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첫 수업은 항상 선사시대부터 시작한다. 선사시대라는 것은 문자 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시대로서 문자 기록이 존재하는 역사시대보다 먼저(先) 있었다는 의미로 선사시대라고 부른다. 선사시대 첫 장은 석기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석기시대는 석기 제작의 정교함에 따라 구석기와 신석기시대로 구분하고 다양한 유물(구석기-주먹도끼, 신석기-갈돌·갈판)을 통해 인류의 발전을 보여준다. ‘우리 선조들의 문화가 이렇게 다양하고 우수했어’라는 것이 선사시대 단원의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석기에 주목하다 보면 더 큰 변화를 놓치게 된다. 바로 기후변화다.
신석기시대 이전 구석기시대는 빙하기 시대였다. 현재보다 지구 평균 기온이 8도 정도 낮았다고 하니 유럽 북부, 북미 지역도 대부분 빙하로 덮여 있었을 것이고 인류도 되도록 적도에 가까운 따뜻한 지역에 살았을 것이다. 약 1만 2천 년 전부터 간빙기가 시작됐고 기온이 오르면서 빙하가 녹기 시작했다. 약 1만 년 전에는 상승한 해수면에 따라 현재의 해안선이 나타났다. 구석기인과 신석기인의 거주지와 생활방식의 차이는 바로 이 기후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빙하기와 간빙기라는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는 대륙의 지형을 바꾸었고 사람들의 이주를 발생시켰다. 기온의 상승으로 일부 지역은 사람이 살기에 너무 더워졌을 것이고 생존에 적절한 기후를 찾아 북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개척 정신이 투철한 혹은 수렵·채집으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구석기인들은 이제는 빙하가 존재하지 않는 더 먼 북쪽으로도 이동할 수 있었다. 간빙기는 인류에게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넓혔고 인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림1 선사시대 수업을 기후변화로 시작하고 인류의 이동을 이야기할 때 빠트리지 않고 거론하는 것이 아메리카인의 기원이었다. 한국사의 경우 이 시기 동아시아 지역 해수면 변화를 나타내는 지도(그림 1)로 설명이 충분하지만 전 지구적 변화라는 관점의 확대를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 이야기를 덧붙였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원에 대한 ‘썰’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래도 정설로 많이 알려진 것은 ‘베링해협 이주설(그림2)’이다. 빙하기에서 간빙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러시아 시베리아와 북미 알래스카는 베링 육교를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현재는 해수면의 상승으로 바다에 잠긴 베링 육교는 기원전 1만 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작은 배와 도보로 건널 수 있었다. 이 루트를 동해 몽골·아시아계 유목민들이 북미로 건너갈 수 있었고 이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 ‘베링해협 이주설’이다. 그런데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에서 아프리카 흑인의 얼굴과 흡사한 거대한 석상과 함께 서구인의 모습과 관련된 전설과 이에 따른 조각상이 발굴되면서 ‘베링해협 이주설’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원에 아프리카·유럽인도 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림2 아프리카·유럽인의 아메리카 이주는 대서양의 존재 때문에 당시의 항해 기술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썰’을 가능하도록 보이기 위해 대륙 이동설이 활용되었다. 대륙 이동설은 현재는 여러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대륙들이 과거에는 하나의 대륙 ‘판게아’로 존재했다는 학설인데 북미는 유럽과 남미는 아프리카와 대륙의 해안선이 맞춰진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대륙 이동설이 사실이라면 어느 시점에 아프리카·유럽은 아메리카와 지금보다는 가까이 있었고 이주할 수 있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물론 두 가지 ‘썰’ 모두 논리의 비약과 허점은 갖고 있다. 더 많은 연구가 진행돼야 논쟁을 잠재울 수 있을 테지만 현재까지는 이것을 토대로 아메리카인의 기원을 찾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아메리카로 이주민들은 빙하기에서 간빙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주를 마쳐야 했고 어느 시점에는 베링해협과 대서양으로 인해 ‘고립’ 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생각하면 ‘고립’이라는 표현이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전 지구적 관점에서 아메리카 대륙은 고립과 같은 상태였다. 다른 대륙과의 교류가 끊긴 채 아메리카 대륙 자체의 힘으로 문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아메리카의 문명은 북미보다는 중·남미에서 발전했다. 