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영청 달 밝은 밤이었다. 정말 진부한 표현이지만 어둠 속 거실로 스며드는 그 은근한 빛을 표현해 내기엔 그만한 단어도 없을 성싶다. 당시 7살이던 큰 아이는 그 빛 속에 오롯이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아이의 그 간절함에 우리까지 덩달아 숨을 죽이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아이의 아빠가 슬며시 물었다. 달님에게 무슨 소원을 빈 거야?
아이의 입에서 어떤 아름다운 말이 쏟아져 나올까 우리는 침을 꼴깍 삼키며 아이의 입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글쎄,
달님, 우리 엄마 좀 착하게 해 주세요
라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그 이후 나는 우리 집에서 ‘악마엄마’로 불리게 되었다.
엄마는 왜 악마가 되었나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두 아이 모두 초등학생이 되었다. 방학 숙제 중 스스로 주제를 정해서 무언가를 하고 제출하는 게 있었는데 그 예시가 독후감 쓰기, 그림 그리기, 발명품 만들기 등이었다. 나름 자기주도학습을 하는 아이로 길러보겠느라 나는 몇 번의 잔소리를 삼키고 수 번의 불안감을 누르며 드디어 개학 전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방학 숙제는 다 했니?”라는 나의 질문에 “아니요”라고 당당하게 대답하는 아이의 모습에 나는 그만 이제껏 누르고 삼켰던 것들을 마구 쏟아내 버리고 말았다. ‘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로 시작한 그것은 ‘너를 믿고 가만히 놔둔 내가 바보다’로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아이는 우두커니 서서 엄마의 그 질풍 같은 잔소리와 불안감을 모두 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얼른 들어가서 숙제해!” 날카로운 외침으로 자리는 겨우 마무리되고 아이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간 지 5분도 안되어 아니 5분은 무슨 3분도 안되어 아이는 숙제를 다 했다며 거실로 기어 나왔다. 아이가 내민 숙제장에는 단 하나의 문장만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매일 5분 명상했음”
나는 어이가 없어 실소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이 아빠가 목을 길게 빼고 숙제장을 보더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잘했다, 내 새끼” 하고 와락 안는 것도 빼놓지 않고.
후에 물어보니 그 반짝이는 기지가 놀랍고 기특했단다.
청소를 하고 밥을 하고 숙제를 봐주는 엄마는 늘 잔소리다. 먹은 과자 껍질은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라, 반찬 투정을 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라, 제때제때 숙제를 해라. 안 그래도 잔소리 투성이인 엄마인데 아빠는 늘 괜찮다며 빙그레 웃는다.
그렇게 엄마는 악마임이 확인되고, 아빠는 천사임이 증명된다.
사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이의 힘을 조금 믿게 되었다. 진짜 명상을 했냐 안 했냐의 사실관계와는 별개로(아이는 진짜 매일매일 ‘명상-멍때리기’를 했다며 주장) 아이도 다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과 생각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원래도 그다지 촘촘하게 양육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한결 더 느슨해졌다. ‘알아서 하겠지’가 한 숟갈 더 진심이 되었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다시 방학을 하고 개학을 하루 앞둔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물었다.
애들 방학 숙제는 다 했나?‘, ’ 몰라? 자기들이 알아서 했겠지’ 그러자 엄마는 답답한 듯 내게 ‘너는 애 어마이가 돼서 왜 그렇노, 개학 날 숙제를 안 해가면 선생님이 뭐라고 생각하시겠노? 대체 저 집 어마이는 뭐 하는 어마이고 안하겠나?’ 엄마의 말에 나는 대꾸했다.
“그 선생님 참으로 이상하네, 와 자꾸 그 집 어마이만 찾노? 그 집 아바이는 뭐하고?”
빌런을 찾아라
내가 강의에서 도입부에 흔하게 제시하는 과제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를 나열하고 그 동화 속 악당을 찾아보는 활동이다. 주로 헨젤과 그레텔, 효녀심청, 장화와 홍련 등이다.
