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지성사
엄마가 도망간 이후, 돈 버는 아빠에 의해 여러 친인척의 집을 전전하던 우미와 우일 남매는 다양한 사람들이 얽힌 채 살아가는 셋방에 정착한다. 어느 날, 아빠가 금발의 여자를 데리고 와서 엄마라고 부르라고 한다. 그러나 머잖아 여자 또한 도망친다. 아빠는 여자를 잡으러 가고 우미와 우일은 남겨졌다. 우미와 우일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우미와 우일은 높은 철장에 갇힌 새를 보기 위해 굳이 벽돌을 포개어 올라간다. 우일은 새처럼 혹은 만화 주인공 토토처럼 나는 것에 열망이 있다. 날기 위해 기꺼이 뛰어내릴 줄 아는 아이다. 그런 우일에 반해 우미는 새를 다시 내려주고, 우일을 땅에 붙이기 위해 온갖 힘을 쓰는 보호자의 위치에 있다. 아이들이 직접 보호자의 위치에 스스로 선다는 것은 그들을 돌볼 어른이 없는 비극적인 사실을 우리가 인지하도록 돕는다.
이 세계에서 우미와 우일을 돌볼 어른은 없다.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아빠는 사라진 지 오래고 같이 사는 사람들 또한 매한가지다. 사회가 그렇게 두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일어서지 못하고, 누군가를 돌보던 누군가는 사랑에도 지쳐 떠나버린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궁금증을 유발하는 부부 또한 공격적인 세상에 잔뜩 경계하며 살아간다. 다른 이들 모두 매한가지다. 일을 하기 위해 며칠 밤낮을 집에 못 들어오고, 나이가 들어 지친 사람들이 있다. 상담어머니까지도 우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미 또한 그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우미가 이해하는 것은 결국 새 한 마리뿐이다.
새,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 계속 울어버리는 바람에 자도록 검은 척을 씌워두는 것. 그러면 새는 밤인 줄 알고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종일 잠만 잔다. 우미와 우일 남매는 의무적으로 떠난 아빠를 기다린다. 큰 성당을 지으러 갔어요, 라면서. 아빠가 도망쳤다가 다시 데리러 오고, 다시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과정을 거듭하며 아이들에게 커다란 천을 씌워버린 것이다. 아이들은 그렇게 잠 속에서 살아간다. 오랜 잠을 자고 일어나면 허리가 아프고 눈도 잘 떠지지 않는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눌한 걸음걸이로 침대 밖을 나선다. 우미와 우일이 깨어났을 때 겪을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그리고 결국, 우일은 그것을 간접적으로 깨닫는다. 만화방 형 누나들과 어울리다 이유 모를 침묵을 유지하고 소리를 낸다. 미친 듯이 소리를 내고 일어나지 않는다. 날기를 갈망하던 아이가 언젠가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재앙이 온 것이다.
누군가는 우미와 우일을 보며 모성의 부재가 불러온 비극이라 한다. 우미와 우일은 여자의 얼굴이 보이면 잘라 붙이는 습성이 있다. 곰인형의 배를 가르고 온갖 오물들로 채워두기도 하고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곰인형 안에 있어야 할 것들이었다) 어른들에게 아이의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물론 우미와 우일에게 돌볼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어머니의 존재가 혹은 어머니를 존재하지 않게 했던 아빠의 폭력이 따랐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사태가 악화되도록 혹은 아이들이 늦게나마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지 않았던 사회에게 묻고 싶다. 우미와 우일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엄마로 '온' 금발의 여자는 한밤중 마당에서 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셨다고는 하나) 아무도 나와보지 않는다. 형식적으로 월세를 독촉하기도 하고 그 누구도 버려진 남매를 보며 위로하거나 사회적인 책임을 물지 않는다. 그저 먼 발치서 지켜보며 동정할 뿐이다. 남매는 동정 속에서 저들끼리 버티는 법을 배운다. 상담어머니의 형식적인 상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딘지 모를 길을 방황하는 것 또한 그렇다. 상담어머니는 애초부터 반복되는 일상을 매일 적게 할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의 행동이 모두 그릇된 것은 아니다. 월세를 재촉하지만 실질적으로 받아낸 것은 없다고 판단되는 주인 할머니와 관계가 틀어지기 직전까지는 매번 챙겨주던 공장 부부, 일이 끝나고 집에 오면 마당에서 새를 보여주던 다정한 아저씨. 개에 물려 앓아눕자 키우던 개를 순순히 보내는 장님 아저씨까지.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호의는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호의를 보이기에는 그들 모두가 허덕인다.
이렇게 이 소설은 사회로부터 그리고 부모로부터 유기된 아이들을 냉담한 현실에 두고 날기를 갈망시키다가 바닥에 내려놓는다. 날개가 꺾인 채 나는 새도 있다면서. 잔인하고 비극적이다.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한 새와 일찍 철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게 조용한 아이들의 방.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될 때의 괴리는 크다. 나는 새와 날개가 꺾인 새, 날지 못하는 새와 정착하지 못하는 새-이제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아빠가 돌아오지 않아도 울지 않기를 바라며. 우미와 우일이 나아갈 검은 천을 젖힌다.
우리는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 없이 방 안을 둘러보다가 무심히 눈길이 가닿아 멎는 곳의 모든 것이 문득 낯설고 이상해 보인다. 나는 밥상의 다리가 셋인 것이 이상하고 내가 입고 있는 블라우스의 단추가 다섯 개인 것이 불안하고 이상하다.
방바닥을 들치면 죽은 벌레의 껍질이 나왔다. 우리가 여름내 잡았는데도,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