에스파냐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아스텍, 마야(서구의 침략전에 이미 전성기를 지났지만), 잉카 문명은 모두 중·남미 지역이 중심지였다. 이들 문명 이전에도 해당 지역에는 몇 개의 발전한 문명이 존재했었다. 테오티우아칸, 톨테카, 카랄, 나스카, 티와나쿠·와리 문명 등을 들 수 있는데 서구 세력이 아메리카로 진출했을 때 이미 붕괴한 상태였다. 몇 가지 예외적인 문명도 있지만 대부분 자연재해(특히 가뭄)로 인해 붕괴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버려져 황폐해진 도시 유적만이 당시 발전했던 문명들의 조각을 맞출 수 있게 하는데, 농사와 함께 발전한 천문학과 종교의식을 위한 신전 건축 등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돌(혹은 벽돌)을 가공하여 빈틈없이 쌓아 올린 건축술은 그 정교함과 규모가 당대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았다. 이렇듯 수준 높은 도시 구획과 도시 환경 조성, 뛰어난 건축술을 가지고 있던 문명들이 자연재해로 붕괴하였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 가지 가능성 있는 추론을 해보자면, 아메리카 문명 대부분이 신을 숭배하고 종교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과 피해가 신이 내리는 벌로 여겨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신 공양(사람을 재물로 삼는) 등의 처절한 종교의식을 통해 신을 달래고 구원을 빌었던 사람들도 끝나지 않는 자연재해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신의 엄한 질책과 분노를 피해 도시를 떠났고 찬란한 문명은 한순간에 폐허로 변했을 것이다.
찬란한 문명->자연재해->종교의 붕괴->문명 붕괴는 아메리카 문명이 가진 한계가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신과 종교가 중심인 사회에서 합리적·과학적 사고는 일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치적 지배자들도 결국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들로 그들의 권력도 결국 신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신과 종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순간 정치·사회 체제는 급속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연재해 같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민의 동요를 막고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는 다른 장치가 있어야 했다.
아스텍·마야·잉카 문명도 신과 종교 중심의 체제였다.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인신 공양은 이들에게 일상이었다. 인신 공양은 곧 종교의식이었고 이것을 주관하는 지배층에는 체제 유지를 위한 통치의 한 방편이기도 했다. 인신 공양을 동해 지배층의 권위와 권력은 강화되고 공포 정치는 극대화되었다. 인신 공양은 아메리카 외에 다른 지역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이다. 한국을 포함한 동양에서는 순장(殉葬)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사후세계와 관련된 고대 사회의 풍습으로 법으로 금지하자 사라졌다. 노동력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고, 무엇보다 순장이라는 인신 공양 말고도 지배체제를 유지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바꿔 생각하면 아메리카 문명에 16세기까지 인신 공양이 존재했다는 것은 종교의식과 공포 정치 외에 다른 효과적인 체제 유지 수단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16세기 서구와 접촉할 당시 아스텍, 마야, 잉카 문명은 분명 특정 분야(농경, 건축, 도시 계획)에서 당대 유럽보다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원주민’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시와 국가를 운영하는 통치 이념과 체제에서 물음표가 그려진다.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발전하지 못하고 석기가 무기의 대부분이었던 점도 동시대 다른 지역과 비교된다.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도 신과 종교 중심의 문명이 있었고, 인신 공양이 사회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시대가 있었다. 또한, 금속 가공 기술이 부족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과거의 일로써 일정 부분 극복하고 변화·발전하였다. 16세기 아메리카 문명에서 유럽·아시아의 고대 문명의 요소가 나타나는 것은 ‘고립’이라는 환경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메리카에 이주한 집단이 다양했다 하더라도 유럽·아시아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며 아메리카 자체의 교류로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양한 집단·사회·문명이 상호 교류할 수 있었던 유럽· 아시아는 확실히 유리한 포지션에 있었다.
