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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Jan 11. 2021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사상가와 신비주의자. 어쩌면 가장 완전한 이분법적 접근에 관하여.

스탕달 신드롬


이것도 스탕달 신드롬을 겪었다고 볼 수 있을까? 2016년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에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접했을 때, 2018년 모스크바에서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접했을 때, 2019년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폴 고갱의 그림을 보았을 때 그리고 마드리드의 한 미술관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았을 때. 순간순간 나는 아득해짐을 느꼈다. 무언가 형용할 수 없이 가슴속에서 벅차오르는, 마치 눈물이 날 것과 같은 느낌을 말이다. 돌이켜보면,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몇몇 책을 통해서도 이와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984)>,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1946)>,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1916)>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1952)>. 책을 읽으면서 모든 정신과 신경이 글에 집중되고 어쩌면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 삶의 시각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작품들이다. 이후 오랜만에 읽은 책에서 다시금 그 느낌을 받았다.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1930)>가 그것이다.


완전함


이동진 평론가는 자장커 감독의 영화 <스틸 라이프 (2006)>를 두고 '이 영화는 완전하다.'라고 했다. 단어 [완전한]이 주는 의미는 매우 깊고 가치 있다.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완전하다]의 뜻은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다.'이다. 간혹 어떠한 작품들을 보고 나서 이동진 평론가의 이 말이 떠오를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말이나 글로 자세히 설명하긴 힘들지만, 스스로 "이건 완전하다."라고 되뇌는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 있어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완전했다. 헤르만 헤세는 방황하고 갈팡질팡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으며, 이에 관한 내 생각과 내가 느낀 것을 풀어둔 글을 한 번 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흔히 우리는 타인에게 가치관이나 성격을 물을 때, 당신은 이성적인 사람이냐 감성적인 사람이냐라고 묻는다. 또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냐 도전적인 사람이냐라고 묻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는 이러한 질문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두 인물의 생애를 보여줌으로써 답한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나르치스는 다니엘 수도원장이 이끌고 있는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젊은 생도였다. 그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학문적인 측면에서 모두 그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그에게 너무나 고립되어있고 외로운 존재라고 말한다. 숭배자는 있을지언정 친구는 없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이후로도 나르치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수도원 내에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원죄라는 짐을 지고 태어나 이를 회개하고 갚아나가야 할 기독교 신자로서 그리고 끊임없이 탐구해야 할 학자로서 안정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에게 일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다니엘 신부를 이어 수도원장이 되면서 결실을 맺는다.


그러던 중 마리아브론 수도원에 골드문트라는 소년이 등장한다. 이 소년은 수도원까지 보호자로 동행한 아버지를 보며 "이런 나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정말 특이하게 생긴 아름다운 나무예요! 나무 이름이 뭔지 알고 싶어요."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후에도 그는 수도원 곳곳의 장식품들, 길가의 들꽃들, 마구간의 점박이 말을 보며 쉽게 감상에 빠지고 감탄하곤 한다. 골드문트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과거의 나날들을 속죄하며 살아가는 여느 수도원의 생도들과는 다르게 지금 그가 보고 느끼는 것을 쫒고, 그때마다 거기에 젖어들어야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숙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상반된 이 두 인물을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르치스가 사변가요, 분석가였다면 골드문트는 몽상가로서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로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둘은 그럼에도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수도원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이 둘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의 가치관과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의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좋은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타고난 숙명이라는 것


골드문트는 수도원의 몇몇 친구들을 따라 울타리 넘어의 한 마을로 가 여자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고 한바탕의 일탈이 끝나고 돌아오면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라고 되뇐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이를 탄식하며, '내일 다시 올 거야!'라고 말한다. 후에도 골드문트는 수도원에서 신자로서의 생각보다는 그의 진실된 영혼을 따라가는 삶을 꿈꾼다. 골드문트는 이러한 고뇌가 가득 찰 때, 나르치스에게 조언을 구하곤 하는데, 나르치스가 성실하고 진실된 원생이라고 해서 그의 이러한 일탈과 번뇌들을 꾸짖고 이를 개선해야 한다고 이르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골드문트의 타고난 '숙명'에 관해 잘 알고 있으며, 이를 북돋아주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 관해 생각하며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사랑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을 타고난 그는 꽃 향기라든가 떠오르는 태양, 말이나 새의 비상, 음악 같은 것을 너무나 깊이 체험하고 사랑할 줄 알았다.'


너 같은 기질의 사람들


나르치스와의 대화에도 끝없이 고민하던 골드문트는 우연히 수도원 밖에서 리제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감정은 본인의 앞날을 고심하고 고심하던 골드문트에게 촉매제가 된다. 그리고 동시에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이러한 말을 전한다.

"너 같은 기질의 사람들, 그러니까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정을 지녀서 영혼으로 느낄 줄 아는 몽상가나 시인들,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보다는 거의 예외 없이 더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사람들은 말하자면 모성의 풍요로움을 타고난 존재들이야. 그들의 삶은 충만해 있고, 사랑의 힘과 체험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들이지. 그 반면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들은 너 같은 사람들을 곧잘 이끌어가고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충만한 삶을 전혀 모르고 메마른 삶을 살게 마련이야."


이는 나르치스 스스로도 인지했다시피, 그가 친구 골드문트에게 해 줄 수 있던 최선의 말이다. 그렇게 골드문트는 내면 어딘가에 있는 방황하던 어머니의 본능을 따라 수도원의 울타리를 넘어 자유를 찾아 떠난다. 이는 골드문트의 첫 자립이자 결단이며, 그의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한 첫 행동이다. 떠나는 골드문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리제)에게 가긴 하지만, 그녀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니야. 가야만 하기 때문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가는 거야."


