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을 요구하는 사회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개인 간의 대립에 관하여.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은 실제 1960년대 초반 대만에서 최초로 발생한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4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은 주인공 샤오쓰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 사이의 갈등, 혼란 혹은 여러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나는 이 중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벌어지는 살인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물론 살인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범죄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도덕적 관념은 잠시 제쳐두고, 이 살인에 대만 사회가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사유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이라고 보았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살인사건이 대만의 각 분야에서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는 문구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감독 에드워드 양은 샤오쓰가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어떠한 환경에 노출되어왔는지에 관해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것과 같은 연출 기법을 활용하였다. 실제 역사적 사건인 만큼 감독은 본인의 가치관이나 의견을 영화에 투영해 표현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어떠한 동의의 표시도, 위로도 전하지 않는다. 마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아무도 모른다>와 같은 영화를 대할 때와 같은 시선에서 말이다. 감정은 최대한 절제하고 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주로 보여주기 때문에 간혹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기도 하며, 해석은 관객의 몫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그 여운이 오래 지속되게끔 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셀 수 없이 많은 상징과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는 영화이기에, 매우 다양한 해석과 평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거시적 관점에서의 사회와 미시적 관점에서의 개인 사이의 충돌에 초점을 맞췄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의 대만 사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극심한 혼란의 상태에 놓였다. 오랜 기간 서구 사회에 팽배했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시대가 막을 내렸고, 이에 맞물려 많은 국가들이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의 지배로부터 독립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통치 체제가 필요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열강으로부터 막 자유로워진 국가들에는 또 다른 형태의 혼란과 투쟁이 뒤섞였다. 독재자의 등장이나 군사 쿠데타를 통한 정권 획득과 같이 말이다. 또한, 과거 전 세계 여러 국가들을 호령하던 영국, 프랑스와 같은 전통 강대국들은 그 힘이 한풀 꺾이게 되었으며, 전례 없던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은 세상을 지배한다. 그리고 이 둘이 각각 채택하고 있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세상을 양분했다. 이러한 두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세계 곳곳의 나라들이 서로 충돌하고, 심한 경우 내전까지 발발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야말로 이데올로기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한편, 중국은 소련의 진영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채택했다. 동시에 이에 불복한 장제스는 1949년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패배 후 국민당의 본거지를 현재의 타이완 섬으로 옮겼다. 이렇듯 대만 역시 매우 혼란스러운 근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이 당시를 배경으로 삼고 있기에 학생들이 집에 가는 길 도로에서 여러 차례 탱크와 군인들을 만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혼란은 샤오쓰의 가정을 넘어, 샤오쓰 본인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개인의 성격처럼, 국가의 성격이 강압과 폭력으로 휩싸여 있던 것이다.
순응을 요구하는 사회