아메리카 문명과 유사한 상황은 호주(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서구의 발길이 닿기 전부터 호주에는 검은 피부색을 가진 원주민(아프리카 흑인과는 유전학적으로 다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의 선조는 약 4만 년 이전부터 흔적이 나타나는데 역시 빙하기 때 다른 대륙에서 들어왔다가 간빙기로 고립된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대부분의 호주 원주민들은 석기로 수렵(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고 농경 생활은 미약했다. 종교는 자연현상과 동식물을 바탕으로 한 신앙과 조상 숭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형만 보면 한국사 첫 페이지에 나오는 구석기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메리카보다 더 먼저 고립되었던 것인지, 이주한 집단의 수준이 더 낮고 단일했던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호주 원주민은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원시적이었다. 지정학적 고립의 또 다른 피해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고립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아프리카도 내부를 들여다보면 고립과 교류의 양면성을 가진 곳이다. 지중해, 시나이반도, 홍해와 가까이 접해 있는 아프리카 북부와 동북부 지역은(사하라 이북) 일찍부터 유럽·아시아 대륙과 교류하고 같은 문명에 속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하라 이남 지역은 세계 최대 규모의 사막, 높은 지대에서 내려오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강들로 교역의 어려움이 컸다. (그림 3) 말라리아와 같은 공포의 질병을 일으키는 모기·체체파리의 존재도 아프리카의 출입을 저지시켰다. 시간이 흘러 낙타와 이슬람 상인들의 활동으로 사막 무역이 가능했지만, 제한이 많았고 다른 지역들에 비해 상당히 늦은 출발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프리카 곳곳에서 수렵과 채집, 농경과 목축으로 삶을 영위하며 옛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아프리카 부족들이 그렇게 많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문명과 접촉이 많지 않아 영향을 주고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 3 우리는 인류 발전의 동력이 서로 다른 문명의 접촉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의 역사적 의미를 막연히 짐작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서로 다른 문명의 만남으로 인류는 부족한 것을 채우기도 하고 본래 가진 것을 변화·발전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양식을 등장시키고, 지적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지는 경험을 선사했다.
사신과 상인이 오가는 교류, 집단의 대규모 이동, 다양한 문제와 갈등으로 인한 전쟁 등 문명의 접촉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이웃 지역’으로 제한적이었지만 교통수단(특히 말과 바퀴의 사용)과 교통로가 발전하면서 문명의 접촉은 더욱 빈번해지고, 규모와 범위는 커졌다. 세계사를 잘 몰라도 한 번은 들어 봤을 고대 로마도 이 접촉의 수혜자였다.
‘빛은 오리엔트(동방)로부터’라는 고대 로마의 말이 있다. 오리엔트는 근동(유럽의 동쪽에 가까운 지역)을 말하는데 우리에게는 서아시아, 혹은 중동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할 것이다. 지도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프리카의 이집트를 포함하며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 같다. 수메르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는가. 오리엔트에서는 기원전 3천 년경 이미 발전된 도시 문명이 존재했고 수메르인이 그 문명의 주인공이었다. 수메르인들은 거대한 신전을 건축하고 수준 높은 농경 기술을 구사했으며 문자와 바퀴를 사용하였다. 농업은 계산과 측량의 발전을 촉구했고 그 결과 태음력(1년 12달)과 60진법(1시간을 60분으로, 1분을 60초로 나누는 시간 계산)의 관습이 나타났다.
