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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키 Sep 06. 2024

아무도 아닌, 황정은

문학동네


 나는 타인에게 속 보이는 것을 아주 못하고 보이는 즉시 들켜버리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버린다. 나를 속이는 거다. 그래서 나는 나를 모른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선택을 하는지, 내가 어떤 것을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반면, 황정은의 인물들은 자신에게 아주 솔직해서 잔인하고 확실하다. 나는 이상하고 우울하고 비어버린 것들을 잘 쓰는 황정은에게 내 마음을 맡기고 싶다.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 라는 저명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힘든 나에게는 (물론 나 또한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었다) 황정은의 소설을 마주할 때마다 매우 갑갑하면서도 긍정적인 갑갑함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넘어간다. 특히 수록된 단편 <누가> 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와일드한 감정의 변화를 책장이 넘어가면서 느끼게 된다. 


  황정은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생각하고 자책하되 물러서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을 마주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서있는다. 나는 이런 인물들에 인간적인 끌림을 겪을뿐더러 내가 제발 거울을 보았으면, 하고 울기도 한다. 매번 피하기만 바쁜 회피형 인간에게 황정은은 아주 고통스러운 벌을 내린다. 그런데 나는 소설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그 벌이 달기만 하다. 


 <누가>의 주인공은 시끄러운 플레이리스트와 자꾸만 찾아오는 소음공해의 주된 원인으로부터 고통받는다. 동시에 자신이 사는 집 이전에 살았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동정한다. 인간이란 거의 다 그렇지 않나. 나보다 나아보이지 않는 것들을 동정하고, 나아보이는 것들을 묘하게 동경하며 자위하는 것 아닌가. 어쩌면 묘하게가 아니라 대놓고, 확실하게 할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인공 또한 매한가지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소음에 대한 피해를 받으며 타인을 욕하고 저주하고 까내린다. 개를 찾아다니고 윗집을 찾아간다. 그러면서 또 다른 나, 자아가 만들어진다. 이는 아마도 할아버지를 동정하던 자신과는 또 다른 자신일 거다. 


 또 다른 자아가 태어나는 일이 빈번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고된 것이다. 우리는 각자 수억 수천 개가 되는 자아와 싸우며 견고하기까지 해야 한다. 그러면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큰 충돌을 황정은은 담담히 써내려간다. 아무것도 아닌, 그러니까 아무도 아닌 사람에서 갑자기 모든 목격을 떠맡게 된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다가 죽은 친구의 책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도.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담담하게 싸우고 있는 거다. 


 우리는 조금 덜 공격적일 필요가 있다. 요즘 사회는 서로를 까내리지 못해 안달하며 하다 못해 운동화나 머리칼 마저도 공격 받을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서로를 공격하고 까내린 이후 승리하여 얻는 것은 무엇일까. 권력이나 명예? 혹은 잠시간의 우월한 쾌락? 무엇이 더 중요하게-오래 작용될지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 어렵고 눈치 보이는 세계에서 우리는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다. 




 노인이 이 집에서 죽었다면 아무도 몰랐을 거라고 그녀는 지금 이 집에서, 생각하고는 했다. 노쇠로 죽든 자살하든 사고로 죽든 어쨌든 그의 시신은 그에게 무언가를 청구하고 그 빚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나 발견되었을 것이다. 연체금이 있을 때나 호명되는 사람들. 노인은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고 죽은 지 몇 달 만에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뉴스에 나올 만한 사람이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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