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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태 Dec 31. 2020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

그 온전함과 자유를 느끼는 감정에 관하여.

로마


<Roma>

2018년 12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장편 연출 작품 <로마 (2018)>. 개인적으로 여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두 교황 (2019)>이나 <아이리시맨 (2019)>, <결혼 이야기 (2019)>와 더불어 가장 감명 깊게 본 작품이다. <로마>가 갖는 다양한 의미들을 적어보았다.


알폰소 쿠아론


알폰소 쿠아론

<칠드런 오브 맨 (2006)>, <그래비티 (2013)>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유명 영화감독 알폰소 쿠아론. 그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전개 방식과 특유의 롱테이크 기법들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는 <로마>가 본인에게 영화인으로서 삶에서 반드시 언젠가는 찍었어야 하는 작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어렸을 적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는 감독 스스로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큰 의미를 주었다. 더불어 촬영적인 부분에서 흑백 화면과 곳곳의 롱테이크 촬영 기법 그리고 긴 호흡은 영화를 더욱 풍요롭고 먹먹하게 만들었다.


영화 <로마>를 보고 전체적인 생각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클레오에게 자유로움이 갖는 의미 I


클레오가 일하고 있는 집

<로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는 자유로운 감정을 보여준다. 사실 그 자유라는 것이 별다를 것 없다. 억압받던 정권 아래서 해방을 외치는 것도, 수많은 굴레를 벗어던지고 황홀감에 휩싸이는 것도 아니다. 작고 특별할 것 없는 자유로움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겐 다음날을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한다.


영화는 주인공 클레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클레오는 멕시코 시티의 주로 중산층이 거주하는 구역인 '로마'의 한 가정 가정부이다. 물론 이 집의 주인 가족들은 그녀를 따뜻하고 인간적으로 대한다. 그러나 그녀가 하는 일들은 집안일들로 하루 종일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식사 후 거실에 모여 다 같이 TV를 보는 가족들 옆에서 무릎을 꿇고 함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하기도 하지만, 곧 해야 할 일에 대한 지시가 떨어지기도 한다.


그런 그녀는 본인이 편안함을 느낄 때 그리고 편안함을 주고 싶을 때면 스페인어가 아닌 미스텍어를 사용한다. 같은 가정부 동료인 아델라에게, 본인을 아주 잘 따르는 아이들을 재우고 깨울 때처럼 말이다. 멕시코는 본래 스페인어를 사용하던 국가가 아니며, 과거 스페인의 침략 이후 스페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스페인어로 대화하는 것보다 미스텍어로 대화한다는 것이 보다 내면의 진실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진심을 전하고 있다는 점을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클레오는 미스텍어를 구사하면서 그녀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평온함을 선사했다.


클레오에게 자유로움이 갖는 의미 II


클레오와 페페

클레오가 돌보는 네 명의 아이들 중 페페는 유독 클레오를 잘 따른다. 페페는 옥상에서 형과 총싸움 놀이를 하던 중 '나는 죽었다.'며, 앉은자리에 드러누워버린다. 빨래를 하던 클레오는 그를 깨우려다 "그럼 나도 죽을래." 하고는 머리를 맞대고 눕는다. 죽어있는 것도 괜찮다고 말하는 클레오. 맑은 하늘 아래 앞치마를 한 채로 옥상에 누워있는 클레오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을까?


클레오는 페르민이라는 남자와 데이트를 한다. 그는 무술에 심취해있고 여기에 삶을 걸었다고 말한다. 어두웠던 본인의 지난 삶에 무술이라는 존재가 들어와 보다 명확하게 만들어줬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는 무술을 할 때 자유로움을 느낀다. 물론 그는 클레오와 함께일 때도 이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들의 애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클레오는 그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정작 아이의 아버지인 페르민은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클레오에게 자유로움이 갖는 의미 III


사라졌던 페르민을 찾아간 클레오

클레오는 페르민을 찾아 나선다. 페르민은 자신이 심취해 있는 무술을 가르치는 훈련소에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게 바쁘다며, 한 번만 더 찾아오면 아이와 클레오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윽박지른다. 그는 이 무술을 배운 뒤 학생운동을 탄압하는 경찰이 된다. 그가 자유로움을 느끼던 무술이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학생들의 자유를 향한 운동을 억압하는 도구가 된 모습을 보며 클레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페르민 스스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페르민이 무술을 민주화운동을 저지하고 싶어 배운 것인지에 관한 진실은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적어도 그들이 겪고 있는 내면의 혼란들은 유추해볼 수 있었던 부분이다.