오리엔트의 이집트에서도 기원전 3000년경 통일 왕국이 등장하고 문명이 발전하였다. 이집트인들도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축하고 문자, 태양력, 10진법을 사용하였으며 훌륭한 농경 기술을 갖고 있었다. 기원전 1700년경 최초로 철제 무기를 사용하고 전파시킨 히타이트, 기원전 1200년경 활발한 해상 활동으로 지중해에 알파벳을 전파한 페니키아, 크리스트교, 이슬람교에 영향을 준 유대교를 창시한 헤브라이 모두 오리엔트 세계의 일원이었다.
찬란한 오리엔트 문명은 동·서로 전달되어 영향을 주었고, 우리에게 익숙한 지중해 세계의 고대 그리스도 오리엔트 문명의 세례를 받았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고대 로마로 이어졌고 로마 인들은 자신들의 번영에 오리엔트의 영향이 컸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오리엔트는 ‘빛’으로 기억되었다.
더 넓은 범위의 교류는 초원길, 바닷길, 비단길(그림 4)이라고 하는 교역로의 개척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일찍
부터 동·서 교역로로 이용된 초원길은 이름에서 유추가 가능한 유목민의 길이었다.
그림 4 대략 기원전 800년경~기원후 200년경까지 스키타이는 이 초원길을 누비며 유목 문화를 전파하고 동·서양의 문화를 전달했다. 특히 금속 문화의 전래가 눈에 띄는데, 근동의 히타이트에서 시작된 철기 문화는 스키타이인들을 통해 중국으로 전달되었고 이들의 청동기·금 장신구 제작 양식은 한반도에까지 영향이 미친 것으로 보인다. 스키타이에 이어 등장한 흉노는 기원전 200년경 ~ 기원후 100년경까지 초원을 누비며 중국의 국경을 위협하였는데 중국은 유목민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보병 중심의 군사 운용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고 진 시황은 만리장성까지 축조하기에 이른다.
바닷길은 중국 동남 연해안-동남아시아-인도-페르시아 만·홍해-지중해를 연결하는 길이었는데 비단길과 더불어 불교를 전달한 통로였다. 특히 동남아시아 불교는 바닷길을 통해 확산할 수 있었다. 이슬람 상인도 이 길을 통해 중국을 방문하였고 한반도까지 찾아왔다. 한국사 수업 시간 스쳐 지나갔던 고려 시대 벽란도(예성강 하류)의 이슬람 상인(아라비아반도에서 왔다고 해서 아라비아 상인이라고도 불렀던)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바닷길은 동남아시아의 향신료가 서양에 전달되는 주요 교역로이기도 했다. 스테이크에 제대로 된 시즈닝을 해본 사람이라면 왜 서양이 그토록 향신료에 목매달았는데 이해할 것이다. 15세기 이후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항해할 수 있게 된 유럽인들도 향신료 무역에 동참하게 된다.
비단길(또는 사막길) 역시 흉노와 중국의 대립 상황에서 개척되었다. 기원전 2세기 중반, 흉노의 계속되는 위협에 중국은 새로운 동맹이 필요했다. 중국 한나라는 서쪽(서역)으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비단길이 개척된 것이다. 중국의 비단은 이 길을 통해 고대 로마로 전달되었고, 서양은 그 보답으로 포도주를 주었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이라 불리는 종이, 인쇄술, 나침반, 화약도 비단길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전해졌는데 7~8세기 서아시아를 장악한 이슬람 세력을 거치면서 더욱 발전된 기술로 진화했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목마름과 실용학문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이 실용주의가 이슬람 과학의 발목을 잡기도 했지만) 이슬람 세계는 중국의 발명품들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시켰고 이를 유럽에 공급하였다.
