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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가 Dec 02. 2021

차가운 사람들

 지방에 사는 내가 서울로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KTX와 비행기다. 다른 방법들도 있지만 멀미 때문에 오래 타기 힘든 버스는 피하고, 차로 가자니 면허가 없다. 자연스레 두 가지 교통수단을 번갈아가면서 볼일이 생길 때마다 서울을 오고 가곤 했다.


 코로나 때문에 조심한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던 서울에 근 1년 만에 갈 일이 생겼다. 일 년에 한 번씩은 봤던 친한 언니와 번갈아가면서 만남의 장소를 정해 왔는데, 마침 남편이 마산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집에 없다고 자기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자는 언니의 제안을 나는 좋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약속 날짜에 맞춰 KTX 표를 미리 예매했다.


 약속 날 아침,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집에서 KTX역까지 일반 버스를 타고 30분은 가야 한다. 시간 맞춰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니, 토요일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인데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다행히 가장 좋아하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맨 뒷자리 바로 앞자리였다. 너무 앞에 앉아있으면 혹 어르신들이 올라타면 자리를 양보해야 하니, 나는 주로 뒷자리에 앉는 걸 선호했다.


 자리에 앉은 지 십 분 정도 지나 멈춘 정류장에서 할아버지 두 분이 올라탔다. 버스 안을 둘러보니 자리는 어느새 꽉 차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새고 주름이 가득한 얼굴의 할아버지가 거침없이 버스 안을 가로질렀다. 앞자리에 누구도 할아버지가 지나가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내 내가 있는 곳까지 할아버지 두 분은 거리를 두고 성큼 걸어왔다. 웬만하면 여기까지 오는 일 없이 편하게 노약자석에 앉아서 가야 될 것 같은 할아버지가 가까워지며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도 양보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내 시야의 사각지대였던 맨 뒷자리 중간 자리가 비어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퐁당퐁당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 떨어진 두 자리가 비어져 있어 나는 그중 한자리를 차지했다. 할아버지는 멈칫하더니 내가 비워놓은 자리에 가서 털썩 앉고는 맨 뒷자리 남은 자리에 "김 씨! 저기 앉아!"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버스 안 누구도 뒤를 돌아보는 기색 하나 없었다. 막상 앉고 나니, 뒤늦게 든 생각은 혹시 할아버지는 맨 뒤에 앉고 싶었는데, 내가 괜히 양보해서 방해한 거 아닐까? 하지만 그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두꺼운 겨울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불편하게 끼여 앉아서 거친 운전에 흔들이는 맨 뒤 자리에 불편함을 느끼며 내가 앉길 잘했다고 생각이 바로 들었다.


 자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아침을 잘 먹지 않다가 긴 이동시간에 챙겨 먹은 된장찌개와 밥이 제대로 소화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얼른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역까지 십 분은 더 가야 했다. 속까지 안 좋아지니, 자리에서 일어날 수는 없어 사이에 끼인 상태로 몸을 앞으로 기울여 최대한 빨리 역에 도착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버스가 한 정류장에 멈춰 서며 여러 사람이 올라탔는데, 이번엔 할머니 두 분이 올라섰다. 허리가 굽고 머리가 하얀 할머니와, 머리는 거뭇하지만 얼굴엔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였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금방 중년의 아주머니가 양보하는 노약자석에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는 중간에 멈춰 서선 가만히 버스 안을 두리번거렸다. 맨 뒷자리 사이에 끼여 앉은 나와 할머니의 눈이 마주쳤다. 할머니와는 거리가 상당했지만, 나는 할머니의 맑은 눈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랐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할머니는 작고 마른 몸을 버스 기둥에 의지해 서서 갔다. 나는 그 순간부터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게 느껴졌다. 다음 정류장에 멈춰 설 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내리는 문 기둥을 잡았다.

 '이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가느니, 차라리 서서 가고 말자.' 그렇게 가면서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울렁거리던 속도 한결 나은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양보한 불편한 자리엔 주름진 할머니가 가서 앉지는 않았지만 내가 내릴 때까지 누구도 일어나지 않은 버스 안 조용한 분위기가 나는 숨 막혔다.


 언제부터 이렇게 삭막한 세상이 된 걸까. 버스 안 풍경은 추운 날씨에 히터를 켜놓아도 차갑게만 느껴졌다. 고개만 숙이고 꿈쩍 않는 사람들, 두리번거리는 주름진 할머니의 맑은 눈빛이 뇌리에 박혀 남아있다.

 언젠가 학생 시절 버스를 타면 어르신들이 탈 때마다 앞 다 튀어 일어나 양보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동시에 일어나며 민망한 듯 눈을 맞추며 서로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양보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 거린다.


  KTX역에 우르르 사람들과 함께 내리며, 맑은 눈의 할머니도 이젠 앉아서 가시려나,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떠나는 버스를 바라보았다.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불편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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