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혁준 Apr 10. 2021

꿈을 멈추지 않은 이들에 대하여

 내 어린 시절 꿈은 경찰관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내가 발음할 수 있는 직업 중에서 가장 멋있는 발음이었으니까. 초등학교로 진학한 이후에는 과학자로 변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내 과학 성적이 가장 높았으니까. 정말 아무런 의미 없이 정했던 꿈들은 커가면서 희미해졌고 어느새 사라졌다. 나에게 꿈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눠주는 종이에 장래희망 칸을 채우기 위해 빠르게 떠올리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제는 흐름을 따라가는 것에만 익숙해진 것 같다. 꿈을 꾸는 게 쉽지 않다. 나와 같이 꿈을 꾸는 법조차 잊어버린 이들에게 소개하기 좋은 선수들이 있다. 이들은 꿈을 멈추지 않았다.


 때때로 축구판에는 동화 같은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전혀 우승할 것 같지 않은 팀이 우승을 거머쥔다던가, 뒤늦게 축구에 발을 들인 이들이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한다던가, 몰락한 선수가 드라마처럼 일어선다던가. 모든 곳에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어 순수함을 찾기 힘든 요즘, 축구가 사람들에게 순수함을 주곤 한다. 스포츠가 가진 하나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영화로 만들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의 이야기를 가진, 지금 소개할 4명의 선수는 각자의 동화 속 주인공들이다.


1. 카를로스 바카


출처 : 네이버 뉴스


 맨 먼저 소개할 신데렐라의 주인공은 콜롬비아의 스트라이커, 현재는 비야레알에서 활약 중인 카를로스 바카이다. 콜롬비아 푸에르토에서 태어난 바카는 가난한 형편 때문에 20세까지 버스 운전사의 보좌역으로 일하면서 선수 생활을 했다. 당시 소속팀은 아틀레티코 주니오르 2군 팀이었고 바카의 앞날은 그리 밝지 못했다. 이후 2부 리그 바랑키야 FC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나 출전 기회가 없어 베네수엘라 2부 리그인 미네르벤 볼리바르로 이적했다. 미네르벤 소속으로 팀의 1부 리그 승격에 공헌한 바카는 다음 시즌 팀 내 최다골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다시 이적한 바랑키야에서도 득점왕을 차지한 바카는 2009년 아틀레티코 주니오르로 이적했고 2010년, 2011년 리그 득점왕을 차지해 많은 명문 구단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12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벨기에 리그의 명문, 클럽 브뤼헤와 계약하며 본격적으로 유럽에서의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2013년에 세비야로 이적하면서 그의 이야기와 함께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바카의 놀라운 활약과 함께 세비야는 유로파리그 2연패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지금 돌아보면 이때가 바카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이후 챔피언스리그 진출팀을 찾아 이적을 모색하던 바카는 AC밀란으로 향한다. 이적한 첫 시즌 18골을 기록하며 암울했던 팀 상황과는 반대로 바카는 자신의 몫을 해냈다. 그러나 감독 전술과의 부조화, 개인의 부진이 겹쳐 팀 내 입지가 불안해졌고 2017년 여름 이적시장, 임대 형식으로 비야레알로 향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8년 여름 이적시장에 완전 이적을 하면서 34세의 나이로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유럽에서의 커리어가 완전히 최정상급이거나 평탄하진 않았으나 20세에 투잡을 뛰며 공을 차던 청년이 세비야의 유로파리그 2연패를 이끌고 국가대표 공격수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계속해서 꿈을 꿨기 때문이 아닐까.