사람들은 줄줄이 새엄마, 뺑덕어멈, 마녀할멈 등을 말한다. ‘더 없나요? 진짜요?’ 하고 되물으면 그제야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아빠요?’
그래, 아빠다. 아빠.
새엄마가 애들을 산속에 버리자고 했을 때 그러기로 하는 아빠, 딸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려고 할 때 너무 슬피 울지만 스님과의 약속을 파기하지 않은 아빠, 딸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단번에 외가로 보내버리는 아빠, 외가로 가는 길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던 아빠(외가에 잘 도착했는지 연락 한 번 해본 적 없다는 게 드러나는 대목). 위의 동화 속 빌런에는 새엄마뿐만 아니라 ‘아빠’도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놓쳐버리고 만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를 먹이고, 돌보고,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은 ‘여성’의 일이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이 견고하다. 실제로 조리사, 교사, 요양보호사 등의 직업군은 여초현상이 뚜렷하고 이는 다시 성 역할 고정관념을 단단하게 만드는 순환의 고리 속에 있다. 그래서인지 동화 속 주인공이 돌봄이나 교육을 받는 입장일 때 우리는 아버지(남성)보다 어머니(여성)의 역할에 더 집중하게 되고 아버지의 언행에는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된다. 그렇게 아버지의 돌봄과 교육과 양육의 역할은 작아지고 지워진다. 그래서인지 맞벌이를 하더라도 어머니의 적극적 양육과 돌봄은 당연한 것이지만, 아버지의 적극적 양육과 돌봄은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는 일이 된다.
의무가 아닌 권리
우리 아이는 하루 중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이 늦은 밤 엄마 옆에 누워 엄마의 쓰다듬을 받으며 자신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 말이야 너는 정말 몽글몽글한 순두부 같았어. 너무 보드라워서 아빠는 네가 부서질까 봐 겁이 나서 안지도 못했지’로 시작한 얘기는 언제나 ‘그때가 정말 너무 빨리 지나갔어. 너무 그리워’ 하면 ‘엄마, 언젠간 지금도 너무 그리울 거야’라는 아이의 말에 ‘그럼, 지금도 하루하루가 너무 아까워. 그러니까 지금도 많이 많이 사랑해 줄 거야’로 마무리된다. 자신이 얼마나 귀함을 받았으며 그건 지금도 앞으로도 지속된다는 서사를 아이는 좋아한다.
국회입법조사처는 2020년 OECD 자료를 인용해 한국은 출생아 100명당 여성 21.4명, 남성 1.3명이 육아휴직을 사용했다며, OECD 19개 국가 중 육아휴직 사용일수가 가장 적다고 지적했다. 아빠 육아 휴직자가 아기 100명당 1~2명 수준에 그친다는 얘기다("말로는 쉬어라, 내가 쉬면 밥벌이는?".. 빛 바랜 남성 육아휴직,제주방송 김지훈,2023. 6. 7. 11:07)
남성이 육아휴직을 시도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남성당사자의 성역할고정관념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신은 육아휴직을 쓰고 싶어도 정작 ‘자네 안사람은 뭐하고 자네가 육아휴직을?’ 이라는 윗선의 곱지 않은 시선, 그에 따르는 승진누락이라는 차별, 여성보다 남성의 임금이 더 높은 데서 오는 경제적인 문제들이 한데 꼬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가 동시 혹은 순차적으로 육아휴직을 사용할 때 휴직급여를 기존보다 더 높였더니 해당 지역의 남성육아휴직 비율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아이를 기르는 것, 아이와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을 여성의 몫으로만 남겨둘 때 엄마는 언제나 잔소리 악마로 전락될 수 있다. 또한 아이와 함께 누워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누리며 미래를 그리는 것도 엄마만의 달콤한 열매가 될 것이다. 아이와의 일상이 엄마만의 의무로 남겨지거나 아빠가 ATM기로 소외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일상이 누군가가 짊어져야 할 의무가 아니라 우리가 당연히 요구하고 행사해야 할 권리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