제지술과 인쇄술은 중국·한반도 등 동아시아 세계에서 크게 발전하였는데 목판 인쇄 이후 등장한 금속활자 인쇄는 한반도에서 기원하여 유럽으로 전해졌다고 여겨진다. 제지술의 발전으로 유럽에 종이 보급이 확대되면서 인쇄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고 15세기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제작으로 이어졌다. 금속활자로 대량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지식과 정보의 보급도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대중들의 지식수준이 높아지면서 서양은 근대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12세기경 중국에서 전래된 나침반은 이슬람의 신앙 활동을 돕는 아이템이 되었다. 쿠란(이슬람교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성지 메카를 향해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해야 했기 때문에 방향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나침반이 없더라도 해와 별자리를 통해 대략 적인 방향을 알 수 있었지만, 안개가 끼거나 기상이 좋지 않은 흐린 날에는 곤란했을 것이다. 이슬람인들은 더 정확한 나침반을 위해 연구를 거듭하였고 유럽은 항해에 적합한 나침반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유럽은 이 나침반을 이용해 15~16세기에 활발한 신항로 개척에 나서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사실은 침략에 가까운)하고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 지역에 무역 거점을 마련하고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했던 제국주의의 신호탄이었다.
화약(火藥)은 중국에서 약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그래서 어울리지 않게 약(藥)으로 불리고 있다. 중국에서 화약 무기는 철구(鐵球, 공 모양의 철)에 화약을 넣어 불을 붙여 발사하는 화포(火砲)로 발전하였다. 중국의 화약과 화약 무기가 이슬람 세계에 전해진 것은 13세기 몽골제국이 이슬람 세계를 침략하는 과정에서였다.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이슬람인들도 화약 무기 제조에 힘썼고 경쟁하듯 무기 개발이 이루어졌다. 서유럽도 이슬람과의 전쟁을 통해 화약 무기에 눈을 떴을 것이다. 14세기~15세기를 거치면서 대포와 같은 화약 무기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16세기 등장한 머스킷 총(장총)은 보병들이 긴 창을 든 중무장 기병을 상대할 수 있게 만들었다. 최신 화약 무기와 이것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보병을 휘하에 둔 군주들은 성(城) 안에서 구식 무기에 의존하고 있는 기사들(군주에 대항했던 영주들)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내부 단속이 확실히 되면서 외부로 힘을 떨칠 수 있는 중앙집권적 체제가 마련되었다.
초원길, 비단길, 바닷길 모두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나라는 몽골제국이었다. 14세기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몽골제국은 교통의 요지에 역참(숙박 시설)을 설치하고 말과 식량을 두어 효과적인 교통·통신망을 구축하였다. 광활한 유라시아의 초원이나 사막을 횡단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몇 시간을 가도 주변의 환경은 크게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것이다. 사람도 좀처럼 만날 수 없다. 세상에 혼자 남았다고 생각한 순간 당신의 눈앞에 몽골의 역참이 나타난다. 다양한 곳에서 출발한 여행자들과 사신들이 한데 어울려, 되지도 않는 손짓, 몸짓으로 왁자지껄 대화하고 있다. 현대판 게스트하우스다! 역참제는 유라시아의 동·서무역·외교·여행을 극적으로 활성화했다. 선박건조술과 항해술이 발전하고 항구가 정비되면서 바닷길 역시 매력적인 교통로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 아프리카 모로코의 이븐 바투타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는 중국을 방문하고 여행기를 남겨 동양을 알렸다.
몽골제국이 동·서문화 교류를 활성시킨 것에 공적이 있다면, 이 시기 중국의 4대 발명품을 전달받은 서유럽은 그 교류의 최대 수혜자 일지도 모르겠다. 19세기 서양 세력으로부터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던 국가들에 서양은 발전한 ‘문명국’이고 ‘롤모델’이었다. 그들이 얻고자 했던 것은 서양의 ‘근대’였다. 그렇다면 서양의 근대는 스스로 이뤄낸 결과일까. 근대의 기원은 14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르네상스의 발흥에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세계의 영향이 지대했다. 앞서 이슬람인들이 전해준 중국의 4대 발명품 이상의 ‘선물’이 있었다.