이를 지켜보는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영혼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예감하고 있지만, 그 또한 밟아본 적 없는 땅이기에 도와줄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음을 느낀다. 그저 그가 사랑하는 친구의 안녕을 기원해줄 뿐이다.


방랑자일 수밖에 없었던


이후 수십 년간 골드문트는 독일 곳곳을 자유롭게 방랑하며 이 여자 저 여자를 만난다. 그중에는 오래가지 못한 만남도 있으며, 그가 죽을 때까지 그리워하는 사랑도 있다. 그는 간통을 하기도 하고 살인을 하기도 하며, 흑사병을 피해 도망 다니며 더 극심한 방황을 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골드문트는 한 성당에서 마리아 상을 목격한다. 그는 이 마리아 상에 몰두하며, 형이상학적으로도 그리고 형이하학적으로도 완벽한 조각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조각상을 니콜라우스라는 명인이 조각했음을 알게 된 골드문트를 그를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한다. 이후 몇 년간 그의 밑에서 골드문트는 예술가로 거듭났고 그가 오랜 기간 떠돌며 느꼈던 감정들을 본인의 조각상에 투영한다. 그는 수많은 노력 끝에 사도 요한 상을 완성한다. 그리고 이 조각상은 골드문트 스스로가 오랜 세월 방랑하면서도 그리워한 친구 나르치스를 떠올리며 조각한 것이었다. 다시 자유의 삶을 찾아 방랑하는 골드문트. 한 마을 총독의 애첩 아그네스와의 간통을 벌이다 사형당할 뻔한 골드문트에게 고해 신부가 다가오고 이 신부는 나르치스였다. 그는 어느새 수도원장이 되어있었다. 나르치스 덕분에 목숨을 건진 골드문트는 다시 마리아브론 수도원으로 돌아와 그가 여태껏 추구했던 여성들이 집약된 마리아 상을 만든다. 조각상을 완성시킨 후 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돌아온 골드문트는 이제 너무 쇠약해져 있었고 나르치스의 곁에서 숨을 거둔다.


방랑과 자유


골드문트는 본인을 부르는 자유의 소리를 따라 방랑하고 방랑했다. 그는 때때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정착'에 홀리기도 하지만, 이는 그의 운명이 아니기에 뿌리치고 다시금 길을 떠나는 나그네다. 골드문트의 긴 방랑의 체험들을 보며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영화 <가을의 전설 (1994)> 속 '트리스탄'이 떠오르기도 했다. 결국 이들의 삶을 완전히 채워주는 것은 자유와 방랑이기 때문이다.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자네의 초연함과 평화가 부럽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그에게 맞지 않는 옷이다. 결국 골드문트는 무질서한 자유를 향유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삶의 이분법


자유와 질서. 방랑과 정착.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이분법적인 단어들에 서로 상반된 방향을 고르지만, 이와 동시에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너무 다른 둘이지만 서로가 있기에 둘의 삶은 더욱 풍요로웠다. 수도원 내에서 남들과는 다르게 방황하스스로를 자책하는 골드문트에게 나르치스는 그가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기반으로 해줄  있는 최대한의 조언과 공감을 해준다. 이어 반대로 나르치스는 그러한 골드문트의 기질과 운명 , 방랑과 자유 그리고  모든 것을 예술로 풀어낼  있는 능력을 지닌 골드문트를 한편에선 경외한다.


어둡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가야만 하기 때문에 가야 한다는 골드문트와 이성과 빛을 찾아 끊임없이 탐구해야 하고 이를 위해 안정되어야 한다는 나르치스. 이 복잡하고 어려운 이분법적 접근에 골드문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다! 모든 사람의 삶은 그 두 가지가 서로 뒤섞일 때에만, 이 무미건조한 양자택일로 인해 삶이 분열되지 않을 때에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을 창작하면서도 인생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않아야 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숭고한 창조 정신을 단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대체 불가능한 것일까?... 가정을 지키고 사느라 자유와 아슬아슬한 모험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가슴이 메마르지도 않았던 그런 사람은 없는 것일까? 어쩌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러한 이원성과, 대립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여자 아니면 남자로 태어나고, 방랑자가 아니면 보통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이성적이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되는 것이다. 들숨과 날숨을 동시에 쉰다거나, 남자인 동시에 여자이거나, 자유를 누리면서 질서를 찾거나, 충동대로 살면서 이성을 지키거나 하는 것은 어디서도 불가능했다. 그중 어느 한쪽을 택하면 반드시 다른 한쪽을 희생시켜야 하고, 어느 한쪽에 못지않게 다른 한쪽도 소중하고 갖고 싶은 것이다!'

신비주의자와 사상가


헤르만 헤세의 표현처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각각 신비주의자이고 사상가이다. 나는 나르치스와 같이 다른 누구보다 학문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우월해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때로는 골드문트처럼 내면 누군가의 목소리를 따라 길을 떠나 방랑하기도 한다. 내 손으로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며 창조하고 싶지만, 동시에 이미 내 앞의 누군가 닦아놓은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안정감을 느끼고 싶기도 하다. 이 사이에서 오랜 기간 방황했다. 이제 누군가처럼 굳이 어느 하나를 정해 길을 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상가가 되기 위해 신비주의자가 될 수 있고, 신비주의자가 되기 위하여 사상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 나르치스와 같이 본인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충실하고 이성적으로 사유할 줄 알며, 골드문트처럼 내 운명이 부르는 소리를 올바르게 듣고 착실하게 길을 떠날 수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내 삶의 가치관과 바라보는 방향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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