밝아 보이지 않았다.


예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감성과 감정의 영역이 상실되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물질과 이익으로 계산되고, 감성을 향유할 줄 아는 인간에게 이는 다소 팍팍하고 딱딱한 사회로 보이기도 한다. 우린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 못지않게 지친 우리를 달래줄 음악, 그림, 책, 영화, 이야기 내지의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프레드릭의 친구들은 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그들이 겨울나기를 준비하며 일할 때, 곡식을 모으고 있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프레드릭에 약간의 불평을 토로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프레드릭이 자신만이 모은 양식들을 쥐들에게 나눠줬을 때, 이들은 그게 무엇이냐며 비난하지 않고 함께 공감하고 체험했다. 이들은 프레드릭이 제공한 마음과 정신의 양식을 짓밟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여 각자의 가슴속에 채워 넣었다.


들쥐들이 곡식을 저장해 두지 않았다면, 이들은 너무나도 힘든 겨울을 보냈을 것이다. 프레드릭이라는 시인이 없었다면, 이들의 마음은 메말랐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모자란 것들을 채워줘 혹독한 겨울을 넘길 수 있었다.


그래,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이렇게 프레드릭과 조화되어 겨울을 보내는 들쥐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는 박노해 시인의 시 <그래,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가 떠올랐었다.


그 사람 시밖에 몰라
그 사람 꽃밖에 몰라

넌 전문성이 모자라
넌 현실감이 모자라

그래,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그래야 서로 기대고 나눌 수 있지
그래야 서로 모자란 구석도 채워줄 수 있지
그래야 덕분에 산다는 것도 알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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