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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Jan 23. 2021

피트 닥터의 <소울>

오늘의 우리를 이끄는 진정한 힘에 관하여.

자신이 평생 해온 경기에 대해, 우리는 놀랄 만큼 무지하다


베넷 밀러 감독의 영화 <머니볼 (2011)>이 시작할 때 나오는 이 문장은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미키 맨틀이 한 말이다. 우리는 본인의 삶이면서도 스스로를 만들어준 순간들을 너무 쉽게 잊는다. 미래의 가치를 쫒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말이다.


영화 <소울>을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던 조 가드너


학생들을 가르치는 조 가드너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일까? 가치 있는 삶은 무엇일까? 의미와 가치. 내가 나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그때 그 일은 이러한 이유에서 의미 있었어.' 혹은 '거기에선 별 가치를 찾지 못했어.'와 같이. 나는 사실 이 세상에, 하다못해 나 스스로에 족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내가 이것을 위해 살아왔고, 이것을 위해 그리 열심히 뛰었던 것이라고 보여주고 증명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생각과 가치관은 줄곧 지금의 나를 좀 지치게 만든다.


<소울 (2020)> 속 조 가드너는 나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중학교에서 시간제 강사로 밴드부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그다지 큰 보람을 느끼는 것 같진 않다. 그러던 그는 우연한 기회로 평생을 선망해 온 뮤지션 도로시 윌리엄스의 재즈 밴드에 합류할 기회를 얻지만 사고를 당한다. 영화가 일종의 사후세계인 그레이트 애프터나 유세미나 등을 표현하지 않았더라면, 조의 삶은 이걸로 막을 내렸을 것이다. 결국은 그가 그렇게 고대해오던 밴드에서의 공연은 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렇기에 조 가드너는 유세미나에서 본인의 삶을 되돌아보며, "나는 의미 없는 삶을 살았구나."라고 말한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것도, 평생의 꿈인 재즈 뮤지션을 포기하고 교사를 하고 있는 것도 모두 그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일과 거기서 오는 인정만이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이라면, 그 기준이 너무 높아 가혹하게 느껴질 것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 것이고, 무엇이 의미 없는 것일까?


유세미나에서 태어나기 전의 영혼들을 만나는 조

본인의 죽음을 부정하고 유세미나라는 태어나기 전의 세상으로 들어오게 된 조 가드너는 22라는 이름의 소울을 만나고 그의 멘토가 된다. 22는 '스파크'라는 열정이 부족해 수천 년간 지구로 가지 못하고 이곳을 떠도는 아이이다. 그리고 몇 차례의 모험 끝에 실존하는 몸을 만나 지구로 들어가게 되지만, 사고로 인해 22가 조 가드너의 육체로 들어가고 조 가드너는 그 앞에 있던 고양이의 몸으로 들어간다. 감독 피트 닥터는 왜 고양이를 등장시켜, 조 가드너가 다시 현생으로 복귀할 수 없게 만든 것일까?


고양이는 관찰자다. 조는 도로시 윌리엄스와 공연을 할 수 있을 뻔했던 본인 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제외하고는 삶에 대한 큰 애착이 없다. 만약 이 상태에서 그의 영혼이 다시 본인 몸으로 성공적으로 돌아갔다면, 그는 사고를 당하기 전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적어도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한 발짝 떨어져 본인을 관찰하기 시작하면서,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22가 들어간 본인의 육체와 함께 뉴욕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여느 때처럼 바쁜 하루를 보내는 고양이가 된 조는 사소한 하나하나가 다 의미 있는 일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구 세상에 와본 적 없던 22는 피자 한 조각의 맛, 밴드부 학생의 트럼본 연주, 지하철 환기구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 미용사와 나누는 대화, 역 안에서 버스킹 하는 이름 모를 남자 이 모든 것들이 새롭다. 그리고 하루를 조의 몸에서 보낸 22는 이로 인해 그에게 모자랐던 열정을 갖게 되고 후에 세상으로 오게 된다. 유세미나에서 말했던 것처럼 링컨, 칼 융, 테레사 수녀도 영감을 주지 못한 22의 '스파크'를 어떻게 그들 중 가장 평범한 멘토 조 가드너가 채워줬을까?


