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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Jan 03. 2021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로 가는 길>

<로마>, 감독이 밝힌 그 본질에 관하여.

평생 영화만 보고 살 수 있을까?


오늘까지 악 700편의 영화를 보았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도 있고, 보았음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작품들도 꽤 있다. 모든 문화 예술 작품들이 그렇듯, 영화 또한 개개인들마다 보고 느끼는 감정과 그 깊이는 다르다. 개인적으로 내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영화는 완벽하다고 생각한 작품들이 있다. 션 베이커 감독의 <플로리다 프로젝트 (2017)>, 베넷 밀러의 <머니볼 (2011)>,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타이카 와이티티의 <조조 래빗 (2019)>,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 (2001)>, 박찬욱 감독의 <박쥐 (2009)>,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 (2018)> 그리고 <원더풀 라이프 (1998)>. 이외에도 <버드맨 (2014)>, <라이언 일병 구하기 (1998)>, <폭스캐처 (2014)>, <대부 (1972)>, <미스 리틀 선샤인 (2006)>, <시네마 천국 (1988)>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보고 난 뒤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에 압도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 영화들이다. 이러한 영화들과 함께라면 정말 평생을 영화만 보고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2019년 초, <로마 (2019)>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을 때 처음 보았다. 당시에도 특유의 잔잔함에 크게 감동했었다. 짧게 한 줄 평을 남기곤 하는 '왓챠 피디아'에는 '언젠가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이런 영화를 찍고 싶다.'라고 글을 남겨두기도 했다. 시간이 지난 2020년의 마지막 날. 다시 한번 <로마>를 재생했다. 그때 느낀 감정과 결은 같았지만 그 깊이는 더 깊었다. 봉준호 감독이 작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전한 수상 소감 중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을 언급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이 영화의 리뷰 중 어느 누군가가 이미 써두었던 글이지만, 나 또한 이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스스로의 삶에, 알폰소 쿠아론이라는 사람에 너무나도 깊은 여운을 남긴 유년기의 시점을 그는 본인 영화에 담았다.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나고, 어머니와 같은 존재의 유모로부터 돌봄을 받고, 동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부분 등 이런 기억의 조각들은 알폰소 쿠아론을 형성했다. <로마>의 아이들이 영화관에서 보고 있는 영화 '우주탈출'은 훗날 그가 감독한 영화 <그래비티 (2013)>의 영감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개인적 기억과 사건뿐만 아니라 1970년대 멕시코의 민주화 운동 등 사회적 사건 또한 <로마>에 등장하며, 감독도 이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언급하며 영화에 담았다.


알폰소 쿠아론의 시선


앞서 두 차례 본 영화 <로마>에 대해 개인적으로 느낀 감정과 내가 이해한 의미들을 작성했었다. 그러다 문득, 이 영화를 촬영한, 이 영화의 제작자인 감독 알폰소 쿠아론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이 영화를 찍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운이 좋게도 <로마>의 경우 넷플릭스에서 <로마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 중이라 쉽게 그 인터뷰들을 엿볼 수 있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을 사실 <로마>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이전부터 <칠드런 오브 맨 (2006)>과 <그래비티>를 보고 촬영 기법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물론 각본과 연출 또한 인상 깊었지만, 그 보다는 영상에 감탄하며 보았던 것 같다. 그렇다 보니 당시 감독보다는 위 두 영화의 촬영 감독인 엠마누엘 루베즈키에 빠져 들었었다. 그가 참여한 <버드맨>,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2015)> 모두 롱테이크를 활용해 더욱 완성도 있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서 영화에서 촬영 기법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로마>에는 그가 개인적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알폰소 쿠아론은 인터뷰에서 그가 일일이 촬영에 관여하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로마로 가는 길 (2020)>은 2018년 멕시코에서 <로마>를 촬영하던 알폰소 쿠아론을 현장 곳곳에서 인터뷰한 내용들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그는 자신의 유년기를 담은 영화인 만큼, 당시의 배경과 감정들을 모두 최대한 실제와 가깝게 영상에 담고 싶어 했다. <로마> 속의 집 또한 그가 실제로 살던 동네에 집을 리모델링하여 촬영하였으며, 현관 옆의 차고는 그 타일이 기억 속의 것의 것과 달라 비슷한 타일을 찾느라고 꽤나 고생을 하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 정도로 그는 추억에 대한 리얼리즘에 최선을 다했다. 지금은 사촌 집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그가 실제 집에서 쓰던 가구들을 빌려와 촬영 현장에 갖다 두었고, 어렸을 때 형제들과 놀던 장난감들도 기억을 더듬어 동일한 것들로 채워 넣었다. 도시의 자동차, 사람들의 복장은 두말할 나위 없이 1970년대의 것들을 배치하였고 멕시코시티의 건물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너무 많이 달라져, 세트를 새로 짓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제작비도 본래 예상보다 3배 정도 늘어났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로마> 촬영팀들은 알폰소 쿠아론 머릿속의 기억들을 실제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어쩌면 그저 몰입을 돕는 무대 배경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정말 궁금한 점은 과연 이 무대에서 뛰노는 배우와 그 서사적 흐름은 어떠했느냐는 것이다.


