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에는 코코아를》(아오야마 미치코, 권남희 옮김)
“좋아하는 자리에 앉는 것만으로 힘이 날 때가 있잖아요.” -<목요일에는 코코아를> 중에서
유학 시절, 학교가 끝나고 아르바이트까지 시간이 남을 때마다 집에 들렀다가 갈 것인가 아니면 시간 좀 때우다가 갈 것인가 매번 갈등했다. 그러다가 찾은 방법이 카페. 학교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신주쿠역과 쇼핑몰을 이어주는 사잔 테라스라 불리는 거리가 있다. 사잔은 ‘Southern’의 일본식 발음. 나는 이 거리에 자리한 스타벅스에서 종종 시간을 보냈다.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평일 오후 세 시쯤에는 사람도 별로 없고 음악도 듣기 편한 보사노바나 재즈가 흘러나왔다. 커피 맛을 잘 모르기도 했고, 돈도 많이 없었기에 가게에서 가장 저렴한 ‘오늘의 커피’ 스몰 사이즈를 주문했다. 학교생활은 즐거웠으나 외국어로 반나절 수업을 들으면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서 절실하게 휴식이 필요했다. 커피를 받아가지고 매장 구석(구석이라고 해도 통유리라 밖을 볼 수 있다)에 앉아 밖을 쳐다보면서 멍하게 있다가 보면 서서히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커피는 음미하기보다는 식혔다가 보약 먹듯이 단숨에 들이켰다. 두 시간쯤 스위치 꺼진 로봇 마냥 앉아 있다가 쓰디쓴 카페인이 몸에 들어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하러 가기 전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목요일에는 코코아를》은 열두 편의 스토리를 연작형식으로 구성한 단편 소설집으로 이야기의 중심에는 마블 카페가 있다. 사잔 테라스의 스타벅스가 나에게 재충전의 장소였던 것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게 마블 카페는 휴식처이자 더 큰 세계를 만나기 위한 준비 장소이고, 밀린 일을 하는 일터이기도 하다. 카페 운영자들과 다양한 이유로 카페를 찾는 손님들의 일상. 그리고 마블 카페 손님의 주변 인물들 이야기가 서로 이어져 있다. 인간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은 우연히 마블 카페에 들어왔다가 점장이 된 와타루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돌고 돌아 와타루가 짝사랑하는 손님 마코의 이야기로 끝난다.
“좋아하는 장소에 있는 것만으로 힘이 날 수도 있대. 어떤 사람이 그렇게 가르쳐주었어.” -<삼색기의 약속> 중에서
책의 제목이기도 한 표제작 <목요일에는 코코아를>에서 와타루는 단골인 마코가 늘 앉던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물론 그의 배려심은 마코를 짝사랑해서 발휘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어쨌든, 그때 와타루가 가볍게 건넨 한마디가 마코에게 크게 와닿았는지 마코는 죽음과 사투하는 친구에게도 이 말을 편지에 적어 전했다. 편지를 받은 마코의 친구는 꼭 병을 이겨내서 자신을 위해 편지를 써 준 마코가 좋아하는 장소에 함께 가보겠노라고 다짐한다. 와타루의 한마디가 삶의 의욕을 잃었던 한 생명을 구원하는 순간이다.
'따뜻한 한마디, 작은 친절'
베푸는 당사자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작은 친절은 누군가에게 살고 싶은 의욕을 줄 수도, 마음을 치유할 수도,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줄 수도 있다. 아마도 저자는 코코아처럼 따뜻하고 달콤한 열두 편의 단편 스토리를 통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구원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시절 나에게는 사잔 테라스 스타벅스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아르바이트생도 있었다. 어린 마음에 제일 싼 메뉴를 목소리 내어 주문하기가 부끄러웠던 시절이었는데 나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아르바이트생은 내가 주문할 때마다 ‘오늘의 커피’가 쓰여 있는 흑판을 손으로 가리키던 것을 기억한다. 내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다. 제스처에서 느껴지는 친절함. 마음을 알아줘서 고마웠다. 위안받았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나의 유학 생활을 구원한 것은 센스쟁이 아르바이트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