샤오쓰는 오히려 내성적인 인물로 비친다. 말수가 많은 편도 아니며, 그의 감정을 뚜렷하게 표현하고 드러내지 않는다.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를 감싸고도는 사회상은 시끄럽다. 학교 친구들은 217파나 소공원파와 같은 갱단에 속해 폭력을 저지르고 다니기 때문에 그 또한 이런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군가 상대 조직원을 공격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밤마다 복수가 계획되고 다시 폭력이 동원되면서 그는 이곳저곳에서 흔들린다. 그렇다면, 아직 어리다면 어리다고 볼 수 있는 중학생들은 왜 갱단을 조직해 불만을 표출하고 공격적으로 변해가는 것일까? 이들에겐 더 강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강한 무기이다. 힘이 강한 자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리고 모든 것을 내주어야 한다. 이러한 체계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학생들의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가치관이 결국 상위 개념인 사회 체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교육은 사회의 거울이다'라는 말과 같이 이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당시 사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샤오쓰의 아버지는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지식인 공무원이다. 그는 책을 읽음으로써 사람이 사랍답게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책에 모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지식에 비해 힘 있게 살지 못한다. 그의 오랜 친구 왕 선생은 그에게 상하이 지식인 같은 고리타분한 생각을 이제는 버릴 때라며 변해야 한다는 조언을 한다. 시대가 달라졌고 여기에 맞춰 기존의 생각을 바꾸라는 것이다. 샤오쓰의 아버지가 겪게 되는 이러한 고민은 그뿐만 아니라 당시 여러 지식인들이 내몰렸던 흐름이다. 지식이 최고의 재산이 되던 시기는 이미 수차례의 전쟁으로 끝나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 많이 안다는 것은 내세울만한 것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보수적이고 옛것이고 고리타분하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게 된 시대인 것이다. 때는 새로운 흐름에 적응하고 폭력이라는 수단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되어있던 것이다. 그는 끝까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려 했지만, 너무나도 큰 사회 흐름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아들 샤오쓰가 학교에서 사건에 휘말리고, 그가 행정실로 소환되었을 때, 그는 권력을 행사하는 선생에게 관료주의적 태도로 일관하지 말라며 화를 낸다. 그의 아들을 향한 지적이 불공정하며 선생으로서 그러한 행동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그는 샤오쓰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사과를 요구당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의 불만을 표출하는 감정이 과연 해당 교사에게만 향한 것이었을까? 그가 앞으로 당하는 일들을 고려해보면, 어쩌면 이는 사회를 향한 감정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항하는 개인
샤오쓰의 아버지가 교육 기관의 관료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것은 넓게 보아 당대 사회적 체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관료제가 국가나 공적 조직을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 기술적 우월성을 가진 전문적, 효율적 조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관료제의 문제점을 비인격성에서 찾았다. 대만은 당시 최대한 빠르게 사회적 안정을 찾아야 했다. 사회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것은 사회적 통제이고, 대부분의 국가가 그래 왔듯 사회 통제는 관료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거대한 조직의 체계 내에 있는 구성원들은 그저 이 통제가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법률적일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의 지시에 순응할 뿐이다. 그렇기에 샤오쓰의 아버지가 이 점을 언급하는 부분은 의미 있다. 그는 모두가 복종하고 있는 이 사회 시스템을 경계하고 작은 저항을 표한 것이다. 어쩌면 이후 샤오쓰가 교사들과 종종 갈등을 빚게 되는 것도 그의 아버지로부터 파생된 일종의 저항 정신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가늠할 수 있다.
사회의 체제를 파악하고 상황에 맞춰 변화하는 개인
밍은 어쩌면 샤오쓰나 그의 아버지의 태도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천식으로 고생하는 어머니를 따라 가정부 생활을 하기 위해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는 밍은 매번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밍이 던져진 사회의 현실이다. 따라서 그녀는 본인의 속사정과 마음을 타인에게 온전히 전하지 않는다. 어차피 때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여러 남자를 만난다. 그녀에게 있어 이는 진정한 우정이나 사랑을 찾는 것이 아닌 적응의 일부분이다. 영국의 사상가 허버트 스펜서는 그의 이론 '적자생존'으로 인간들의 사회적 생존경쟁 원리를 함축했다. 사회 내의 개개인들은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합한 생존 방식을 통해 살아남는다는 것인데, 밍의 가치관과 행동은 이러했다. 그녀의 남자 친구 허니는 소공원파의 두목이었다. 그는 밍을 차지하기 위해 상대 조직인 217파의 두목을 죽이고 해군으로 입대해 타이난으로 피신한다. 그런 허니가 사라지자 밍은 샤오쓰와 만난다. 그러나 일말의 사건으로 이들의 만남도 오래가지 못한다. 그리고 새로 전학 온 샤오마라는 아이가 등장하는데, 그는 육군 장교의 아들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다투던 조직원들 앞에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밍은 결국 샤오쓰와도 친구 관계인 샤오마와 사귀게 된다.