이미 지나온 것의 재해석


그는 모든 배우들에게 각본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는 대부분의 영화 촬영과는 다르게 이야기의 시간 흐름 순서에 맞게 촬영되었다. 따라서 배우들은 이전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는 인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는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배우들은 더 실제에 가까운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일례로 극 중 클레오가 산부인과에서 사산하게 되는 장면에서 배우 얄리차 아파리시오는 실제 아기를 데리고 촬영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와 같게 만든 죽은 아이 모형이 사용되었고, 이는 이 사실을 모르고 촬영에 들어간 얄리차의 감정을 더욱 당황시키고 고조되게 만들었다. 더불어 그녀의 출산을 돕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실제 현직에 있는 사람들이 연기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알폰소 쿠아론은 본인이 잘 모르는 의학 분야의 전문성을 끌어낸 연기를 그의 영화에 담아낼 수 있었다. 따라서 <로마로 가는 길>에서 알폰소 쿠아론이 의사와 간호사에게 아이를 사산한 뒤의 과정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장면도 여러 번 등장한다.


알폰소 쿠아론은 <로마>를 촬영하고 그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다른 인물들의 그때 그 감정도 이해하려 애썼다. 아버지가 캐나다 퀘벡으로 출장을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집을 떠날 때, 그는 이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이 될 줄은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그의 나이 50이 넘은 현재 그는 알고 있다. 그것이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로마로 가는 길>에서 알 수 있듯 그의 감정은 이 장면을 촬영하며 매우 흔들린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동시에 그때의 아버지를 남자로서 이해해보려 했다는 그의 말처럼,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상충한 것이다. 그는 자꾸 화가 난다며 촬영 도중 공원으로 산책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극 중 클레오에 있어 그녀를 버리고 도망가는 페르민에 있어서도 그는 다시 한번 타인의 감정을 이해해보려 해야 했다. 알폰소 쿠아론은 지금 와서 돌아봤을 때, 페르민의 실제 인물은 무술을 가르쳐 준다는 멕시코의 권위주의 정권 아래 경찰력의 일환으로 이용당했던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자유로움을 느꼈다는 무술을 활용해 민주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보다는 그 또한 사회적 흐름의 피해자였다고 본 것이다. 이는 그의 행동에 대한 알폰소 쿠아론의 최대한의 이해 과정이었다. 아무도 답은 알 수 없지만, 감독은 페르민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로마>에 녹여냈다.


상징


그는 <로마>에 추억의 재현과 더불어 다양한 상징들을 함께 넣어두었다. 그는 비행기에 관해 언급하는데, 비행기란 하늘의 금속 조각일 뿐이지만 하늘을 난다는 물건 자체는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현실이 아닌 초월한 어딘가. 그가 영화 속에 비행기 장면들을 왜 넣어둔 것인지는 밝히진 않았지만, 난 이것이 클레오와 관련된 장면에서만 등장한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그녀에 대한 감정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숱한 어려움 속 현실을 벗어난 그의 유모만이 가지고 있는 고매함. 이것이 알폰소 쿠아론이 어릴 적 그의 유모를 바라보던 시선과 감정이 아닐까?


아버지가 가족을 떠날 때, 군악대를 가르고 거슬러 길을 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떠난 후, 남은 가족들이 여행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군악대는 다시 한번 등장한다. 이 또한 감독은 의미와 상징에 대해 밝히지 않았지만, 내가 느낀 점은 이렇다. 군악대란 승전이나 축하의 의미로 연주하고 행진하는 군부대이다. 대부분 영광의 의미로, 행사를 할 때 군악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군악대의 행렬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영광의 뒷부분으로 발을 항한 것이다. 그러나 남은 가족들이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군악대를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트럼펫을 부는 군인들은 어머니와 네 명의 아이들 그리고 클레오 이들의 앞날을 축하하고 좋은 일들을 기원해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승전 후 돌아온 군인들을 맞이할 때처럼.


실존과 본질


이와 같이 알폰소 쿠아론은 그의 기억 속의 것들과 부합하는 무대 장치들 그리고 인물들의 감정들을 최대한 동일하게 영화에 담아내려 하였다. 그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그는 본질에 집착하였다. 무언가가 실존하기 전 그 본질이 무엇인가, 그때 그것들은 왜 존재하였고 왜 그러한 결과들을 불러왔는가 이 모든 질문에 그는 스스로 답을 찾으려 했다. 그렇게 얻은 결론에서 그는 보다 더 당시의 상황들을 풍요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알 것 같은 본질들은 리얼리즘이라는 실존 안에 담겨 <로마>를 만들어냈다. 그는 <로마>가 그의 첫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전달하고자 추구하는 것이 처음으로 이 영화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


<로마로 가는 길>을 보고 나니 정확한 알폰소 쿠아론의 유년 시절 추억과 그 의미들을 자세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로마>를 보고 느낀 것들과 실제 감독이 추구하려 했던 의미들에는 차이점이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영화야 말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감독이 추구한 것과 관객이 개인적으로 이해한 것이 여러 가지일 때, 비로소 감독의 영화이자 관객의 영화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표현한 실존이 아닌 그 속의 진실된 의미인 본질은 감독만이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정확한 본질이 어떻든, 다양한 해석과 감정을 전달한 <로마>는 충분히 여러 의미와 가치를 담아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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