조 가드너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며 유세미나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22에게 그건 네가 처음 해봐서 행복한 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원래 해봤던 것, 일상이 된 것, 특별할 것 없는 일들은 행복감을 주지 못하는 의미 없는 일들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가장 행복한 순간들을 겪어 왔을 수도 있고, 지금 겪고 있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감정들은 우리가 고대하는 훗날의 일들과 동등하게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번 똑같다는 이유로, 너무 많이 해봐서 따분하다는 이유로 이 사건들을 의미라는 개념과 분리시킨다. 조 가드너는 방금 먹은 피자 한 조각에서, 여학생이 부는 트럼본의 선율에서, 땅에서 거꾸로 올라오는 지하철 바람에서, 여태 친밀하게 느꼈던 미용사 친구의 인생 이야기에서 그리고 그냥 지나친 버스커에 조금만 귀 기울이고 그 순간을 즐겼다면, 아마 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조 가드너에게 의미를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전히 나에게 달린 무아지경의 상태


거리에서 간판을 돌리고 있는 문윈드

[무아지경]은 불교 용어로, 정신이 한 곳에 온통 쏠려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를 지칭한다. 유세미나 내에는 본인이 지금 하는 일에 도취되어 황홀함을 느끼고 있는 영혼들이 있고, 그 아래에는 다른 의미로 상실감과 무기력함에 빠져 지하를 헤매는 영혼들이 있다. 그리고 신비주의 클럽 회원들은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진 뒤, 이 어두운 영혼들을 구해준다. 문윈드는 이 클럽의 일원이다. 그는 뉴욕의 길거리에서 피켓 돌리는 일을 하는데, 사실 이는 사람들이 크게 집중해주지 않는 일이며 어쩌면 단지 거리의 가로등이나 입간판 같은 매우 보통의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문윈드는 열심히 한다. 이건 내가 눈에 띄어 더 좋은 일자리로 가야지, 이 기회를 살려 더 높은 목표를 바라봐야지와 같은 '열심'의 개념이 아니다. 그는 그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본인에,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 본인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간판을 돌리는 문윈드는 자주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진다. 나중에 사라진 22를 찾기 위해 소울의 영역으로 들어가려는 조 가드너도 재즈 연주를 통해 이 곳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좋은 의미에서 내가 하는 일에 행복함을 느끼고 주변의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몰입해 무언가에 빠진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충실하게 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상태와 감정은 누구도 만들어줄 수 없다. 현재의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그 감정을 고취시켜 행복함에 물드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고, 이건 오롯이 나의 의지에 달렸다.


영원한 설렘은 없지만


도로시와 조

한편, 그렇게 꿈꿔오던 도로시 윌리엄스와 공연을 마친 조 가드너는 그전엔 생각지 못한 일종의 허무감을 느낀다. 물론 그녀와 연주하는 동안 조는 황홀감에 빠졌다. 그가 사랑하는 재즈의 세상 안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너무 행복해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도로시와의 공연도 일정 시간이 되면 끝나게 되어있고, 공연이 끝나면 그는 그냥 그렇게 집에 가는 것이다. 그토록 갈망하던 연주가 끝나자 조는 도로시와 헤어지기 전 어떠한 엄청난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다고 말한다. 그러자 도로시는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흘러가듯 대답한다.

"바다를 찾아야 한다는 젊은 물고기에게 늙은 물고기는 말했다. 당신이 찾는 그 바다가 지금 여기라고. 여기가 바다라고. 젊은 물고기는 이를 부정하며, 여긴 그냥 물이라고 답한다."


나는 모든 감정은 휘발성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뭔가 대단한 게 있을 것 같던 기쁨과 황홀감도 때가 되면 사그라든다. 물론 여운이라는 것이 남기도 하지만, 처음 그 감정을 느꼈을 때보단 그 수치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 아닌가. 하지만 그 크기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도로시의 말처럼 내일도 이 공연장에 와서 똑같이 재즈 음악을 연주할 것이다. 도로시와의 공연도 결국 그가 단조롭다고 생각하던 일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잊어선 안된다. 여기 이 곳이 과거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곳이고, 처음만큼의 황홀함을 느낄 수는 없겠지만 재즈를 사랑하는 내가 오늘도 사람들 앞에서 재즈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는 감사함을.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그때 그 평범한 일들


