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 핸드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7시 기차를 타려면 늦어도 6시에는 호텔을 나서야하는데 곤히 자는 아내와 아이들을 깨우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시 망설여졌다.
집 나온 지 4일,지칠 만도 한데아픈데 없이 씩씩하게 잘 따라와 줘서 고맙고 다행이었다. 얼굴만 대충 씻고 애들 귀에다 대고 조용히 이름을 불러 보았다.잠에 푹 빠져서 미동도 없을 줄 알았던 아내가 부스스 눈을 뜨는 것이었다. 아이들도짜증 한 번 내지 않고당연한 일인 것처럼 일어났다.모두 스스로 잘 해내고 있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다.
오늘부터는 3일동안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설국을 맛보게 된다. 홋카이도는 러시아와 가까워서 강원도보다 춥다는데 따뜻한 부산근교에서 사는 우리 가족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영하 40도의 강추위와 맞서야 한다. 혹여 감기라도 걸리면 여행을 중단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체력유지를 위해 건강 체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늘방문할 곳은 아칸 국립공원이다.홋카이도에서 최초로 지정된 국립공원이며광활한 원시림과 습지가 펼쳐진 그야말로 대자연을 품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주인공이 바로 여기 아칸 국립공원에 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의 진짜 하이라이트가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칸호수 백조를 바라보며 온천욕 즐기는 상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아칸 국립공원에 가는 길에구시로라는 곳에들러 증기기차 체험을 했다. 오늘도 삿포로 역에서 에끼벤을 샀다. '에끼'는 일본어로 '역'을 말하며, 벤은 '벤또'의 줄임말로 우리말로 도시락이다. 일본 기차역에서만 파는 에끼벤은 여행 중 간단하게 먹을 수 있어 좋았는데 이쁘고 아기자기 한 도시락을 아이들도 아주 좋아했다.
일본에서유일하게 증기 기차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한다.1~3월주1회,주말만 운행하기 때문에 예약은 필수다.
구시로 역에 도착했을 때는 우리를 태우고 떠날 증기기차가 우렁찬 소리를 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플랫폼에서 아이들과 함께 구름 속을 뛰어다니듯 하얀 증기 가득한 곳을 뛰어다녔다.증기 속에서 아이들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모습은 마치'뻥이요'를 외치던 어린 시절을 연상 캐 했다.
증기기차외모는 둔탁한 올블랙이고,바퀴와 부속품들은황동으로 되어 큼지막한 몸통과는 완전히대조되어 품위까지 느껴졌다.둔탁하지만 정교함이 있고, 기계적이지만 예술적이며멋스러웠다.이대로 박물관에 두고 봐도빠지지 않을 작품 같았다.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이 거대하고 웅장한 증기기차를 타고 홋카이도 설원을 달리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땡, 땡, 땡"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사람들도 하얀 연기와 함께 하나둘 사라졌다.
뿌~~~~! 기차는 우렁찬굉음을 뿜어 낸 후,한참 참았다는 듯시커먼 연기를 왕창토하면서얼음 위를 미끄러지듯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창밖에서 역무원들과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우리도환한 미소로 잘 있어라며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시속 30Km.
경치를구경하고, 여유를 즐기기에 딱 좋은 속도였다. 유리창을 통해 보는세상은화선지위에 연한 먹물로 대충 그려놓은 그림 같았다.시간을 멈추면 이런 상황이 아닐까? 네모란 창문 너머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을 떠나는 묘한 느낌까지들었다.작은마을을 지나갈 때몇몇 사람들이우리를 향해 웃으며 손흔들어 주던그 모습과 들판에서 바라보던 고라니도 신기하게 보였다.
예스러운 외형과 달리 기차 실내는 현대식으로 되어 있어 아주 깔끔했다. 가장눈에 띄는 것은 객실 한가운데 듬직하게 자리 잡은석탄난로였다. 옛날 생각을 나게 하는 석탄난로는 기차가 선사하는 또 다른 재미였는데 오징어도 구워먹을 수 있게 갖추어져 있었다. 기차는 모든 역에서 정차하는데정해진 정차 시간이 없고 사람들이 내려서 사진 찍는 시간정도는 충분히 주어졌다.
세월이 참 빠르다 생각하며 살았는데 기차를 타는 동안 빠르게 살아서 놓히는 것이 많겠다는 생각을 했다.멈춘 시간 속에 잠시였지만 나를 놓아둘 수 있어 좋았다. 증기기차 체험은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다.
1시간쯤 기차를 타고 우리는 시베차역에서 내렸다. 처음에는 구시로에서 마슈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시베차'라는 이름이 일본 스럽지 않길래 계획 없이 그냥 내렸다.역 주변 살펴보니 특별한 것은 없고 그냥 평범하고 조용한시골마을이었다.멀리 가지 않고 기차역 주변에서 눈싸움을 하고 다음 기차를 타고 마슈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