밍에게 있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본인의 신분을 높이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사회 흐름을 통달하고는 그때그때 가장 강한 인물에게 간다. 이는 생존만을 놓고 봤을 때, 혼란스럽던 사회에 가장 효율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저항하는 자와 적응하는 자의 충돌
샤오쓰는 소공원파도, 217파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밍과의 관계로 인해 두 조직 사이의 갈등에 휘말리고 결국 퇴학당한다. 그러던 중 샤오마의 집에서 놀던 밍은 실수로 샤오쓰를 향해 총을 쏜다. 샤오쓰가 이 총에 맞진 않았지만, 실탄이 장전되어있었기에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하였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샤오마는 상황을 묻지도 않고 밍의 뺨을 때린다. 이에 샤오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장면은 바뀐다. 밍은 이 불합리한 모욕을 당하고도 이후 샤오마와 만난다. 이 사실을 알고 분개하는 샤오쓰는 밍의 학교 앞으로 찾아간다. 샤오마를 죽이기 위해서이다.
밍을 만난 샤오쓰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널 무시 못해. 밍, 난 널 잘 알아. 하지만 상관없어. 널 잘 아니까 도와줄 수 있는 거야. 이제 네게 남은 희망은 나밖에 없어. 과거에는 허니가 그랬지. 네가 왜 허니를 못 잊는지 알아? 그건 네가 날 허니로 생각하기 때문이야." 이에 밍은 답한다. "내가 변하도록 도와주겠다는 거야? 너도 똑같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너도 다른 애들처럼 나한테 감정을 바라고 잘해 준 거였어. 그러면 안심이 될 테니까. 참 이기적이다. 네가 날 바꾸겠다고? 난 이 세상과 같아. 세상은 변할 수 없어." 샤오쓰는 결국 밍을 살해한다. "넌 희망이 없어. 부끄러운 줄 알아!"
가장 폭력적인 최후의 저항이라는 모순
샤오쓰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밍이 쓰러진 후 놀라 그녀에게 일어나라 애원하는 샤오쓰의 모습을 보면, 그는 밍에게 화났던 것이 아니다. 사회가 이러하므로 당신들 또한 이에 맞춰 변화하고 적응하라는 요구, 이런 잦은 요구들은 샤오쓰를 너무 힘들게 했다. 그리고 그 한계선을 넘어가자 폭발한 샤오쓰. 그러나 그의 폭력 또한 사회의 암담함에 포함된다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결국 그 또한 사회에 팽배하고, 그가 이해하지 못하던 폭력에 물들었다. 다른 갱단의 아이들과는 달리,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던 샤오쓰는 누구보다도 폭력적인 인간이 되어있었고 살인자가 되어있었다. 앞서 그의 아버지 또한 가족들에게 다정하던 과거는 잊은 듯이, 경찰의 견고한 힘 앞에 무릎을 꿇은 뒤엔 가정폭력을 저지른다. 무엇이 그들을 폭력으로 내몰았을까? 왜 결국은 그들이 저항하던 대상과 동일하게 변해있었을까?
밍은 안타까운 희생자이고 폭력의 굴레에 갇혀버린 인물이다. 샤오쓰는 그녀를 구원해주고 싶어 했으나, 잦은 혼란 속에서 결국 누구보다도 폭력으로 그녀를 없애버린다. 모든 책임은 살인을 저지른 샤오쓰가 져야 한다. 그러나 샤오쓰를 이렇게 만든 사회에도 일말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한다. 지식보다 폭력이 우위이던 시대, 합리와 이성보다는 권위와 통제가 우선이던 시대는 그 속의 개인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질서와 이념은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닌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개개인들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개인들은 점차 소외되어 갔고 이론과는 상관없는 저마다의 생존 방식대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했다. 사회 안정을 위해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와 같은 말들은 개인들의 심리를 안정시키고 도와주기에는 너무 동떨어졌고 일방적이었으며, 공감해주지 못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언제나처럼 학생들의 대학 합격자 명단이 라디오에서 불리던 것은 어쩌면 샤오쓰도 그러한 시대상이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한 학생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2편 '오심'에서 드미트리 카라마조프는 검사에게 말한다.
"저 사람의 지혜는 놀러 나갔다가 그만 너무 외진 곳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거기서 스스로를 잃어버린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 사람은 은혜를 알고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