2. 리키 램버트


출처 : 네이버 뉴스


 다음은 영국판 원조 신데렐라, 리키 램버트이다. 램버트는 10살의 나이로 리버풀 아카데미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나 15살에 방출당한다. 그 뒤 16세에 블랙풀에서 축구를 이어갔으나 2년 만에 다시 방출당한다. 이후 공장에서 일하며 공을 차던 램버트는 매클즈 필드 타운, 스톡포드 카운티, 로치데일을 거치며 차근차근 성장한다. 그의 잠재력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브리스톨 로버스로 이적한 이후였다. 그는 브리스톨에서 약 3년간 155경기에 나와 59골을 기록했고 특히 2008-2009 시즌에는 리그에서 29골을 기록하며 잉글랜드 3부 리그인 리그 1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본격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는 그가 같은 리그 사우스햄튼으로 이적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지금이야 사우스햄튼이 1부 리그의 다크호스이지만 당시 소튼은 3부 리그에 있었다. 2009년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소튼으로 이적한 램버트는 놀라운 골 폭격으로 리그에서는 30골, 모든 대회 통산 36골을 기록하며 2년 연속 리그 득점왕과 리그 1의 PFA 팬 선정 올해의 선수에 등극했다. 이듬해에도 시즌 21골을 기록해 소튼의 챔피언십 승격에 기여했다. 2011-2012 시즌, 리그에서 27골을 기록하며 지난 4 시즌 동안 3번의 득점왕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고 해당 활약에 힘입어 소튼은 프리미어리그로 향한다. 소튼의 승격과 동시에 그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그가 과연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통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챔피언십의 반 페르시’라는 본인의 별명은 어디 가지 않는 것인가. 프리미어리그로 올라온 램버트는 2012-2013, 2013-2014 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올리며 그의 실력이 단순히 운이 좋아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2013년 잉글랜드 대표팀에도 소집되었는데 총 11경기에 나와 3골을 기록했다. 그의 실력을 모두가 알아본 것인가. 리버풀 아카데미에서 한 번의 방출을 경험했던 램버트는 40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과거 친정인 리버풀로 이적한다. 리버풀로의 복귀는 감격스러웠으나 아쉽게도 결과는 좋지 못했다.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인 램버트는 바로 이적 명단에 오르며 한 시즌 만에 WBA로 향한다. 그의 성적은 아쉬웠으나 그가 보인 프로의식은 팬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기 충분했다. 이후 WBA를 거쳐 카디프로 향한 램버트는 2017년 10월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드라마틱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리버풀에서 방출당한 유소년 선수에서 비록 프리미어리그는 아니지만 여러 번의 득점왕, 잉글랜드 국가대표까지,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계속해서 꿈을 꿨기 때문이 아닐까.


3. 제이미 바디


출처 : 네이버 뉴스


 세 번째는 신데렐라의 대표 격이라 불리는, “Vardy’s on fire!”의 주인공, 제이미 바디이다. 셰필드 출신이었던 바디는 지역 연고팀 셰필드 웬즈데이 유소년 팀에서 뛰었다. 그러나 2002년 키가 작다는 이유로 팀에서 방출당하고 만다. 이에 크게 실망한 바디는 8개월간 축구를 등지기도 한다. 이후 위커슬리 유소년팀에 들어가 다시 축구를 시작하고 그의 좋은 모습을 바탕으로 스톡스브리지 파크 스틸즈 유소년 팀과 계약한다. 이제 그의 축구가 빛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때, 바디는 청각장애를 가진 친구가 괴롭힘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가해자를 폭행해 6개월간 전자발찌를 차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럼에도 팀은 바디를 내치지 않았다. 16세의 나이에 유소년 계약을 맺은 그는 2007년에 성인 리저브팀으로 이적해 성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당시 바디가 받던 주급은 30파운드, 한화로 약 5만원이었다. 이 돈으로 어떻게 생활이 가능하겠는가. 바디는 낮에 공장에 다니고 저녁에는 팀 훈련에 참가하며 선수 생활을 했는데 이때 바디의 가능성을 본 핼리팩스 타운의 감독 닐 아스핀은 바디를 부르고 2010년 6월, 15000파운드의 이적료로 핼리팩스 타운으로 이적한다. 이때 주급이 크게 상승해 바디는 축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핼리팩스 타운과 다음 팀인 플릿우드 타운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바디는 2012년 5월, 현재의 팀인 레스터 시티로 이적한다. 이적 직후에는 자리를 잡지 못하며 팬들의 비난과 함께 팀을 떠나려 했으나 당시 피어슨 감독의 설득으로 레스터에 남은 바디는 2013-2014 시즌 그간의 잠재력을 폭발시키듯 16골과 11 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챔피언십 우승과 1부 리그 승격을 돕는다. 그렇게 프리미어리그에 데뷔하게 된 바디의 나이는 만 27세였다. 레스터와 바디의 놀라운 동화가 펼쳐진 것은 다음 시즌인 2015-2016 시즌이다. ‘더 이상 꿈만 꾸는 것은 싫다. 이젠 꿈을 현실로 만들 차례다.’라는 말을 내뱉은 라니에리 감독과 함께 시즌 초반부터 맹활약을 이어간 바디는 루드 반 니스텔루이의 10경기 연속골을 넘어 11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며 기록을 경신했다. 믿을 수 없는 골 행진이었다. 강팀이라 불리는 맨유나 아스날에게도 골을 기록했고 모두가 바디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호지슨 감독은 2015년 5월, 부상당한 스터리지를 대신해 바디를 삼사자군단으로 불렀고 2015년 6월 7일 아일랜드와의 평가전에서 웨인 루니와 교체되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해당 시즌 바디가 주목받은 만큼 레스터도 주목받았다. 시즌 초 레스터를 눈여겨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 영국의 베팅 사이트에 의하면 레스터가 프리미어리그를 우승할 확률은 5000분의 1, 동전을 던져서 동전이 옆으로 서 있을 확률과 비슷했다. 그러나 어느새 레스터는 동화를 완성하려는 순위에 올라있었다. 다들 우스갯소리로 하던 레스터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이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었고 토트넘이 첼시와 비기며 레스터는 리그 우승을 확정했다. 바디는 리그에서 24골을 기록하며 아구에로와 동률을 이뤘지만 아구에로보다 출전시간이 많아 리그 득점 순위 3위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 2위면 어떠하고 3위면 어떠한가. 2010년에는 5부 리그에서 뛰던 청년이 2016년에는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이 되어있었다. 바디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현재도 레스터의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다. 전자발찌를 차던 소년에서 프리미어리그 챔피언,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잉글랜드 국가대표까지.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계속해서 꿈을 꿨기 때문이 아닐까.