그 바탕에는 클레오의 온전함이 있다


클레오의 온전함을 보여주는 장면

페르민을 만나러 떠난 여정에서 클레오는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온 것은 아니다. 훈련소의 사범은 정신과 영혼을 훈련하고 잠재 능력을 깨워 본인 의지로 기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며, 눈을 감고 시범을 보이는 사범. 모두가 따라 하려다 흔들리지만 단 한 명, 클레오만큼은 꼿꼿하다. 현재 처한 어려움들이 그녀를 쓰러뜨리기에 그녀는 온전하고 강하다.


소피아에게 자유로움이 갖는 의미


남편 안토니오와 아내 소피아. 소피아는 그의 미래를 알았던 것일까?

안주인 소피아에게도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산층의 경제적 형편이 꽤 괜찮은 그녀이지만, 실은 의사인 남편은 외도에 정신이 팔렸다. 캐나다 퀘벡으로 연구 출장을 간다고 한 남편은 실은 멕시코 시티에서 다른 여자와 지내고 있었다. 후에 이러한 사건은 클레오와 소피아가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지내게 되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소피아는 남편 안토니오를 출장 보낼 때, 왜인지 눈물을 흘리고 약간의 분노 섞인 표정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그녀를 뒤로 하고 떠난 안토니오는 다가오는 군악대 행렬을 뚫고 지나간다. 그렇게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영광스러운 앞날을 맞이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군악대 행진. 안토니오는 이 행진을 거슬러 길을 떠났다. 그가 영광의 앞날을 뒤로하고 어둡고 치열했던 전투로 가듯, 불행한 나날들을 향해 사라진 걸까?


클레오와 소피아에게 자유로움이 갖는 의미


클레오의 검진을 위해 병원으로 가는 둘

이제 남자들을 떠나보낸 클레오와 소피아는 처음으로 둘이 자동차를 타고 병원으로 간다. 아직 운전이 미숙하고 길을 찾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게 무슨 문제인가? 둘은 독립된 존재로서 자유로움을 충분히 보여준다. 소피아와 클레오. 이 둘만으로도 충분히 위로와 삶은 가능하다.


차는 여기저기 긁히고, 남편이 잘 들어오던 차고에는 소피아의 미숙한 운전 실력으로 인해 흠집이 난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소피아는 클레오에게 남은 건 우리들 뿐이며, 우리들끼리 잘 살면 되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때로는 클레오가 소피아의 화풀이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서로의 위로로 봉합된다.


연대감


'우리들'의 연대감

클레오는 끝내 딸아이를 유산했다. 이어 소피아는 이제 남편과 따로 살게 되었다며,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전한다. 네 명의 아이들, 소피아 그리고 가정부 클레오는 새 차를 샀기 때문에 이젠 필요 없게 된 예전 차, 갤럭시를 타고 툭스판으로 여행을 간다. 그리고 우리끼리 행복하게 모험을 하며 살면 된다고 강조하는 소피아.


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무기력하던 클레오. 그녀는 수영을 할 줄도 모른다. 그러나 소피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바다에 허우적대는 파코와 소피를 발견한 클레오는 다가오는 높은 파도에도 아랑곳 않고 오직 아이들을 구하려 몸부림친다. 그렇게 해안으로 나온 아이 둘과 클레오. 다른 아이들과 소피아가 뛰어와 서로 껴안으며 영화는 마무리되어 간다.


그리고 사실은 그 아이가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울먹이는 클레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내내 침묵을 지켜오던 클레오의 이 말은 정말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본인이 보살피는 네 명의 아이들을 내 아이처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클레오의 이어지는 장면들.


여행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들. 아버지는 본인의 짐을 챙겨 가족을 떠났다. 이어 차에서 짐을 내리는 이들을 향해 행진해 오는 군악대 행렬. 마치 이들을 위로하고 행복한 앞날을 기원한다고 말하는 듯한 트럼펫 소리는 힘이 된다.


비행기, 클레오의 정신적 자유


<로마>에서는 비행기가 지나가는 장면이 세 번 나온다. 영화가 시작할 때 바닥을 청소하는 클레오 위로 한 번, 소피아가 페르민을 찾아간 훈련소에서 사범이 시범을 보일 때 그 뒤로 한 번 그리고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클레오의 머리 위로 한 번. 비행기는 하늘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을 때만 날아갈 수 있다. 그래서 비행기 혹은 난다는 것이 자유로움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클레오도 그렇다. 영화 속 클레오의 부분은 그녀의 전체적인 삶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이다. 그러나 그 수많았던 역경 속에서도 클레오는 흔들리지 않았다. 눈을 감고 한 발을 들고 가만히 서있을 수 있던 것처럼. 안정되고 올곧은 그녀의 정신. 그 속에서 클레오는 자유로움을 느끼며 온전하게 살아간다.


나는 그녀로부터 왔다


감독 알폰소 쿠아론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나의 클레오, 리보를 위하여. 지금의 내가 누구로부터 왔는가. 지금의 나는 누가 만들어주었는가. <로마>는 그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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