뉴욕 지하철 역사의 22와 조

조 가드너는 22의 멘토였지만, 그 또한 22로부터 배운 점이 매우 많다. 이 배움은 조 가드너가 본인의 삶을 더욱 소중하게 다루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도로시 윌리엄스와의 공연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조는 홀로 피아노 앞에 앉아 오늘 하루를 '나'로 살았던 22가 주머니에 넣어둔 물건들을 바라본다. 버스커의 기타 케이스 안에 넣어뒀던 베이글, 남은 피자 조각, 미용실에서 받아온 막대사탕, 지하철 티켓 그리고 우연히 손위로 떨어진 가로수의 나뭇잎 하나. 이게 그가 말하던 '의미'다. 오늘의 내가 거쳐온 내 삶의 상징물들, 전리품들.


모든 건 과거가 되고, 그때의 일들이 크고 자극적이지 않을수록 우린 채 1시간도 안되어 잊는다. 이건 정말 희한하다. 오늘의 나를 만든 건 지난날들이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나는 동기부여가 될 뿐, 나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아직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 가드너는 본인의 삶을 되돌아본다. 힙합 음악을 하며 재즈에는 관심도 없던 조를 그의 아버지가 재즈바에 끌고 갔고, 이를 기점으로 재즈에 내 삶의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내가 지루해하던 아이들에게 음계를 가르치는 일들에서도 사실은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을까? 셀 수 없이 많은 지난날의 사건과 감정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이 가치였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바라보고 살아야겠지만, 그렇다고 날 만들어준 소중한 순간들을 소홀히 대하지 말자고 조 가드너는 말하는 듯하다.


삶의 목적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님을


조의 회상

22는 열정을 찾지 못해 지구로 가지 못했다. 유세미나에서 멘토 조 가드너의 도움을 받아 요리사, 우주비행사와 같은 모든 직업들을 경험해봤지만 어느 하나에도 매료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문제 될 것이 전혀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기 전에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까? 장 폴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났고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게 된다. 그리고 이걸 토대로 내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내 삶을 설계해나갈 뿐이다. 결국 본질은 우리의 의지만 있으면 채워지게 되어있다. 이것을 해보라고 누군가 강요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닌, 내가 나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 찾아내는 것이다. 조 가드너가 훗날 재즈 뮤지션이 내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22가 지구로 가기 위한 어스 패스의 마지막 속성은 결국 의지였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게 없다고, 나에게 잘 맞는 옷이 없다고 해서 준비가 덜 된 것이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 주어진 일상을 열심히 살아갈 의지만 있다면 우리 존재는 누구나 완전하다. 조 가드너는 본인의 모든 삶을 바칠 수 있을 재즈라는 것을 찾아냈지만, 일상의 작지만 강한 의미들은 쉽게 잊어가며 살아갔다. 22는 본인의 삶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지 못했지만, 작은 일상에도 행복해하며 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의지를 지녔다. 결국 이 둘은 서로가 없는 것에 대해 보여줄 수 있는 멘토였고, 이로 인해 전보다 진보한 소울이 된다.


보통의 순간들이 주는 의미와 가치


길거리의 22와 조 가드너

성공한 재즈 뮤지션이 되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고, 그제야 의미 있는 삶이 시작될 거라 믿던 조 가드너는 본인도 몰랐던 사이에 밴드부 아이들에게 음계를 가르치며 가치 있음을 느꼈었다.


나는 여태 스스로 되뇌었다. '이걸 이뤄야 내 삶이 가치 있을 거야.', '이런 거 말고 내가 갈망하는 저런 걸 해야 의미 있는 삶이지.', '이런 사소한 것에 쏟을 시간이 없다. 저걸 이루려면 얼른 뛰어야지.' 물론 내가 생각하는 그것을 달성함으로써 더 큰 행복이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그래도 하루를 시작할 때, 찌푸리지 않고 행복한 감정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평범하고 단조로운 일상에서 느끼는 그 작은 감정들 덕분이었다는 것을. 이 모든 것들이 의미이자 가치이다. 이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야 한다. 오늘의 나에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한다. 누구에 비해 부족해 보이고 심심해 보이는 삶일 지라도 그 속에서 내가 해내는 것들이 모두 내 삶의 의미이고 가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가르침을 주는 경험은 일상생활의 경험이다.' 일상의 가치를 난 너무 쉽게 잊곤 한다. 그래서 이 글은 내가 나에게 일러두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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