4. 데이비드 마틴


출처 : 네이버 뉴스


 ‘서른셋, 드디어 제 꿈이 이뤄졌습니다.’ 마지막 주인공은 데이비드 마틴이다. 지금까지 다뤘던 선수들 중 가장 최근 이야기이고 화제가 되었기에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웨스트햄의 세 번째 골키퍼, 서드 골키퍼인 그는 21년간 웨스트햄에서 활약했던 웨스트햄의 레전드인 자신의 아버지, 앨빈 마틴을 보며 웨스트햄에 대한 꿈을 가졌고 자신도 웨스트햄 아카데미에 들어가 꿈을 키웠다. 마틴은 16세의 나이에 웨스트햄 아카데미를 떠나 3부 리그에서 데뷔를 했다. 그렇게 3부 리그에서 경험을 쌓던 마틴을 리버풀이 불렀다. 마틴은 드디어 꿈이 이뤄지는 상상을 하며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명문, 리버풀로 향했다. 그러나 마틴의 꽃길은 아직이었다. 꿈에 다가갔다고 생각했던 리버풀에서는 한 번의 출장 기회도 받지 못하고 다시 임대 생활을 전전해야 했고 마틴을 부르는 곳은 3부 리그뿐이었다. 프리미어리그 데뷔라는 마틴의 꿈은 여기서 끝난 듯했다. 시간이 흘러 친정팀인 웨스트햄으로 돌아온 마틴은 주전인 파비앙스키, 백업인 로베르트의 뒤를 받치는 서드 키퍼로 열심히 훈련했다. 언제가 올 데뷔날을 기다리며 말이다. 하늘이 마틴의 노력을 알아본 것일까. 보통 한 시즌에 거의 모습을 드러낼 일이 없는 역할이 서드 키퍼인데 마틴에게 기회가 왔다. 2019-2020 시즌, 주전인 파비앙스키의 부상, 세컨드 키퍼 로베르트의 부진으로 데이비드 마틴은 드디어 프리미어리그 데뷔전을 경험한다. 프리미어리그 데뷔 당시 그의 나이는 33살이었다. 상대는 프리미어리그의 강호 첼시였다. 심지어 첼시의 홈에서 펼쳐지는 경기였다. 아무리 프리미어리그 선발 데뷔전으로 들떠있는 마틴이라도 웨스트햄의 승리를 점치진 않았을 것이다. 모든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첼시와 웨스트햄이 첼시의 홈에서 맞붙었을 때 첼시가 패배한 것은 2002년 이후 없었다. 모두가 첼시의 승리를 예상한 그 경기에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첼시의 공격을 마틴은 모두 막아냈고 후반 막판 웨스트햄이 선취골을 뽑아내 첼시에게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렇게 마틴은 33세의 나이에 프리미어리그 데뷔전을 치렀고 데뷔전에서 첼시에게 클린 시트를 기록하며 패배를 안긴 골키퍼가 되었다. 이후 마틴은 3경기를 더 출전하고 파비앙스키가 복귀하자 다시 자리를 내주었다.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선수가 된 골키퍼라는 비난을 받야만 했던 데이비드 마틴, 그는 그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본인이 꿈꾸던 프리미어리그 데뷔도 이뤄냈다. 아직 그의 동화는 끝나지 않았다. 그가 데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계속해서 꿈을 꿨기 때문이 아닐까.


출처 : 네이버 뉴스


 모두가 꿈을 꾸라 말한다. 어릴 때는 꿈을 꾸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며 꿈을 꾸는 것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 알아가게 된다. 그렇게 다들 꿈을 포기하고 잊어간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비싼 값을 치르며 꿈을 꿨기에 열매도 값진 것일까. 그들이 피워낸 꽃은 모두에게 감동을 줄 만큼 아름다웠다. 꿈을 포기하는 게 자유롭듯 꿈을 꾸는 것도 자유로워질 수 있길 바란다. 늦게 핀 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이들의 꽃은 아직 지지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누구를 위한 한일전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