르네상스는 어원으로 보면 ‘재생’, ‘부활’을 의미한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그리스·로마 문명의 부활을 통해
인간중심주의 문화가 부흥한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전 중세 유럽은 철저하게 그리스도교의 지배에 있었다. 신, 교회, 천국이 중세인의 정신을 지배했고 ‘나’라는 존재는 신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수동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인간중심주의에 흠뻑 빠진 르네상스인들은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고 인간(인간성, 인간의 능력 등)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인간에 관한 탐구는 인간과 관련된 것들의 탐구로 나아갔고, 신과 천국도 중요하지만, 인간 사회의 문제도 중요해졌다. 인간인 내가 현실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이 사고의 전환은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비판과 탐구의 정신이 폭발한 것이다. 서양의 근대인은 이렇게 등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비잔티움 제국과 이슬람 세계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고대 그리스의 지적 유산을 보존하고 전달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로마제국으로 이어졌지만, 서로마제국이 게르만 민족의 침략을 받고 무너지면서 서유럽 지역에서 고대 그리스 문명은 점차 망각되었다. 하지만 동쪽의 로마 비잔티움 제국은 그리스 지역을 굳건히 지키며 고대 그리스 학문과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한편, 이슬람인들은 특유의 열정적인 학구열을 불태워 고대 그리스 문헌들을 수집했고 이를 아랍어로 번역하여 보존·연구하였다. 그렇게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이 동쪽에 남게 되었고 서유럽에 전달되었다. 지적 유산의 교류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를 불러왔고 근대를 낳았다.
동·서 문명의 접촉과 교류를 통해 인류 발전의 동력을 살펴보았다. 19세기 아시아·아프리카에서 잘난 체했던 서양은 ‘교류의 운빨’에 대해서 해명해야 한다. 중세 유럽이 비슷한 시기 중국과 이슬람 세계에 비해 크게 뛰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경제와 과학기술 등에서 낮은 수준을 보였다는 학자들의 증언은 교류를 통한 발전에 서양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다. 결국, 교류를 통해 인류사를 바라볼 때 특정 국가나 민족을 중심에 두는 우월주의가 타파될 수 있다. 원래부터 뛰어난 인종·민족·사회는 없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부족하게 태어났고 서로 고쳐주고, 보완해주며 살아왔다.
지중해 세계의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만 보더라도 고대 오리엔트 문명으로부터 많은 신세를 졌다. 또한 고대 그리스 문명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을 통해 오리엔트 세계로 전달되어 서아시아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후 서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문화는 이슬람 세계가 계승하였고 발전시켰다. 이슬람인들은 분주히 동과 서를 오가며 인류의 다양한 문화를 실어 날랐다. 그들은 동·서 문화 모두를 직접 경험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학문과 기술을 재창출했다. 새로운 산출물은 다시 동·서로 전달되었고 서쪽에서는 르네상스를, 동쪽에는 종교와 무역의 부흥을 일으켰다. 서유럽의 르네상스는 코페르니쿠스와 뉴턴으로 대표되는 17세기 과학혁명으로 이어졌고, 과학혁명의 합리적인 사고는 인류의 진보를 확신하며 낡은 제도와 관습을 개혁하려는 18세기 계몽주의를 등장시켰다. 지금의 서양을 있게 한 18세기 후반의 산업 혁명은 이러한 사고와 사상의 발전을 토대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러 서양은 전 세계로 ‘근대’라는 브랜드를 유행시켰고, 세계는 꽤 오랫동안 열광했다.
문명의 접촉과 교류는 쌍방향으로 작용했다. 상대방을 향해 던진 문명의 부메랑은 전혀 다른 발전된 형태로 다시 돌아왔다. SNS로 배운 레시피로 그럴싸한 음식을 만들고 이것을 다시 공유하면 수많은 사람이 각자 자신의 취향에 맞게 변화·발전시켜 또 공유하는 상황처럼 말이다. 인류는 여전히 교류의 연쇄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스케치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이 밑그림에 색을 입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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